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첫 부부 싸움의 발단은 (140/148)


#외전 4화 첫 부부 싸움의 발단은
2023.08.18.


“황후 폐하께서는 정말 정이 많으시군요.”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던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작게 중얼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행여나 발생할지 모로는 사고를 대비해 그 아이 쪽에 사람을 붙여 두도록 할까요?”

그렇지 않아도 르네브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에게 비슷한 부탁을 하려던 참이었다.

날씨가 더 추워지거든 양털 옷의 수요는 늘어날 것이고, 르네브는 그 양털을 밀레 자작 부인의 아들에게서 공급받을 예정이었다.

금화가 있는 곳엔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다.

보호할 부모도 없는 아이의 손에 막대한 금화가 쥐어지는 건 위험했다.

가령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모든 재산을 가로채려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었고.

그러니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말대로 아이를 보살피며 금화를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르네브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부탁할게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맡겨만 주세요. 황후 폐하. 최대한 정직한 인물을 양치기 소년의 곁에 붙여 둘 테니까요.”

정말이지 벤더펠트 공작 부인과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정말 신기해. 마치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다니까.’

그녀와 함께라면 고된 황후의 업무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오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바슈케르 황궁의 정원.

르네브는 북슬북슬한 회색 털을 연신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와……. 진짜 부드러워!’

손끝에 감기는 보드라운 감촉의 중독성이 어마어마했다.

어린아이만큼이나 몸집이 커다란 회색 토끼가 제 몸을 쓰다듬는데 열중하는 르네브를 힐끔 바라보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편안히 눈까지 감고, 르네브의 손길을 즐기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살짝 내려놓고는 복슬복슬한 토끼의 몸을 만져 보겠다며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

그러자 회색 토끼가 잽싸게 몸을 옆으로 물렸다.

“참…… 도도하네요. 황후 폐하 외에는 손도 못 대게 하다니.”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아쉬운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가는 건 비단 벤더펠트 공작 부인만이 아니었다.

멀리서 평화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는 르네브와 회색 토끼의 오붓한 모습을 지켜보던 이카르의 미간이 모였다.

“언젠간 스튜로 만들어 줄 테다…….”

이카르가 다소 음침하게 중얼거리자, 드한이 기겁하며 외쳤다.

“폐하! 그랬다간 황후 폐하께 단단히 미운털이 박힐 겁니다!”

이카르는 가늘어진 눈으로 르네브와 회색 토끼를 주시하며 물었다.

“저걸 보낸 자가 누구라고 했었지?”

이카르가 손가락으로 털이 북슬북슬한 회색 토끼를 가리켰다.

“프라벨 상단에서 보내온 선물이라 들었습니다.”

프라벨은 바슈케르 황궁에도 물건을 납품할 정도로 제법 이름난 상단이었다.

“흠, 선물을 보내온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군.”

세이렌 부자가 여기저기 입고 다닌 덕에 양털 옷이 큰 유행을 끌기 시작하자, 여세를 몰아 토끼털로 만든 코트를 유행시켜 보려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영 안목이 없는 건 아닌가 보군.”

“양털 옷을 유행시킨 장본인인 황후 폐하께 토끼를 보낸 걸 보면 안목이 있긴 한 것 같은데…….”

드한이 말끝을 흐렸다.

다만 그들이 르네브의 성정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패착의 원인이었다.

코트를 지어 입으라고 보낸 토끼를 황후가 귀여워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드한.”

“예, 폐하.”

“저것의 성별이 무엇이지?”

“……수컷이라 했습니다.”

드한의 대답에 이카르의 반듯한 미간이 팍 구겨졌다.

‘저 털 짐승을 르네브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만들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카르는 질투심 어린 시선으로 회색 토끼를 노려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그의 잘생긴 미간에 드리운 주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분명 르네브는 변치 않고, 이카르를 사랑해 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동물의 수컷 따위가 내 아내의 사랑을 독차지하다니…….’

이카르는 절대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말을 되뇌며 부득 이를 갈았다.

‘괘씸한 놈.’

***

그날 밤 하루 업무를 마친 이카르는 평소처럼 르네브를 보러 황후의 침실을 찾았다.

드디어 회색 짐승 없이 르네브를 독차지할 생각으로 최대한 빠르게 일을 마무리했으나, 침실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먼저 잠들었나?’

이카르는 아쉬워하며 침대를 짚었다.

“……?”

그런데 손에 닿는 감촉이 무언가 이상했다. 이카르는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손을 떼어 냈다.

복슬복슬하고 토실토실한 감촉.

그건 절대로 르네브의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이 아니었다.

이카르는 혹여 잠든 르네브를 깨울까 조심하며 침대 시트를 살짝 걷어 냈다.

곤히 잠든 르네브의 옆에 몸을 쭉 펴고 편안하게 누워 있는 오동통한 생명체.

“…….”

그건 회색 토끼였다.

르네브와의 낮 시간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밤의 부부 침실까지 침범하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그런 그의 심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회색 털 짐승이 르네브의 팔에 편안히 턱을 기댄 채로 이카르를 올려다봤다.

유리구슬 같은 까만 눈을 바라보던 이카르는 뒷일 같은 건 생각지 않고, 회색 털 짐승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이카르의 행동에 당황한 듯 몇 번 허공에서 발을 구르는가 싶던 회색 토끼가 이카르의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아플 정도로 큰 타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이후로 이카르의 얼굴에 손을 댈 수 있었던 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오로지 르네브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회색 짐승이……!”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이카르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이카르가 거칠게 회색 토끼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려 했을 때였다.

미꾸라지처럼 이카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회색 토끼가 침대에 멋들어지게 착지했다.

그러곤 기분이 나쁘다는 듯 뒷발을 쾅쾅 굴렀다. 커다란 토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대가 출렁였다.

“그만……!”

이카르가 르네브의 수면을 방해하는 회색 토끼를 침실에서 내쫓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몸을 뒤척이던 르네브가 잠기운이 내려앉은 눈꺼풀을 비비며 그 쪽을 돌아봤다.

“……이카르? 거기 서서 뭐 해요?”

“그대가 침실에까지 다른 수컷을 들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카르는 침울한 얼굴로 르네브를 빤히 응시했다.

“수컷…… 이요?”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르네브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회색 토끼를 발견하고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이카르. 설마. 이 아이에게 질투하는 건 아니죠?”

잠이 덜 깨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색스러웠다. 단정치 못하게 활짝 열린 앞섶으로도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가 홀린 듯 르네브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이카르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회색 토끼의 까만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회색 토끼가 시위하듯 뒷발을 힘차게 쾅쾅 굴렀다. 마치 이카르에게서 르네브를 지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게 한껏 불편해진 이카르의 심기를 더욱 불쾌하도록 돋운다는 것도 모르고.

이카르는 회색 토끼를 힘껏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앞으로 나 외의 수컷은 침실 출입 금지야.”

제법 강경한 이카르의 말투에 르네브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회색 토끼가 겁에 질린 듯 오들오들 떨며 르네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그런다고 거대한 몸뚱이가 숨겨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르네브의 측은지심을 부추기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어쩜, 가엽게도…….”

르네브의 옆구리에 머리만 숨긴 채로 회색 토끼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자, 르네브가 녀석의 커다란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낯선 사람이 무서운 모양이구나.”

그에 그치지 않고, 르네브가 놈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자연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카르의 붉은 눈에 불꽃이 튀었다.

때마침 힐끔 눈을 굴려 이카르의 반응을 살핀 회색 토끼가 르네브에게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마치 이카르더러 보라는 듯이.

‘저, 저…… 가증스러운 놈!’

이카르는 눈을 부릅뜨고 회색 토끼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러자 르네브가 부드럽게 이카르를 타일렀다.

“이카르, 지금 눈빛이 너무 무서워요.”

“…….”

“저도 무서운데 이 아이는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르네브의 말투가 조금 차가웠다.

“…….”

살짝 토라진 듯 그녀의 표정이 새초롬했다.

순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동시에 몸에 열이 올랐다.

새초롬한 르네브의 표정을 볼 때마다 바로 반응을 보이는 제 몸이 오늘처럼 미운 적은 없었다.

이카르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첫 부부 싸움의 계기가 털 짐승 때문이 될 위기의 순간.

“……!”

르네브에게 쓰다듬을 받던 회색 토끼가 이카르를 힐끗 쳐다봤다.

딱히 표정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까맣고 동그란 동공이 어쩐지 그를 비웃는 듯했다.

‘참자, 참자, 참자……?’

이카르는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해서 읊었다. 황제 체면에 하등한 짐승의 도발에 걸려 넘어갈 순 없으니.

“…….”

르네브의 품에 안긴 채로 한참 쓰다듬을 받고 나서야 만족한 회색 토끼는 먼저 잠이 들었고, 그즈음 르네브의 눈엔 다시 잠기운이 만연했다.

결국, 이카르는 이른 퇴근이 무색하게도 잠든 르네브의 얼굴을 노려보다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해야 했다.

***

아침 일찍 집무실로 출근한 이카르는 가장 시급한 안건을 내놓았다.

“내 아내의 침실에 숨어든 수컷을 제거할 묘안을 찾아봐.”

“그 토끼가 황후 폐하의 침실에 숨어든 겁니까?”

베인의 물음에 드한이 거들었다.

“황후 폐하께서 침실에 토끼를 데리고 들어가신 거겠지.”

이카르는 곧장 매서운 눈을 하고 드한을 노려봤다.

그러자 드한이 얼른 말을 바꿨다.

“아직 청소년기라고 하더군요. 어미와 떨어진 뒤로 보살펴 준 이가 황후 폐하이시니, 황후 폐하를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게 아닐는지요?”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그 크기에서 더 자란다고?’

토끼 중 가장 크다고 알려진 자이언트 토끼의 성체가 성인 여성만큼이나 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카르는 과장이 섞여 부풀려진 헛소문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지금 몸집으로 보아 다 자라면 르네브를 한참 웃돌 가능성도 있을 듯했다.

“듣자 하니 최근 황후 폐하께서 그 수컷 토끼와 시간을 많이 보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

“그러니 토끼가 갑자기 사라지거든 황후 폐하께서…….”

이카르의 미간이 모이자, 냉정하게 상황을 되짚어 주던 드한이 곧장 말을 바꿨다.

“……먼저 황후 폐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 뒤에 일을 처리하심이 적절할 듯합니다.”

며칠 함께 있었다고 벌써 정이 든 모양이니, 갑자기 수컷 토끼가 사라지면 르네브가 허전해할 수도 있었다.

이카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베인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이번 기회에 후계를 가져 보심이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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