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저택의 가치를 잘 아는 남자 (130/148)


#31화 저택의 가치를 잘 아는 남자1
2023.08.09.


쿵!

황비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 광장 안에 정적이 돌았다.

“…….”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일제히 입을 다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주위가 고요했다.

그러나 그 순간도 아주 잠깐이었다.

곧 관중들의 함성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다시 높아졌고, 형 집행은 황비에 이어 차례차례 이어졌다.

르네브는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마지막 한 사람의 목이 떨어질 때까지.

형이 모두 끝나고. 돌아서는데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과거의 황비는 정당한 방법으로 황후가 된 르네브의 몰락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같은 정부 입장인 에시카가 르네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함으로써 일종의 대리 만족을 느끼고 싶었던 걸 아닐까?

황비 그 자신은 끝끝내 가지지 못한 걸 누군가 대신 이루도록 해서라도.

그 물음에 답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앰버의 물음에 르네브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가자, 앰버.”

“……네.”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을 뒤로하고 르네브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아가씨.”

“……?”

“황제 폐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황비 전하께 등을 돌릴 수 있었을까요?”

앰버의 물음에 르네브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아마 황실을 향한 비난과 좋지 못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제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제물이요?”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르네브는 잠시 고민했다.

제물이라는 표현 말고 다른 건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도 제물이 맞았다.

“사람들은 비난할 대상이 주어지면 그곳에 정신이 팔려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잖아.”

앰버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나의 힘은 미약하지만, 뭉치면 강해져. 그리고 무릇 군주라 하면 그런 군중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만 하지.”

“그럼…… 황제 폐하께서는 자신에게 향할 제국민들의 비난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황비를 제물로 바쳤다는 건가요?”

르네브는 앰버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였었구나…….’

과거의 루시우스가 제게 누명을 씌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르네브가 죽기 전 황실을 향한 파라디움 제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

가뭄으로 인해 전례 없는 흉작이 이어졌고, 자연히 먹을 것이 부족해졌다.

거리에는 굶는 사람들이 넘쳐 났지만, 귀족들을 자기들 먹고 살기 바빴다.

그 와중에 바슈케르 제국에선 국경선을 넘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몇몇 깨어 있는 지식인들은 주기적으로 모여 함께 파라디움 제국 현황을 두고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황제의 잘난 권위도 턱 끝까지 물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수조 안에서는 무용하단 뜻이다.

‘그래서…… 비난의 대상이 필요해서…….’

르네브는 과거의 저 자신이 제물과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전부 이미 한참 전에 있었던 일이었음에도, 목이 메 왔다.

“……아가씨?”

그때 앰버가 조심스럽게 생각에 잠긴 그녀를 일깨웠다.

르네브는 그제야 과거의 불행에서 빠져나왔다.

“잠깐 생각할 게 있었어.”

앰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런저런 말을 떠들었고, 르네브는 그녀에게 적절히 대답해 주며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철저히 파괴해 주겠다던 애초 계획대로 되었다.

황비는 제 아들이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루시우스 또한 황위 계승 서열에서 밀린 것에 그치지 않고, 황제가 될 가능성조차 남지 않았다.

그에 기생하던 에시카 역시 이전 생에서처럼 살기는 요원해졌겠지.

게다가 황제는 하나뿐이었던 제 편을 제 손으로 처단한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채 뱉어 내지 못한 모래알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입안이 까끌거렸다.

목표했던 바를 모두 이루었지만, 사랑했던 아들 카엘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여전했다.

‘됐어…… 이걸로 된 거야.’

그렇게 되뇌어 봐도 눈물이 차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마차에 오르기 전 르네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금 전 광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같은 건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하늘은 파랗기만 했다.

얼마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던 르네브는 곧 시선을 돌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르네브를 힐끔거리는 앰버가 눈에 들어왔다.

르네브는 얼른 올라온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마차에 오르려 했을 때였다.

“……!”

겨드랑이 사이로 불쑥 들어온 커다란 손이 이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처음에는 당황해 버둥거렸으나, 르네브는 곧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챘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그녀를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르네브는 언제 놀랬냐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쏟아지는 태양 빛에 눈이 부셨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르네브는 가늘어진 눈을 찡긋거렸다.

이카르가 곧장 그녀의 얼굴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 주었다. 이카르의 커다란 손 아래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한결 편안해진 시야로 르네브는 잘생긴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폐하께서 어째서 여기에 계신 거예요?”

르네브의 물음에 이카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새 잊은 건가? 영애가 날 보자고 했다던데.”

르네브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언제?’

중요치 않은 일은 곧잘 잊는 그녀였으나, 이카르와의 약속처럼 중요한 일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흠…… 완전히 잊고 있었단 얼굴인데.”

이카르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살짝 그의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자연히 르네브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삼켜졌다.

‘설마…… 내가 정말 이카르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건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내려 애써도 딱히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오늘 그녀는 처형식장에 들렀다가 저택 매매인을 만나기로 했을 뿐.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장소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이카르가 르네브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흡사 납치라도 하듯 재빠른 동작으로 그녀를 마차 의자에 앉혀 놓았다.

“……?”

***

이카르와 마차를 타고 얼마쯤 이동하자 작은 호숫가가 나왔다.

그 앞에는 목조 건물이 하나 있었다.

외관은 번화가 중심에 있는 고급 상점가 건물들처럼 퍽 잘 꾸며 놓았지만, 너른 호숫가 앞에 독채로 있으니 마치 호숫가의 고즈넉한 오두막을 연상케 했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건물 외관을 둘러보던 르네브는 이카르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르네브는 흥미롭게 내부를 둘러봤다.

“마음에 드나?”

이카르의 물음에 르네브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내부 장식이 조화롭고, 앉은 자리에서 바로 호수가 보이는 것도 운치 있네요.”

탁 트인 호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았다.

이카르가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히 끌어 올리며 말했다.

“가끔은 이렇게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 모습이 보고 싶더군.”

……음?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용병 시절 이카르는 드한, 베인과 함께 여러 대륙을 떠돌아다녔다고 했다.

그중에는 동대륙도 있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이카르는 물론이고, 드한과 베인까지도 종종 동대륙의 속담 같은 걸로 말장난을 치곤 했는데, 대체로 상황과 속담의 뜻이 미묘하게 엇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처럼.

‘그런 상황에서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할까?’

잠시 망설인 르네브는 이내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이카르는 너무 완벽한 게 문제였다.

‘사람이 좀 빈틈도 있고 그래야지.’

르네브가 이번에는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카르가 접객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줄곧 이쪽을 힐끔거리던 접객원이 냉큼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이카르의 길고 곧은 검지가 메뉴판의 위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쭉 훑고 지나갔다.

“……?”

르네브와 마찬가지로 접객원의 머리에도 물음표가 떠올랐다.

“전부 주게.”

이어진 이카르의 말에 접객원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예. 금방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폐하? 설마 저걸 다 드시려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물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왜냐하면, 통째로 건물을 빌리기라도 한 것처럼 건물 안에 손님이란 르네브와 이카르, 단둘뿐이었기 때문이다.

둘이 그걸 어떻게 다 먹어.

“접대를 소홀히 해서는 쓰나.”

이카르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접대?’

그때 이카르가 테이블 위에 양피지 하나를 내려놓았다.

“영애만 허락한다면 오늘 당장 대금을 지불하고 저택을 양도받고 싶은데, 영애 생각은 어떻지?”

조금 전까지 앙다물고 있던 르네브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웃돈을 얹어서 저택을 구매하시겠다던 분이…… 폐하셨어요?”

뭘 그리 놀라냐는 표정으로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째서 그 저택을 사려고 하시는 거예요?”

르네브는 곧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이카르가 느른히 테이블에 턱을 괸 채로 말했다.

“영애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들었어.”

“맞아요.”

“그곳엔 어린 르네브 세이렌의 추억이 가득하겠지. 그런 저택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의 태연한 대답에 르네브는 푸스스 웃고 말았다.

그러나 곧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저택의 가치를 잘 알고 계신다니 대화가 쉽겠네요.”

저택 판매자 대 구입 희망자로서 협상할 준비를 끝마쳤다는 뜻이었다.

“호오…….”

그런 르네브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이카르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바로 세웠다.

“바슈케르의 예비 황후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택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덕에 아쉬운 쪽은 나인 것 같으니,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게 도리겠지.”

이내 테이블 위에 접시가 하나둘씩 놓이기 시작했다.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는 이카르에 의해 저택 협상은 보류되었다.

이카르는 르네브의 입에 음식 종류 별로 한 입씩 전부 떠먹여 주었다.

“폐하, 이제 더는 못 먹겠어요.”

르네브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이카르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잘 먹으니 보기 좋군.”

아몬드 형태로 시원하게 트인 그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붉은 눈에는 어딘지 장난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그럼 이제 협상을 해 볼까?”

그렇게 협상이 시작되고, 르네브는 이카르에게 야무지게 원하는 것들을 요구했다.

애초에 모든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었는지 그는 르네브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저택 매매 계약서에 적어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카르의 소유가 된 세이렌 후작 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는 여전히 이카르가 함께였다.

“바로 바슈케르로 돌아가 보셔야 하지 않나요?”

오늘은 일찍부터 황궁을 떠나 파라디움에 오느라 밀린 업무가 있었을 거란 생각에서 기인한 물음이었다.

“너무하는군.”

이카르가 미간을 살짝 모은 채로 말했다. 누가 봐도 심기 불편해진 그의 태도에 르네브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제 저택이 아니긴 하지만, 잠깐 들러서 차라도 하시겠어요?”

그러자 내 소유 저택에 내가 가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냐는 듯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의 초대에 응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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