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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작위 승계 (139/148)


#외전 3화 작위 승계
2023.08.17.


“어머,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두 분께서 도착하셨네요.”

르네브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패트릭과 세이렌 후작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전에 르네브가 선물한 두꺼운 양털 옷을 입고서.

르네브는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귀족에게 양해를 구한 뒤 세이렌 부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이 예를 갖춰 르네브에게 인사했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 가족을 반기는 르네브에게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권했다.

“황후 폐하. 두 분을 별실로 모시는 건 어떨까요? 가족끼리 편히 대화 나누실 수 있게 말이죠.”

르네브가 잠시 망설이는데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새 황후와 인사를 나누길 희망하는 귀족들은 제 선에서 잘 해결하겠다는 뜻인 듯했다.

르네브가 막 대답을 내놓으려는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카르가 그녀 뒤에 서서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그들이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는 내내 이카르는 르네브의 곁을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은 그런 그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곁에서 빠른 상황 파악을 마친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눈치 있게 입을 열었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 가족이니 애틋하시겠군요. 오랜만에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지요. 그럼 저는 이만…….”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가족끼리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뉘앙스를 내비치며 이카르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의 속내를 정말 모르는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이카르는 르네브의 곁에서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묘안이 떠오른 듯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아, 맞아! 황제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게 잠깐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이대로 이카르가 자리를 뜨면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따로 시간을 낼 테니, 그때 이야기하지.”

그러나 이카르는 무감하게 내뱉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연회 홀로 돌아가서 황후 폐하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겠습니다.”

이 속에 있으면 자신만 피곤할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벤더펠트 공작 부인은 빠르게 물러났다.

“…….”

그녀가 떠나고 난 후, 응접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세 남자 모두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가족끼리 회포를 풀고 싶었을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도 한몫했다.

“……일단 자리에 앉을까요?”

르네브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뗐다.

“그러지.”

이카르가 자리에 앉으며 르네브의 손을 끌어당겨 제 옆에 앉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패트릭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두 분의 사이가 매우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세이렌 후작도 패트릭의 옆에 앉으며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행히 어색한 분위기는 잠깐이었다.

이카르가 살갑게 이런저런 질문을 세이렌 부자에게 건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패트릭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저는 일선에서 물러날까 합니다.”

그런 이카르와 대화를 하던 세이렌 후작이 패트릭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간 세이렌 후작의 고충을 모르지 않았기에 르네브는 진심을 담아 세이렌 후작에게 말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세이렌 후작 또한 그녀의 진심을 느꼈는지 옅게 미소 지었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장인께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이카르를 보며 르네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세이렌 후작이 은퇴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바슈케르 제국민들은 새로운 황후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후가 나고 자란 곳이 파라디움이란 것에 불만을 품은 이도 적지 않지요.”

이카르의 말에 패트릭이 무릎에 올려 둔 주먹을 꽉 쥐었다.

‘대체 어떤 놈이 감히!’

르네브에게 불만을 품은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그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발끈한 패트릭의 심리를 읽었는지 세이렌 후작이 서둘러 그를 다독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패트릭도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바슈케르 제국 내에 영향력이 없는 저희 가문 때문에 황후 폐하께서 곤란하신 건 아닌지…….”

염려 가득한 눈으로 세이렌 후작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패트릭도 옅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물론 르네브가 바슈케르 내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의 아가씨였다면 조금 더 편안한 황궁 생활이 보장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르네브는 아직까지는 자신이 황후로서 꽤 잘해 오고 있다 자부할 수 있었다. 이건 자만이 아니었다.

전생의 경험을 잘 살린 덕에 그녀는 꽤나 노련한 황후라는 평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르네브가 그 사실을 전하려 했을 때였다.

“……?”

이카르가 가만히 르네브의 손을 쥐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카르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한 제안입니다. 작위 승계식 이후 장인께 바슈케르로 망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전에도 했던 제안인 데다, 그들도 진심으로 망명을 고려하고 있던 모양인지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이카르의 말에 르네브는 놀라고 말았다.

“바슈케르의 공작으로서 말이죠.”

“……예?”

줄곧 침착한 태도로 있던 세이렌 후작은 물론이고 패트릭 또한 눈을 크게 떴다.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단지 황후 폐하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작과 같이 높은 지위를 얻게 된다면 바슈케르 귀족들의 반발이 적지 않을 겁니다.”

부디 다시 생각해 달라는 세이렌 후작의 말에 이카르가 대답했다.

“바슈케르인은 힘이 강한 자에게 이끌리는 특성이 있습니다.”

세이렌 부자가 고개를 주억거렸고, 이카르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신분과 부가 그를 대신하고 있긴 하지만, 국가의 일원 전체가 가진 기질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이 부분에선 르네브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단 바슈케르만이 아닌 파라디움이나 라이나, 베니스탄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개개인의 타고난 기질이 크게 변하지 않듯 국가마다 특유의 분위기나 문화는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장인께서는 오랜 기간 파라디움의 서부를 지켜 왔습니다. 바슈케르로부터요.”

이카르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공을 모르는 건 아마도 파라디움의 황제뿐이겠죠.”

르네브는 이카르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파라디움에서는 바슈케르가 야만적인 문화를 가졌다며 헐뜯고는 했다.

하지만 평화 협정 동안, 그리고 그녀가 황후가 된 뒤로 만나 본 바슈케르인들은 파라디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의 가족과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일 뿐이었다. 바슈케르인들이 전쟁을 좋아한다던 파라디움 학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셈이었다.

게다가 파라디움 제국과의 전쟁은 바슈케르에도 큰 손해였다.

국력의 차이가 역전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풍요로운 나라일수록 소유한 것도 지킬 것도 많은 법이었다.

그리고 세이렌 후작은 그에 만만치 않게 지킬 것이 많을 파라다움을 철통같이 지켜 온 그간의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바슈케르의 일부 지식인들은 그 부분을 안타까워했다.

비록 적국의 사람이지만 적으로 두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며, 그가 모실 주군을 잘못 만났다고.

그런 상황에서 이카르가 세이렌 후작의 공을 인정하고 치하한다면 어떻게 될까?

제 자리를 노릴까 두려워하며 세이렌 후작을 견제하기 바빴던 파라디움 황제와 이전까지는 적이었지만 그 능력을 높이 사 제 사람으로 두려는 이카르의 배포가 비교되어 회자될 것이었다.

그런 상황은 바슈케르에게 득이 될 게 분명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보상 없는 노동을 원할 리는 없으니까.

이로 인해 유능한 인재들이 바슈케르로 모여들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이카르가 제안한 공작 작위는 단순히 황후의 세력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르네브가 바슈케르의 황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이카르가 르네브의 손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넘치는 기품, 빼어난 언변과 박식한…….”

이어지는 이카르의 찬사에 르네브는 살짝 시선을 떨군 채로 생각했다.

아무리 자신을 예뻐하는 가족의 앞이라 해도 이건 좀…….

르네브는 그만하라며 이카르의 손을 꽉 쥔 채로 세이렌 부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세이렌 부자 역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연신 이카르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든 이유 외에도 세이렌 후작 가의 사람이라는 것 또한 적지 않게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세이렌 부자를 한껏 추켜세움으로써 이카르가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리고 세이렌 부자의 표정은 완전히 이카르에게 설득당한 것 같았다.

***

르네브는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이 바슈케르를 떠나기 전에 새 양털 옷을 지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김에 질 좋고 바슈케르보다 가격이 저렴한 파라디움의 양털을 바슈케르에 유통하기로 정했다.

“황후 폐하. 말씀하신 양털이 도착했답니다. 그런데 수량이 상당하던데…… 황궁 고용인 모두에게 양털 옷을 하사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물었다.

“아직은 연합국을 중심으로 유행에 관심이 많은 수소의 귀족들만 양털 옷을 입고 있지만, 날이 더 추워지거든 바슈케르에서도 양털 옷이 인기를 끌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전에는 따로 동떨어져 교류가 없던 국가들이 연합국이라는 이름 아래 활발한 문화 교류를 시작했다.

그러니 곧 바슈케르에도 양털 옷의 유행이 도래할 거란 판단에서 물량을 넉넉히 확보해 둔 것이었다.

“아……!”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곧장 물었다.

“그럼 계속 파라디움에서 들여온 양털을 바슈케르에 공급할 수 있도록 하면 될까요?”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는 앞으로 바슈케르에 들여올 양털 공급처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양털이 역모로 처형당한 파라디움 황비의 시녀장이었던 밀레 자작 부인의 영지에서 나온 것이었군요.”

황비와 그 측근 세력들이 처형당한 이후 밀레 자작 부인은 감옥에서 형을 살고 있다. 그녀의 남편 또한 작위를 박탈당한 채 감옥에 있었고.

다행히 그녀의 아들에게까지 연대 책임이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었다.

르네브는 그 아이가 마음에 쓰였다.

황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와 다른 가족이 모두 죽은 후의 카엘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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