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이카르만 아는 그녀의 매력 (131/148)


#132화 이카르만 아는 그녀의 매력
2023.08.10.


이카르는 턱을 괸 자세로 곤히 잠든 르네브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차만 마시자더니…….”

작게 중얼거리며 이카르는 조금 전 상황들을 반추했다.

목에 매달려 앙앙 울던 모습.

앙칼진 고양이처럼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던 때를.

이제 그만 쉬게 해 달라는 르네브를 그가 강하게 몰아붙인 탓이었다.

양 뺨엔 장밋빛 홍조를 띤 채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달고 노려보는 게 얼마나 그를 자극하는지…….

그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등줄기가 다 저릿할 만큼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평소에도 르네브는 냉소적인 면모를 비칠 때가 있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리고 오직 그만 아는 르네브의 그런 표정을 보는 게 좋았다.

그러니까 너무 지친 나머지 르네브가 까무룩 잠들 때까지 놓아 주지 않았던 건 결국, 이카르의 노림수였던 셈이다.

그녀는 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르네브가 잠들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떠올린 것만으로 수차례 풀어낸 열기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곁에 그녀가 있는데 쉽게 진정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

이카르는 끙 앓는 신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음험한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그러나 자석에 이끌리듯 그의 시선은 다시 그녀의 잠든 얼굴에 달라붙었다.

꼭 감긴 눈꺼풀과 길고 풍성한 은색 속눈썹.

이마 바로 아래부터 자리한 오뚝한 콧대와 날렵하게 쭉 뻗은 콧날.

크림처럼 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술까지.

어느 한구석이라도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카르는 그렇게 한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르네브의 구석구석을 뜯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떠돌이 용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분이 높은 귀부인들은 피부결만큼이나 머릿결도 아주 부드럽지.’

당시에는 저급하게 킬킬거리던 그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던 이카르였다.

하지만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카르는 슬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얽어 넣었다.

손끝에 감기는 머리칼의 감촉이 실크를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정말이었군.”

그때는 그가 단순히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떠돌이 용병 주제에 신분 높은 귀부인과 밤을 보냈을 리가 없으니.

용병은 특성상 남성의 비율이 높았다. 위험하고, 거친 일이 주를 이뤘으니까.

목숨이 오가는 살 떨리는 현장에서 벗어나 저녁이라도 먹을라치면 어김없이 여자 이야기가 나왔다.

그게 긴장을 풀기 위한 그들만의 방식이라는 걸 이제는 알지만, 그때의 이카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겸상을 하지도, 그들에게 동조하지도 않았었다.

베인은 조금 흥미를 보였던 것도 같았지만.

그가 다소 집착적으로 르네브의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였다.

“……으음.”

르네브의 은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곤히 잘만 자는 그녀를 깨운 건가 싶어 이카르의 동작이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내쉬는 숨도 죽인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내 르네브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가?’

다행히 잠에서 깬 건 아닌 듯했다.

‘아니지, 일어나는 편이 나으려나?’

이카르는 순간 양가감정에 사로잡혔다.

잠깐 휴식을 취했으니, 이제 일어나서 그를 상대해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르네브가 귀엽게 코를 찡그렸다.

마치, 이카르의 현재 속마음을 눈치채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그녀의 표정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곤히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이카르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침까지 푹 자게 내버려 두기로.

오늘 하루는 그녀에게 조금 특별한 날이었을 테니까.

다른 날이 아닌 어제로 굳이 그녀와 만날 약속을 잡은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황비의 처형식 이후에 있을 르네브의 심경 변화.

그게 신경 쓰였다.

그도 과거 르네브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으니까.

원망의 대상에게 복수하는 것 말이다.

어디서 들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제 새끼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는 박정한 동물이 있다고 들었다.

그 동물은 아득바득 절벽을 기어 올라온 건강한 새끼만을 선택적으로 기른다고 했다.

그에 영감이라도 받았던 걸까?

선대 바슈케르 황제는 아직 보호가 필요한 나이의 그를 황궁 밖으로 내쫓았다.

심지어는 추격대까지 보냈다.

내보내진 직후에는 황제를 향한 분노가 제법 컸지만, 이카르는 최대한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황실 기사단이 그를 찾아왔다.

전투 태세에 들어간 그와 달리 황실 기사들은 무기 없는 빈손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방심하게 만든 뒤 공격하려는 계획이라 여겼다.

그도 이제는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였을 때는 꽤나 당황했다.

기본적으로 바슈케르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가 높았고, 황실 기사들은 그 정도가 심한 쪽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기사의 말은 절로 이카르의 미간을 찌푸려지게 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이없어하는 이카르에게 황실 기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저희와 같이 황궁으로 돌아가시죠.’

언제 사지로 내몰았냐는 듯 황제는 이카르를 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처음에는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며 따지려 했으나, 곧 기회라 판단했다.

철통 보안으로 유명한 바슈케르 황궁에 유혈 사태 없이 출입할 유일한 기회.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만나게 되었을 때 이카르는 계획대로 황제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탈출 경로도 제대로 파악해 두지 못한 상태였으나, 나름의 믿음이 있었다.

황제를 죽이면 자신이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는.

황궁의 모든 이들은 결국, 황제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 결과, 그는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황제의 말을 증명함은 물론이고, 황제를 죽임으로써 차기 바슈케르 황제로의 입지를 다진 셈이 되어 버렸다.

결국 모든 것은 황제의 뜻대로 되었고, 이카르는 그의 손바닥 안에서 완전히 놀아난 것이다.

“…….”

다시 생각해도 이카르는 황제의 방법에 동의할 수 없었다.

복수를 끝내고 황제가 된 뒤에도 한동안은 죽은 그를 원망했다.

하지만 참 우스운 일이다.

지금은 오히려 당시 황제의 그릇된 판단이 고맙기까지 하니까.

만약 황제가 자신을 황궁 밖으로 쫓아내지 않았다면, 용병이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용병이 되지 않았다면, 파라디움의 변경까지 갈 일 또한 없었을 테고.

황실 기사들에게 쫓겨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금 르네브와는 만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아니, 우연한 기회로 만나는 정도는 가능했겠지.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가령, 꼴도 보기 싫은 루시우스 황자라든지.

“빌어먹을…….”

이카르는 욕설을 짓씹었다. 그리고 루시우스 황자와 그의 연인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

르네브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곧 그녀의 시야로 근육으로 꽉 찬 너른 등이 들어왔다.

‘이제 씻으러 가나 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조금 이상하고도 특별한 꿈을 꾸었다.

***

“이, 이거 놔라!”

카엘은 제 팔다리를 억압하는 기사를 뿌리치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황실 기사의 힘은 고작 7살 어린아이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체구가 큰 기사들의 강압적인 태도에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무서웠지만, 카엘은 어머니 황후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항상 명심하세요. 카엘은 파라디움의 자랑스러운 황자예요. 언젠간 황제가 되실 거고요. 그러니 언제나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앞을 보고 걸으세요.’

언뜻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카엘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따뜻했던 어머니였다.

카엘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주눅 들지 않고 기사를 매섭게 노려봤다.

“어머니를 어쩌려는 것이냐?”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기사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카엘이 가게 된 곳은 황궁 밖 광장이었다.

광장엔 카엘의 자그마한 손가락으로는 전부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 사람들은 왜 여기 모여 있는 거지?”

카엘의 물음에 기사들은 침묵했다. 정확하게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처형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기사 중에서도 카엘을 조금 안쓰럽게 여긴 중년의 기사가 작게 속삭였다.

“……처형식? 누구의?”

카엘은 곧장 되물었다.

하지만 기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카엘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이 높아졌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카엘은 수많은 인파를 가르고 광장 중앙으로 걸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어, 어머니……?”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파라디움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었던 어머니의 모습은 처참했다.

곧 그녀가 단상으로 끌려 올라갔다.

그리고 그 위에는 단두대가, 그 옆에는 어머니의 오라버니이자 그의 삼촌인 세이렌 후작이 있었다.

카엘은 직감했다.

저 사람들이 어머니와 삼촌을 죽일 거라고.

카엘은 그쪽으로 달려 나가려 했으나, 곧 기사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누가 좀…… 저 사람들을 말려 주었으면……!’

카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사를 올려다봤다.

“어, 어째서야?”

“무엇이 말입니까?”

“어째서 내 어머니와 세이렌 후작이 저 위에 무릎을 꿇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2황자 전하께서도 귀가 있으시니, 죄목을 똑똑히 들으셨겠지요.”

“내 어머니와 세이렌 후작이 적국과 내통했다는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말이냐?”

아득바득 따지고 드는 카엘이 귀찮을 법도 했을 거다.

하지만 중년의 기사는 무릎을 굽혀 카엘과 키를 맞춘 다음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권력이란 게 원래 그런 겁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결국, 죽는 건 자기 자신이 되겠지요. 그러니 똑똑히 봐 두십시오.”

“나,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카엘은 비참한 현실에서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기사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카엘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 군중의 함성이 더없이 거세졌다.

“와아아아아!”

그리고 이내 고요해졌다.

“아…….”

너무나 비참했다.

어머니와 삼촌을 지키지 못하고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제 무력함이.

참으려 했지만, 끅끅거리는 소리가 꽉 다문 잇새로 새어 나왔다.

카엘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크흑…….”

그때였다.

갑자기 광장 안이 더욱 소란스럽게 느껴진 건.

“적군이! ……적군이 쳐들어왔습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기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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