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두 번이나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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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두 번이나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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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두 번이나 늦었다
2023.08.11.
“……!”
거짓말처럼 광장의 사면에서 튀어나온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광장의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쓰러졌으나, 카엘의 눈에는 마치 서로 다른 색의 물감이 섞여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슈케르 군이, 이 일대를 점령하고 이쪽으로…….”
상황 보고를 끝마치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기사의 목을 관통했다.
“……!”
카엘은 코앞에서 죽어 가는 기사의 모습에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무, 무서워.’
팔과 다리가 벌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서는 광장 안의 검은 물감의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도망쳐,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서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다리가 떨어지질 않았다.
조금 전까지 카엘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 또한 적군과 싸우기 위해 멀리 떨어진 채였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래도 곧 어머니와 삼촌 곁으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광장 중앙으로 돌격하던 파라디움의 기사가 외쳤다.
“저기다! 저기 바슈케르의 황제가 있다!”
기사의 외침이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흑마 위에 앉은 남자가 고요한 눈으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 사람이 적장. 바슈케르의 황제…….’
멀리서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인데도 절로 다리가 떨려 올 만큼이나 위압감을 풍기는 사내였다.
그런 바슈케르의 황제가 어린 카엘의 눈에는 어떻게 해도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성벽처럼 느껴졌다.
카엘은 두 번 절망했다.
어머니와 삼촌 세이렌 후작의 목이 떨어졌을 때, 그리고 비처럼 쏟아지는 적군의 화살과 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파라디움 군의 무력함에…….
수적으로나 병사 개개인의 기세로 보나 바슈케르 군이 승기를 잡을 것이란 건 분명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적군과 맞서 싸우던 파라디움의 병사 중에 전선을 이탈하는 자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평화에 길든 파라디움 제국군은 무력했다. 연승을 거머쥐고 한껏 사기가 오른 바슈케르 제국군 앞에서.
“다…… 죽을 거야…….”
처참한 눈앞의 현장을 보거든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엘은 죽고 싶지 않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와 삼촌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절망에 빠져 굳어 있던 카엘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릎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 냈다.
이를 꽉 깨물고 소매에 눈물을 쓱쓱 닦았다. 이미 눈가는 발갛게 물든 뒤였지만.
그리고 카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때 누군가가 카엘을 불러 세웠다.
“얘! 꼬마야!”
카엘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엘보다 조금 더 어린 여자아이를 등에 업은 남자였다.
“엄마를 잃어버렸나 보구나. 엄마를 찾을 때까지 나와 함께 있자꾸나.”
그가 카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두가 제 살길을 찾아 바삐 도망치는 와중에도 이타심이 남은 사람이 있는 걸까?
카엘이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뻗었을 때였다.
“저 아이인 것 같습니다!”
카엘은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서 있었고, 그들이 지목하고 있는 건 카엘이었다.
“……저 아이가 맞는 것 같군. 황가의 문양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카엘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날 잡으러 온 모양이다. 도와주……!”
카엘은 조금 전 제게 손을 내밀어 준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나 언제 도망쳤는지 그는 이미 카엘의 곁을 떠난 뒤였다.
“…….”
카엘은 날아드는 화살과 검을 피해 정신없이 달아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 또한 매복해 있던 바슈케르 군에 의해 제압당했다.
갑자기 언젠가 역사 수업 때 들었던 가르침이 떠올랐다.
‘나라가 망하면 황제와 그의 핏줄이 가장 먼저 제거당한다고 했었지.’
카엘이 황족이라는 걸 저자들이 눈치챈 이상 잘 도망친다 한들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카엘은 어머니를 데려간 기사들을 막아내지도, 자신을 광장으로 끌고 오는 기사들에게도 저항하지 못했다.
그런 마당에 바슈케르의 전사들을 피해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잘된 걸지도.’
카엘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적군의 손에 죽을 수 있을 테니까. 자신들의 황후를 죽인 제국민의 손이 아니라.
“카엘 황자가 맞으십니까?”
곁으로 다가온 바슈케르 기사가 정중하게 물었다.
카엘은 고개를 들어 제 앞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어두운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수려한 청년이 카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엘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삼키고 물었다.
“그대는 나를…… 데려가러 온 건가?”
“그렇습니다.”
“데려가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죽일 건가?”
조금 전 어머니와 삼촌처럼.
카엘의 물음에 남자가 곤란한 듯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카엘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적군이지만, 아이를 동정할 줄 아는 사람인 걸까?
“어, 어째서?”
“제가 죽여 드렸으면 하셨습니까?”
남자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카엘이 입술만 벙긋대는데.
“드한! 뭐 하고 서 있어!”
또 다른 바슈케르의 기사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카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기사보다 키가 조금 더 크고,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베인! 폐하께 전해. 황후 소생의 황자를 찾았다고.”
베인에게 지지 않을 만큼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드한이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먼저 황자를 찾아낸 거라며 으스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 이 아이야?”
그러나 베인은 드한의 도발에 개의치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카엘을 쳐다봤다.
“아이라니……. 황자 전하시라고.”
드한이 조심스럽게 호칭을 고쳐 주었다.
“엄청 귀엽게 생겼네.”
하지만 베인은 카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을 뿐이었다.
“무엄하다!”
카엘은 그의 손을 탁, 쳐 내며 소리쳤다.
‘아……!’
그리고 곧 후회했다. 그들의 손에 목숨이 달린 마당에 큰소리나 치다니.
“조그만 게 성깔 있네.”
베인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고는 드한에게 말했다.
“광장 쪽은 이제 정리가 끝났으니, 황궁으로 이동하라는 폐하의 명이다.”
“가시죠, 황자 전하.”
드한이 카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어딜 간다는 거지?”
“집으로 돌아가셔야죠.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카엘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나라의 기사들조차 제게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그런데 어째서 적국의 기사들이 저를 전하라 칭하며 공대하는지, 어째서 함께 가자며 제게 손을 내미는지.
‘함부로, 함부로 사람을 믿어선 안 된다고 했어!’
마음속의 외침은 그러했으나, 카엘은 저도 모르게 드한의 손을 잡고 말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카엘을 바슈케르의 황제 앞에 데려다 놓았다.
말로만 전해 듣던 검은 머리.
핏빛처럼 붉은 눈이 카엘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이 사람이 맨손으로도 사람을 찢어 죽인다는 그 잔혹한 폭군…….’
가까이서 마주한 바슈케르 황제에게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라가 풍겼다.
“……히끅!”
너무 무서워서 그런지 갑자기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
이카르는 여태껏 한 번도 신께 무언가를 빌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꽤 간절했다.
자신이 조금만 늦어도 처형식이 끝나 버리고 말 테니까.
‘늦지 않았기를……’
이카르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려 광장에 도착했다.
“폐하…… 저희가 한발 늦은 것 같습니다.”
드한이 말했다.
이카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참담한 심정으로 처형대를 노려보았다.
생명의 은인이 파라디움 황자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도, 그녀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도.
두 번이나 늦고 말았다.
‘또…….’
처음에는 그저 눈길이 가는 여자라 생각했다. 그냥 아름다운 외모에 시선이 간 것일 뿐이라 여겼다.
남의 여자였음에도.
하지만 그녀가 어릴 적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그 꼬마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딱히 그녀와 뭘 해 보려던 건 아니었다. 제 생명을 구해 주었으니 감사 인사와 함께 그에 맞는 보상을 하려 했을 뿐.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카르는 파라디움에 초대되었다.
그곳에서 마주친 그녀는 다행히 행복해 보였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간간이 들려온 소문들은 그녀가 꽤나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음을 암시했다.
‘파라디움의 황후께서 황손을 잃으셨다고 합니다.’
어렵게 얻은 아이의 유산 소식에 이어.
‘폐하, 방금 세이렌 후작이 전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이카르는 적국의 황제였고, 이제 그녀는 파라디움의 황후가 되어 있었다.
괜히 그가 관여해서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또 있었다.
‘만나면, 만나서 뭐라고 할 건데? 그때 네가 목숨을 살려 준 꼬질꼬질한 그 애가 나였다고?’
파라디움을 아직까지 내버려 둔 것만으로 이카르는 그녀에게 빚진 생명의 값을 치른 셈이라 합리화를 했다.
그러던 중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소식이 들려왔다.
‘폐하, 아무래도 파라디움 황궁 안이 뒤숭숭한 것 같습니다.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지만, 황제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답니다.’
파라디움 황궁에 숨어든 밀정을 통해 어렵게 정보를 입수하기는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제 목숨을 살려 준 그때의 꼬마도, 그의 가족도 살려 내지 못했으니.
이카르가 참담한 심정으로 광장을 바라보는데 베인이 물었다.
“폐하, 황후 소생의 황자가 이곳에 있는 모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황후 소생의 황자가?”
이카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수라장과 다름없는 광장을 바라봤다.
“예.”
“황후 소생의 황자도 오늘 처형할 예정이었다는 건가?”
베인이 헛숨을 들이켜며 대답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처형하지 않을 황자를, 굳이 이곳에 데려왔다…….”
파라디움 황제의 속셈을 가늠하며 중얼거리던 이카르는 곧 그 이유를 눈치챘다.
‘황후와 세이렌 후작의 처형식을 지켜보도록 하기 위함이었겠군…….’
이다음에 자라 어머니와 삼촌의 복수를 하겠다며 반기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이카르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파라디움 황제의 행태는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임에 틀림이 없었다.
“아직 살아 있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처형당하지 않았다고 하니, 광장 어딘가에 살아 있지 않겠습니까?”
베인의 대답에 이카르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찾아.”
“존명!”
베인과 드한이 꾸벅 허리를 숙이곤 양쪽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수색 작업에 나설 기사들을 데리고 멀어졌다.
광장 안의 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베인과 드한이 꼬맹이 하나를 데리고 걸어왔다.
황후를 닮아 은발에 보랏빛 눈을 지닌 아이는 이카르의 허리춤에도 미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 난리 통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았군.”
“황자 전하, 폐하의 언어를 해석해 드리자면, 방금 그건 칭찬입니다.”
드한이 곧장 아이에게 속살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