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처형식이 끝난 뒤에
(134/148)
134화 처형식이 끝난 뒤에
(134/148)
#134화 처형식이 끝난 뒤에
2023.08.12.
“……히끅!”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이어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카엘은 곤란한 표정으로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하면 딸꾹질이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마주하는 것만으로 다리가 덜덜 떨려 올 만큼 바슈케르의 황제가 무서운 건 여전했다.
카엘은 숨을 꾹 참았다.
그럼에도 딸꾹질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드한이 그런 카엘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반면 눈을 빠르게 끔뻑이던 베인이 드한에게 작게 속삭였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냐?”
“문제는 무슨. 그냥 너무 무섭고, 놀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좀 심한 것 같은데……. 궁의를 불러서 진료를 받아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얼토당토않은 베인의 제안에 드한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런가?”
드한과 베인이 카엘의 딸꾹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바슈케르의 황제는 가만히 카엘을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무서웠지만, 카엘도 그런 황제의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와…… 자세히 보니까 더 신기하네.’
파라디움에선 흔치 않은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의 조합은 신비로우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카엘은 냉큼 시선을 내리깔았다.
‘근데 왜 말도 없이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는 거지……?’
그러는 동안 어느새 딸꾹질이 멎었다.
하지만 카엘은 다른 생각에 빠져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황자로서 교육을 받을 때 주변국의 역사와 흐름을 가르쳐 주던 룸브르 백작이 바슈케르의 황제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듣고 난 뒤부터, 카엘의 머릿속에 그는 미치광이로 인식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우연히라도 그와 마주치거든 혀를 깨물고 죽겠다고 했을 정도로…….
그런데 눈앞의 황제는 무섭긴 했지만 카엘의 상상보다 훨씬 점잖고, 정상인처럼 보였다.
‘아니야, 잘생긴 얼굴에 속지 말자! 겉모습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지.’
카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황후를 쏙 빼닮았군. 네가 황후 소생의 그 황자인가?”
황제가 물었다.
언제나 솔 음계에 맞춰 말을 걸어오던 시종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저음이었다.
왠지 다시 어깨가 움츠러들 것 같았다.
하지만 카엘은 언제 어떤 때든 당당히 어깨를 펴고 앞을 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카엘은 최대한 크게 대답했다.
“녜!”
너무 겁을 먹은 탓일까?
카엘은 혀를 깨물고 말았다. 그 짧은 대답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제길, 이 멍청이! 하필이면……,’
금세 카엘의 통통한 양 뺨이 붉게 물들었다.
어눌하고 뭉그러진 제 발음을 듣고 황제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머저리라며 자신을 비웃으면 어쩌나 싶었다.
카엘은 울상이 되어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응?’
세상사에 무심할 것만 같던 무표정이 사라지고 미소가 대신 그의 얼굴에 자리 잡았다.
유려하게 휘어지는 눈매를 바라보며 카엘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비웃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종잡을 수 없는 황제의 태도에 도리어 카엘의 미간이 모였다.
***
같은 시각, 파라디움 황궁 황제의 집무실.
삐걱삐걱.
두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집무실 책상이 듣기 싫은 소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루시우스와 에시카,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서로에게 매달렸다.
그때.
똑똑똑똑.
다급하고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루시우스는 미간을 좁혔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시종장은 그냥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폐하! 송구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대한 일입니다!”
옅게 한숨을 내쉰 루시우스는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에시카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군.”
에시카는 잔뜩 찌푸려진 루시우스의 미간에 쪽 입을 맞추곤 말했다.
“전 괜찮으니, 시종장과 말씀 나누세요. 이제는 저하고만 밤을 보내실 수 있잖아요.”
그녀의 교태 어린 몸짓과 눈빛에 루시우스의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 한창 좋은 때 방해한 시종장을 엄히 벌할 생각이었다.
“언제는 그대가 황후의 눈치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황후가 살아 있을 때도 딱히 그녀의 눈치를 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에시카는 루시우스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었다.
“그럼요! 정해진 합방일마다 싫은 걸 억지로 참고 황후의 침실을 찾으시는 폐하를 볼 때마다 제 심정이 어땠는지……. 말씀드려도 폐하께서는 모르실 거예요.”
에시카가 살짝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루시우스는 에시카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에시카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있을게요. 제국의 중대사라면 이제는 저도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안 될까요?”
붉게 상기된 뺨을 한 에시카가 예쁘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곧 에시카의 귀에도 들어갈 소식일 테니,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루시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지.”
루시우스는 시종장 쪽의 일을 빨리 해결하고 하던 일을 마저 하는 편이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폐하! 제발, 부탁드립니다!”
시종장이 다급하게 집무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루시우스는 짜증스럽게 쯧, 혀를 차곤 외쳤다.
“들어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황급히 안으로 뛰어들어 온 시종장이 말했다.
“폐하, 큰일입니다. 바슈케르 군이 광장을 점거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
루시우스는 물론이고, 에시카의 입도 떡 벌어졌다.
“자세히 말해 봐, 그게 무슨 소리야?”
“황후와 세이렌 후작의 처형식이 끝나자마자 바슈케르 군이…….”
루시우스는 시종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야 전하는 건가?”
“그, 그건 폐하께서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내시느라…….”
시종장이 답지 않게 루시우스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러면서 여전히 한 몸처럼 얽힌 루시우스와 에시카를 흘끗 바라봤다.
루시우스는 책상 위에 널브러진 재킷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장이 냉큼 가운을 찾아와 루시우스에게 입혀 주었다.
루시우스는 대충 얇은 가운만을 걸친 채로 뇌까렸다.
“상황 보고해.”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 완전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서부를 통해 수도로 들어온 것 같다는 게 기사단장의 의견입니다.”
“……서부?”
언제인가부터 서부 국경 지역에서의 분쟁이 줄었다. 바슈케르가 전과는 달리 잠잠해졌다는 뜻이다.
폭풍 전야가 아니냐며 우려하는 귀족도 있었으나, 대체로 파라디움과의 관계 개선을 위함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루시우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세이렌 후작의 처형식 날 급습을 하다니.
마치,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지 않은가.
“그 여우 같은 자식!”
“……폐하,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폐하, 이제 어떻게 하죠?”
시종장뿐 아니라, 에시카까지 루시우스를 다그쳤다.
“그 입들 좀 다물어 봐.”
루시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깊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후우…….”
금방 냉정을 되찾은 루시우스는 시종장에게 물었다.
“기사단장은?”
“상황을 알아보러 갔습니다. 좀 되었으니, 곧 이쪽으로…….”
그때 집무실 너머로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 기사단장이 상황을 알아보고 왔나 봅니다.”
시종장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건 기사단장이 아닌,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
***
파라디움 황궁에 도착하자 드한이 카엘을 말에서 내려 주었다.
‘집에 가자더니, 정말이었어.’
그렇게 안심한 것도 잠깐이었다.
황궁 안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 기사들과 황궁 고용인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카엘은 내딛던 걸음을 우뚝 멈춘 채로 참혹한 현장을 바라봤다.
“놀라셨나 봅니다…….”
카엘을 힐끗 내려다본 드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카엘은 불과 얼마 전까지 살아 숨 쉬었지만 지금은 아닌 사람들을 바라보며 겨우 입을 뗐다.
“……아니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쓰게 웃으며 드한이 걸음을 옮겼고, 카엘은 그를 따라 걸었다.
그레이트 홀로 향하는 길목에도 여전히 시체가 가득했다. 카엘은 최대한 그들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정면만을 응시하며 걸었다.
“……!”
그레이트 홀에 도착한 카엘은 헉, 숨을 들이켰다.
그 안에 파라디움의 황제와 그의 정부, 그리고 정부의 자식들과 실세 귀족들이 모두 꿇어앉아 있었다.
그리고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그들을 둘러싼 채로 검을 겨누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였고, 그의 정부 또한 속살이 비치는 슬립을 입고 있었다.
“아…… 이런.”
드한이 작게 탄식하며 얼른 카엘의 눈을 가리려 했지만, 카엘은 홱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도…… 다 알고 있다.”
“알고, 계셨습니까?”
드한이 곤란한 표정으로 얼른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제야 눈치 빠른 기사가 에시카에게 몸을 가릴 만한 옷을 건넸다.
카엘은 어른들의 일까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시종들이 뒤에서 황제와 정부를 두고 은근히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마음 하나 붙들어 두지 못한다며 황후를 비웃었다.
그래서 카엘은 제 어머니를 모욕한 시종의 머리 위에 뜨거운 찻물을 부어 버렸다.
그 때문에 성정이 난폭하다며 황제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며칠간 외출을 금지당했고, 금식을 강요당해야 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묻는 어머니에겐 아무런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시종들이 어머니를 모욕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카엘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침울하게 시선을 떨어뜨렸을 때였다.
에시카가 중얼거렸다.
“어찌 2황자가 저들과 함께…….”
“……카엘?”
황제 또한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엘을 쳐다봤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잡은 드한과 카엘의 손으로 향했다.
“카엘!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황제가 소리쳤다.
그러나 카엘은 그들에게 대답해 줄 이유가 없었다. 카엘조차 적국의 사람들이 제게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니.
그때 그레이트 홀 안에 있던 바슈케르의 기사들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카엘은 곧장 뒤를 돌아봤다.
바슈케르의 황제가 한 무리의 기사들을 이끌고 그레이트 홀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편에는 곰같이 커다란 기사가 황실 기사단장의 시체를 어깨에 짊어진 채였다.
적진 한복판에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로운 표정과 느긋한 그의 걸음걸이를 보며 카엘은 생각했다.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고 어떻게 가지고 놀지 고민하는 포식자 같다고.
그를 둘러싼 시간만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고.
카엘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가 그레이트 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카엘 앞으로 다가온 바슈케르의 황제가 물었다.
“카엘, 네 생각을 말해 봐. 너희 어머니를 죽인 저들을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