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사랑해, 르네브 (135/148)


#135화 사랑해, 르네브
2023.08.13.


깃털로 꽉 채워진 푹신한 베개의 촉감이 살짝 차가웠다.

“……?”

자는 동안 눈물이라도 흘린 건지 베개가 살짝 젖어 있었다.

‘……꿈이었구나.’

르네브는 그제야 자신이 현실처럼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꿈속에서 어머니와 삼촌을 잃고, 자신도 곧 죽을 거라며 절망하던 카엘의 절절한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가능한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자란 카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눈을 감은 채로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의 내용을 반추했다.

바슈케르 제국군을 이끌고 파라디움을 급습한 이카르는 카엘과 함께 황궁을 점령한다.

그리고 카엘에게 묻는다.

어머니와 삼촌을 위해 황제에게 복수하고 싶으냐고.

그의 물음에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루시우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말이 되나? 적국과의 내통이, 황후와 외척 세력을 없애기 위해 내가 억지로 꾸며 낸 이야기가 현실이 되다니.’

도무지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실소하는 루시우스의 목이 떨어진 건 그다음이었다.

‘화, 황제, 폐하…….’

그레이트 홀 안은 경악과 비명으로 가득 찼지만, 이카르는 멈추지 않았다.

황제 세력의 중심이었던 귀족들과 그들이 새롭게 맞이하려던 황후 에시카, 그리고 그녀가 낳은 아이들을 전부 몰살할 때까지.

카엘이 파라디움 황실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을 때 이카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카엘, 네가 황제라고.

다행이었다.

이렇게라도 카엘을 다시 볼 수 있어서. 그리고 카엘이 무사히 살아남은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그 아이의 안타까웠던 모든 순간에 꼭 품에 안고 괜찮다며 등을 토닥여 줄 수는 없었지만.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카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꿈의 잔재라도 붙들고 싶은 르네브의 마음과 달리 곧 기억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금세 달아나 버린 꿈을 아쉬워하며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르네브는 이내 의문을 품었다.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 했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카엘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르네브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꿈은 르네브가 죽고 난 직후의 일 외에도 많은 것들을 보여 줬다.

꿈속에선 현실과 달리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듯했다. 덕분에 르네브는 황제가 된 카엘이 파라디움을 통치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황후를 맞아 아이를 가진 카엘은 일찍 죽은 르네브를 그리워했고,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르네브는 내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다행이야…….’

르네브가 꿈을 떠올리며 안도하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침대에 모로 누워 있던 르네브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툭툭 털어 내며 이카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잘 잤나?”

살짝 미소를 지으며 르네브에게 다가오던 이카르의 걸음이 돌연 빨라졌다.

금세 르네브의 코앞까지 다가온 이카르가 그녀의 눈가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비죽 세웠다.

“울었나?”

“아…….”

르네브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이카르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졌다.

르네브는 대답 대신 이카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리던 이카르가 곧장 그녀를 안아 올렸다.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괸 채로 이카르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뭐가요?”

“눈 뜨자마자 너무 예쁜 짓을 하니까.”

르네브는 이카르의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말했다.

“그냥…… 너무 좋아서요.”

순간 이카르의 몸이 바짝 굳었다.

“……내가?”

“네.”

“하…….”

이카르가 내뱉은 다소 거친 숨결이 르네브의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르네브는 어깨를 바르르 떨며 이카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카르. 사랑해요.”

이번에는 눈에 띄게 이카르의 몸이 굳었다. 맞닿은 몸을 통해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르네브는 잠결에 들었던 속삭임을 떠올렸다.

‘사랑해, 르네브.’

처음에는 저 말도 꿈이 아닐까 했다.

이카르가 내뱉은 말이라 치기엔 너무나 달콤한 속삭임이었기에, 꿈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현실이었다.

***

‘안 돼요!’

웬디는 단호했다.

스미스와의 결혼을 서두르는 게 어떻겠냐는 르네브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웬디는 고용인 신분이고, 르네브는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저택의 주인이었다.

지금은 저택 주인의 약혼녀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웬디에게 신분 고하를 논하며 강압적으로 제 의견을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웬디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늦든 빠르든 스미스의 마음은 변치 않고, 웬디에게만 향할 테니까.

르네브는 스미스를 잘 다독여 준 뒤 바슈케르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아가씨. 일단 여기 있는 것들 먼저 짐마차에 실으면 될까요?”

침실 한쪽 벽면에 자리한 여러 개의 커다란 가방을 가리키며 앰버가 물었다.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저택의 고용인들이 차례차례 침실 안의 짐 가방들을 들고 침실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안을 한번 쓱 둘러본 르네브는 침실을 나와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저택 입구에는 이카르와 집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앞으로 집사에게 저택 관리를 일임한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르네브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폐하,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이카르가 르네브의 뺨에 쪽 입을 맞추곤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

바슈케르로 출발하는 마차에 오른 두 사람은 앞으로의 계획들을 두고 대화를 나눴다.

“그나저나, 파라디움의 3황자와 그의 연인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군.”

“그대로 내버려 둘까 해요.”

“…….”

“어쩔 땐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괴롭기도 하니까요.”

르네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시우스는 평생을 파라디움 황궁에서 귀하게 자랐다.

황제는 다른 자식들에 비해 루시우스를 편애했고, 황비의 자식은 그 하나뿐이었다.

평생을 안온한 황궁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루시우스였으나, 이제는 그를 지켜 줄 이들이 사라졌다.

아직 황자 자격까지 박탈당한 것은 아니나, 실상 그는 이제 폐황자나 마찬가지였다.

맨몸으로 황궁에서 쫓겨난 루시우스가 길거리에서 어떤 고초를 겪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게 르네브에겐 최고의 복수인 셈이었다.

타인의 권력과 재력에 기생해 오던 에시카 또한 고생길이 열린 건 매한가지였고.

“……좋아, 영애의 결정을 존중하지.”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 요절을 내 줘도 속이 시원치 않은데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겠다고?

이카르가 이렇게 반대하고 나설 거란 르네브의 예상과는 다른 의외의 반응이었다.

“제 의견을 존중해 줘서 고마워요. 폐하.”

르네브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뺨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가 떼어 냈다. 그러자 이카르가 다른 쪽 뺨도 내밀었다.

“……?”

“균형이 맞아야지.”

르네브는 능청스러운 그의 모습에 살짝 웃으며 그의 다른 쪽 뺨에도 입을 맞췄다.

***

바슈케르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카르는 서둘러 집무실부터 찾았다.

급한 일들을 빠르게 처리한 이카르는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지며 고민을 이어나갔다.

‘역시, 계획한 대로 밀어붙이는 편이 낫겠지?’

르네브는 파라디움의 3황자와 그의 연인을 내버려 두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이카르는 이미 그들을 파멸로 내몰 계획을 구상한 뒤였다.

르네브의 앞에서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는 척 굴었지만, 이대로 그 둘을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르네브가 지금처럼 해 주는 편이 오히려 이카르가 움직이기 쉬웠다.

이제 그녀는 3황자와 그의 연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으니, 그들이 어떻게 되든 모를 것이었다.

‘좋아.’

이카르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한이 침을 꿀꺽 삼키며 베인을 쳐다봤다.

‘폐하께서 뭔가를 꾸미고 계신 것 같은데?’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며 대화를 나누는 찰나 돌연 이카르가 고개를 돌렸다.

드한과 베인은 서둘러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하던 일을 이어 나갔다.

“드한.”

“예, 폐하.”

“파라디움 3황자에 관해 새로 들어온 소식은?”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파라디움에 가 계신 동안 귀족 회의에서 3황자를 폐위시키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합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3황자는 곧 폐위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그자가 황궁에서 내쫓기거든 사람을 붙여서 감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드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베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데 폐하, 그것만으로 되겠습니까?”

베인과 드한은 르네브의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예비 황후가 3황자와 솔티의 가짜 왕녀에게 엄청난 원한을 품고 있다는 걸 대충 눈치로 알고 있을 뿐.

그런 그 둘을 일벌백계하지 않는 게 의아했다.

베인이 지켜본 그녀는 이카르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제게 피해를 준 이를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단죄하려는 태도 같은 것 말이다.

베인은 예비 황후의 그런 성정을 높게 사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냥 지켜만 본다는 건 그녀답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잘 감시하다가 적절한 때에 남색가들이 드나드는 매음굴로 인도하도록.”

“아하!”

이카르의 말에 베인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크로프트 남작 영애는 폐황자와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드한이 물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이카르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가짜 왕녀에게는 그 구역에 맞는 선물을 하도록.”

이카르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추후에 상황 보고드리겠습니다.”

파라디움 황궁을 조금만 벗어나면 치안이 좋지 않은 구역들이 나왔다.

구역마다 빨강 두건을 쓰거나, 녹색 숄을 어깨에 걸쳐 일반인과 매춘부를 구별하고는 했다.

그러니 그 구역에 맞는 선물이란, 가짜 왕녀에게 매춘부라는 표식을 주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젊은 여자가 호위도 없이 혼자 길거리를 어슬렁거리거든 표식이 없어도 좋지 않은 일을 격을 확률이 높았지만.

운이 좋으면 굶어 죽을 것이고, 운이 조금 나쁘다면 화풀이의 대상이 되어 맞아 죽을 것이다.

“폐하, 이것도 예비 황후 폐하에게서 나온 의견입니까?”

드한의 물음에 베인이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역시…… 대바슈케르 제국의 황후가 되실 분 다운 결정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악랄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카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 일에 관해 황후에게는 입도 뻥끗하지 마.”

이카르의 엄포에 드한과 베인이 움찔하더니 입을 막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직 결혼식 전이었지만, 그가 이미 르네브를 황후로 칭했다는 사실에 집무실 안의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1691925023850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