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화 앰버와 키어넨의 보물 (138/148)


#외전 2화 앰버와 키어넨의 보물
2023.08.16.


‘어쩌지?’

이대로 그녀의 책이라고 이카르가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 책 내용을 그녀의 취향이라 이카르가 오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럼 그는 곧장 책 속의 내용대로 행하려 들지도 모르고…….

‘그래. 이건 이 책을 내 침실에 몰래 숨겨 놓도록 만든 이의 책임이니까.’

르네브는 이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을 열었다.

“이카르. 그건 앰버와 키어넨의 보물이에요. 그러니 처분하지 않았으면 해요.”

“이게…… 보물이라고?”

이카르의 잘생긴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

앰버는 사교성이 좋은 성격이었다.

사람에게 관심도 많았고, 그 덕에 바슈케르에 와서도 르네브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다 주는 전령 새 역을 톡톡히 했다.

르네브를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고, 사람들의 다양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덩달아 이성에 대한 호기심 또한 나날이 높아져만 가던 어느 날이었다.

일찍이 대장간의 스미스와 연애를 시작한 웬디에게 어른의 연애에 대해 듣게 된 뒤로 그녀는 새로운 분야에 눈을 떴다.

하지만 자신의 평소 행실이 모시는 아가씨의 평판에도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섣불리 행동에 나서긴 어려웠다.

그렇게 호기심만 늘어가던 와중 앰버의 눈에 띈 것이 바로 붉은 책이었다.

표지가 붉은 그 책은 아가씨의 평판에 영향을 주지 않고서도 손쉽게 앰버의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앰버? 무슨 책이에요?”

침대에 발랑 엎드린 채로 붉은 책을 읽는 앰버에게 키어넨이 물었다.

“……아, 이거요?”

조금 망설이던 앰버는 키어넨의 눈앞에 삽화가 그려진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어머나!”

탈의한 남녀가 얽힌 삽화를 보고 키어넨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키어넨에게는 자극이 너무 강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반응을 살피는데 키어넨의 눈이 삽화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앰버와 키어넨, 두 사람 모두 성인이었고, 일찍 결혼했다면 조그만 아이 정도는 있을 나이였다.

그러니 키어넨도 알 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 처음 봐요?”

앰버의 물음에 키어넨이 귀까지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에요. 남동생이 침대맡에 숨겨 둔 걸 청소하다 우연히 본 적이 있거든요.”

앰버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겉으론 순진한 척하지만, 의외로 이 방면에선 대화가 잘 통할지도 모르겠다고.

“난 조금만 더 보면 되는데, 다 읽으면 키어넨도 볼래요?”

“……네?”

당황한 듯 키어넨이 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러나 바로 거절하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알겠어. 고민은 책을 보는 시간만 늦출 뿐이니, 얼른 보고 빌려줄게요.”

앰버는 이내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니 집중하기 조금 어려웠지만, 그래도 워낙에 인기 있는 작품이라 그런지 금방 책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게 앰버와 키어넨이 붉은 책을 공유하게 된 시작점이었다.

그 이후에는 두 사람 모두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바슈케르에서의 유학 기간이 지나 르네브와 앰버가 파라디움에 잠깐 가게 되었을 때까지도 말이다.

***

“아가씨.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결혼식 날 밤.

신방에 들 준비를 마친 르네브가 잠시 쉬려던 때였다.

“……선물?”

“네. 정말로 어렵게 구한 거예요. 이제는 절판되어서 구하기 쉽지 않은 귀한 물건이고요.”

르네브는 그만큼이나 소중한 물건을 제게 선물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곧 신방에 들 르네브에게 책 선물을 건네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겉표지만 봐선 바슈케르의 복식과 문화에 관한 책 같았다.

“고마워.”

르네브는 싱긋 웃으며 앰버가 내민 책을 받아들었다.

“꼭 읽고 난 뒤의 감상을 들려 주셔야 해요?”

“그럴게.”

앰버의 말에 르네브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해맑은 앰버와 달리 키어넨의 표정이 어딘지 미묘했다.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 볼게요.”

꾸벅 허리를 숙인 앰버와 키어넨이 침실을 나가고, 르네브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책장을 넘겼다.

“……소설인가?”

그러다 책의 중간중간 들어간 삽화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뭐, 뭐지…….”

르네브는 아무도 없는 침실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빠르게 책 내용을 살펴봤다.

탈의한 채로 얽힌 남녀의 삽화 몇 장을 더 보고 나서야 르네브는 앰버와 키어넨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신혼 첫날밤을 보낼 그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듯했다.

“…….”

마른 입술을 핥으며 홧홧해진 얼굴에 손부채질하고 있을 때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카르겠지?’

르네브는 손에 쥔 책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망설였다.

“이, 일단 이 책은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책을 숨길 만한 적절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금방이라도 이카르가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겉표지가 다른 것으로 덧씌워져 있으니까, 책 내용까지는 바로 알아채지 못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잠깐이었다.

이카르는 르네브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가 무얼 얼마나 먹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최근 관심을 보이는 것 전반에 대해.

이 책을 발견하면 이카르도 읽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표지가 덧대어져 있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빨리 숨겨야 하는데!’

르네브가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을 때 발칵 문이 열렸다.

“르네브.”

이내 그녀를 부르는 이카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르네브는 하는 수 없이 침대와 협탁 사이의 작은 틈으로 붉은 책을 밀어 넣었다.

다행히 이카르가 침실로 들어오기 직전에 르네브는 어른의 책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신혼 첫날밤 이후로 밤낮 가리지 않고, 그녀의 몸을 탐하는 이카르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며 책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이후 앰버의 언급으로 책을 찾아보았으나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이렇게 이카르가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

당장이라도 붉은 책을 벽난로 속에 던져 버릴 것 같던 이카르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이게…… 보물이라고?”

“네…… 네.”

정확하게는 르네브 본인이 아닌, 앰버와 키어넨의 보물이었지만.

“르네브.”

“네.”

“그대도 이 책을 봤나?”

르네브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뇨! 결혼식 당일 선물로 받고 직후에 내용을 잠깐 훑어본 게 전부예요.”

그 뒤로 책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를 빤히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애초에 르네브가 그 책을 보지 않았다는 말을 믿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대의 취향은 이런 쪽이었군…….”

이카르가 르네브의 앞에서 찬찬히 책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르네브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이카르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이제는 책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감성적인 시구절이라도 읊는 것처럼.

“그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가녀린 몸을 훑어 내렸다. 그녀는 그의 시선만으로…….”

르네브는 다급하게 빽 소리쳤다.

“저, 정말 아니라니까요!”

“뭐가 아니라는 거지?”

“선물은 받았지만, 책은 보지 않았어요. 전 결백해요!”

“글쎄…….”

이카르는 느리게 아랫입술을 핥으며 책에 적힌 내용을 따라 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의 여자 주인공은 이렇게 해 주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한 손엔 어른의 책을 든 이카르가 다른 손으로 르네브의 허리 부근을 손톱으로 살짝 긁어내렸다.

“……!”

그날 밤 르네브는 우연히 발견된 어른의 책으로 인해 밤새 곤혹스러웠다.

이카르는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집요하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으며 짓궂게 굴었다.

***

황후가 된 후 르네브가 처음으로 주최하는 무도회 날이 되었다. 황궁 안은 북적이는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바슈케르 전역에서 모여든 귀족들이 앞다퉈 새로운 황후와 인사를 나누기를 원했다.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습니다.”

르네브는 이전 생의 경험을 살려 초대한 귀족들을 잘 대접할 수 있었다.

‘휴, 인사할 사람이 정말 많구나.’

황궁 연회는 이제 막 시작이었지만, 끝없이 이어진 인사 행렬에 슬슬 지쳐 갈 즈음이었다.

‘이 사람은 분명 남부 지역의 귀족이라 했지?’

칭송의 말들을 늘어놓는 콧수염이 구불구불한 중년의 귀족을 바라보며 르네브는 속으로만 고개를 갸웃했다.

“소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시고 우아하신 모습에 깜짝 놀랐지 뭡니까…….”

르네브는 그에게 적절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중년의 귀족이 매우 만족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르네브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귀족과 인사를 나누기 전 벤더펠트 공작 부인에게 말했다.

“홀 안이 조금 추운가 보네요. 벽난로의 불을 더 세게 지피는 게 어떨까요?”

“추우신가요, 황후 폐하?”

르네브의 제안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는 서둘러 근처에 선 시종에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걸치실 외투를 가져오세요.”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손님들 중에는 두꺼운 외투를 걸친 분들이 제법 많은 것 같아서요. 홀 안의 온도를 조금 더 높이는 게 어떨까 해서 의견을 물었어요.”

“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저도 오늘 알게 된 사실인데요. 최근 연합국을 중심으로 양털로 지은 옷이 유행하는 모양이에요. 그러니 추워서라기보단 멋을 부리려고 양털 옷을 입으신 게 아닐까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말에 르네브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은 겨울이 오려면 아직 먼 초가을이었다.

“그건 계절을 앞서도 너무 앞선 것이 아닌가요?”

적어도 르네브의 상식에서는 그랬다.

“아, 그게 말이죠.”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르네브 쪽으로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결혼식 이후로 세이렌 후작과 소후작이 양털 옷을 입고 여러 사교 모임에 참석한 모양이더라고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말에 르네브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말대로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이 양털 옷을 입고 다녔다는 계절을 추측해 보자면 여름일 가능성이 컸다.

‘그 날씨에 양털 옷을 입고 돌아다녔다고?’

르네브는 살짝 이마를 짚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두 분이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며 비웃음을 당하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곧장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 되어 영감을 얻었다며 기뻐한 재봉사들도 여럿 되었다나 봐요. 그런 영향 때문인지 최근 의상실마다 양털을 구하느라 혈안이 되었다네요.”

“그, 런가요?”

“네.”

키도 크고 외모도 준수한 세이렌 부자였으나, 두 사람 모두 외모를 가꾸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이 여성에게 인기가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르는 것 같았고.

그런 패트릭과 세이렌 후작이 유행을 선도했다는 게 조금 신기하고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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