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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반격의 기회 (141/148)


#외전 5화 반격의 기회
2023.08.19.


이카르 또한 르네브를 꼭 닮은 예쁜 딸이 있었으면 했다. 가능한 많이.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이가 생긴 후엔 르네브의 관심을 더욱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그 일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황후와도 이야기가 된 부분이고.”

“맞습니다. 너무 서두르실 필요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드한도 동의했다.

이제야 겨우 황후의 업무에서 벗어난 드한이었다.

물론 바슈케르 황실 사정상 후계가 절실하긴 했지만, 드한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카르가 무병장수할 거란 확신.

그러니 조금쯤은 신혼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반면, 아들 낳은 후궁이라도 되는 양 르네브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던 회색 토끼를 떠올리자 이카르의 눈매가 한층 사나워졌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세 사람은 각자 고민을 시작했다.

르네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수컷 토끼를 그녀 곁에서 떼어 낼 방법을.

***

갑작스럽게 찾아온 많은 변화를 따라가기도 전에 루시우스는 폐위되어 파라디움 황궁에서 내쫓겼다.

황비와 그 측근 세력과 함께 역모로 엮이지 않은 것만큼은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빈털터리나 마찬가지로 황궁에서 쫓겨났기에 상황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었다.

파라디움이 철저한 신분 체계를 따르는 만큼 이제 그는 황족도, 그렇다고 귀족도 아니게 되어 버렸으니까.

‘언젠간 꼭…… 다시 돌아오겠어!’

파라디움 황궁을 떠나던 날 루시우스는 멀어지는 황궁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파라디움 황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날, 자신이 취했어야 할 모든 것들을 되찾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기로.

‘유순하고 나약한 그 1황자가 제대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을 리가 없어.’

2황자 또한 방랑벽이 있어 황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기다리고 인내하다 보면 언젠간 제게 기회가 올 것이었다. 물론 그 기회를 잡을 때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폐황자가 된 루시우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니 두 번째로 자신의 무력감을 실감했다.

처음 무력함을 느낀 건 바슈케르의 황제에게 르네브를 빼앗겼을 때로, 그때의 루시우스는 절망감에 빠져 술에 의존하기까지 했다.

원하는데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게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으니.

하지만 그 고통은 지금의 상황에 견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자로 살며 그간 수많은 교육을 받아 온 그였지만, 실상 생활하는 데는 하등 쓸모가 없는 내용들인 게 사실이었다.

그가 받아 온 교육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제왕학이었다. 먹을 음식을 요리하거나, 침실을 데울 장작 따위를 패는 건 그의 몫이 아니었다.

해서 폐황자가 되어 황궁 밖으로 나왔을 때, 처음에는 번듯한 저택을 매입한 뒤 고용인을 두고 생활했다.

하지만 황궁에서 챙겨 온 금품들은 오래가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고, 루시우스는 구직 활동에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직을 하는 와중에도 평민들이나 하는 하찮은 일 따위는 그의 자존심이 허용치 않았다.

물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평민들 사이에선 대단히 큰 능력을 갖춘 셈이었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는 게 문제였다.

육체노동이 아닌 사무 업무는 대체로 귀족과 연관된 경우가 많았고, 폐황자와 엮이길 원하는 귀족은 없었다.

이전까진 그에게 간도 쓸개도 빼 줄 것처럼 살갑게 굴던 귀족들 모두 차갑게 등을 돌렸다.

‘돌아가십시오, 황자 전하. 아니, 이제는 폐황자이니 공대할 필요는 없겠지. 돌아가라. 네게 맡길 일 같은 건 없다.’

문전 박대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송구합니다만, 지금도 일손이 넘치는 터라 새로 일손을 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하, 대체 그런 셔츠는 어딜 가면 구할 수 있습니까? 마구간지기에게 선물하면 딱일 것 같은데…….’

스스로가 그의 친우라고 입버릇처럼 떠들던 백작 가의 차남은 초라해진 루시우스의 행색을 대놓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 뒤로 귀족과 연관된 일을 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된 육체노동뿐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결심이 무색하게, 그는 평민들 속에도 섞이기 어려웠다.

고위 귀족 특유의 밝은 금발과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벽안.

아무리 초라한 행색을 해도 평민들과는 태생부터 차이가 있는 걸 드러내는 단적인 예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른 자세와 품격 있는 말씨, 우아한 몸가짐 모두 평민들 속에서는 이질적이었다.

그 때문에 루시우스는 어딜 가든 금방 눈에 띄었다.

‘어머, 진짜 잘생긴 오빠네. 어디서 왔어요? 이 동네에선 못 보던 얼굴인데.’

젊은 여자들에겐 물론이고, 시정잡배들에게까지도.

‘몰락 귀족이라도 되는 모양인데, 으스대는 꼴은 도무지 못 봐주겠어서 말이야.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지만, 여긴 우리 구역이니까, 괜히 순진한 여자들 홀려서 등쳐 먹을 생각일랑 말고 썩 꺼져! 내 말 알아들었어?’

루시우스는 제법 검술에 자신이 있던 터라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을 차고 길거리를 활보할 수는 없는 노릇인 데다, 몰매에는 장사가 없었다.

결국, 수도를 떠나 신분을 속인 뒤에야 루시우스는 적은 보수의 일을 구할 수 있었다.

파라디움 제국의 가장 높은 신분에서 바닥까지, 아주 빠른 추락이 아닐 수 없었다.

“어이! 거기.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움직여! 오늘 안으로 다 옮겨야 한다는 말 못 들었어?”

루시우스가 아주 잠깐 회상에 잠길 틈도 주지 않고, 작업 관리자가 소리쳤다.

“후우…….”

그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인 루시우스는 막 도착한 상선 앞에 수북이 쌓인 짐 상자를 수레로 옮겼다.

***

고된 육체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루시우스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무거운 짐 꾸러미들을 온종일 나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검과 책, 이 둘을 제외하면 평생 무언가를 들거나 옮길 일이 없던 그였기에, 여전히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특히나 오늘은 무리했는지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팠다.

“하아…….”

루시우스는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황자였을 적 지내던 침실에 딸린 욕실만도 못한 작은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루시우스는 내부를 쓱 둘러보았다.

그의 주머니 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듯 집 안 풍경은 메마르고 스산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최소한의 가구만을 들여놓았음에도 좁은 내부는 정리 정돈이 되지 않아 너저분하기까지 했다.

“늦었네요.”

거실 구석 테이블 앞에 앉아 바느질하던 에시카가 침침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녀 또한 집 내부 배경과 아주 잘 어우러졌다.

장밋빛 뺨은 색채 없이 푸석거렸고, 고급 향유로 꼼꼼히 관리하던 머릿결은 빗질하지 않아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다.

비단 변한 건 그녀의 외모만이 아니었다. 마음의 창이라는 눈마저 죽은 생선처럼 퀭하기만 하다.

몇 달 사이의 변화라기보단 몇 년은 늙은 것처럼 초췌한 모습이었다.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웠던 모습을 더는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

루시우스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로 향하는 그에게 에시카가 말했다.

“오늘 상인 길드에서 사람이 찾아왔었어요. 약속한 기한이 지났으니, 이제 맡아 두었던 장신구를 팔겠다고요.”

“잘됐군.”

어차피 물건을 맡길 때부터 되찾을 방법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그런 빛나는 장신구를 하고 밖을 나돌아다니면 비웃음만 당할 뿐이니.

“그것마저 잃으면 이제 장신구라고는 하나도 남는 게 없는데…….”

미간을 모은 채로 투덜거리던 에시카가 돌연 들고 있던 바느질감을 테이블에 던졌다.

“루시우스, 어쩜 그렇게 남의 일처럼 말해? 내가 남이야?”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본격적으로 붙어 보자는 듯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입이 있으면 어디 말 좀 해 봐.”

“…….”

루시우스는 그녀가 뭐라고 떠들건 괘념치 않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어……? 지금 뭐야? 기분 나쁘다는 거야? 그래서 문을 그렇게 부서져라 닫는 거냐고.”

밖에서 종알거리는 에시카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그는 당장 침대에 머리만 대면 곯아떨어질 만큼 피곤했다.

그리고 에시카가 제풀에 지치길 바라며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의 낯은 피로해 보였다. 햇볕에 그은 피부는 건강해 보인다기보다는 거칠어 보였다.

도무지 이십 대 초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루시우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거울 속 남자도 따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초라한 제 모습을 회피하듯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그리고 어디서 묻은 것인지 모를 검댕을 닦기 위해 뺨과 코를 문질렀다.

한참 차디찬 냉수로 얼굴과 손을 씻어 내는데 열중하던 루시우스는 문밖의 에시카가 잠잠해진 것을 깨닫고는 수건을 집었다.

얇고 해진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 내던 루시우스는 문득 오늘 낮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양털 옷이 인기라던데. 나도 이참에 양털 옷이나 하나 장만해 볼까.’

‘이 날씨에 벌써 양털 옷을 입는다고?’

입속에 든 음식물의 잔해를 튀기며 남자가 말했고, 맞은편에 앉아 스튜를 떠먹던 남자가 쯧쯧 혀를 찼다.

‘아니,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아, 정말이라니까? 그 왜 이제는 바슈케르의 황후가 되신 그분의 가족들도 양털 옷을 입고 다니신다니까?’

‘……그래? 아, 맞다! 그 소식 들었나? 바슈케르의 황제께서 세이렌 후작에게 공작 작위를 내린다고 하더구먼.’

‘이야, 역시! 바슈케르의 젊은 황제께서는 배포가 남다르구먼…….’

루시우스는 그쯤 식당을 나섰다.

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른 남자의 부인이며 바슈케르의 황후가 된 르네브의 소식을.

바슈케르의 황제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그녀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상기되기도 했고.

‘내가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바람둥이 황제의 세 치 혀에 홀딱 넘어가 버리다니.’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지금 제 꼴을 보면 르네브의 변심은 참으로 현명하다 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거지 같은 생활을 자신과 함께하고 있을 사람은 르네브가 되었을 테니까.

“아니지…….”

문득 든 생각에 루시우스가 작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노크도 없이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언제까지 욕실에만 계실 생각이세요?”

루시우스는 서로에 대한 예의 따윈 개나 줘 버린 에시카에게 화를 내는 대신 무슨 일이냐며 그녀를 쳐다봤다.

“누가 찾아왔어요.”

“누가.”

“황궁에 있을 때 전하를 모셨던 황실 소속 기사였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알렌을 말하는 건가?”

“맞아! 그 이름이었어.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만나 봐요.”

루시우스는 직감했다.

자신에게 다시 회생할 기회가 찾아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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