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처형 (133/148)


#130화 처형
2023.08.08.


큰 이변은 없었다.

르네브의 예상대로 황제의 비호가 없는 황비에게 자비란 없었다.

“유죄.”

결국, 헨리케 자작 영애 살해 사주 건은 유죄가 내려졌다.

황비가 곧장 반발하고 나섰지만, 재판장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사무적인 말만 이을 뿐이었다.

“다음, 앤드니 백작 일가 살해 사주 건…….”

재판장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황후에게 1황자 독살 시도의 배후로 지목당한 황비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앤드니 백작 부인의 독단적인 범행으로 몰았고,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음을 종용했다고.

황비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참. 거의 소설과 다름없는 내용이네요.”

발언권 없이도 계속해서 끼어드는 황비에게 질린 건지, 그도 아니면 익숙해진 건지, 재판장이 그녀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밀레 자작 부인, 증언하시오.”

재판장 안 사람들의 시선이 밀레 자작 부인에게로 모였다.

시선을 내리깐 채로 잠시 호흡을 고른 밀레 자작 부인이 곧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증인석을 나서 걸음을 옮겼다.

“……?”

자연히 사람들의 고개가 그녀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증인석을 벗어난 밀레 자작 부인의 걸음이 멈춘 곳은 황비의 옆이었다.

“저는 이번 앤드니 백작 일가의 살해 건으로…… 저를 고발합니다.”

재판장 안의 웅성거림이 높아졌다.

이를 갈며 밀레 자작 부인을 노려보던 황비가 이내 외쳤다.

“이의 있습니다!”

보다 이성적으로 상황 대처에 나서기로 방법을 바꾼 모양이었다.

확실히 황비다운 태세 전환이었다.

“…….”

재판장이 황비를 향해 고개만 까딱거렸다. 발언권을 얻으려 드는 게 차라리 낫다는 듯이.

“밀레 자작 부인은 현재 심신 미약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 밀레 자작 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요?”

황비가 재판장이 아닌, 청중들을 향해 호소했다. 여론 몰이를 하려는 것 같았다.

“밀레 자작 부인이 심신 미약 상태라는 증거는?”

재판장이 황비에게 물었다.

“먼저 간 앤드니 백작 부인의 후임으로 밀레 자작 부인에게 시녀장 역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최근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며 휴가를 낸 뒤로 황궁에 복귀하는 걸 차일피일 미루고 있죠. 그 이유가 몸이 아닌, 정신 쪽에 문제가 생겨서라는 것 같더군요…….”

그녀는 제법 논리 정연하게 밀레 자작 부인의 증언을 믿는 게 과연 옳은 일이겠느냐는 주장을 이어 나갔다.

방청석의 의견 또한 갈렸다.

누군가는 황비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떠들었고, 또 누군가는 이 사건을 흐지부지 무마하기 위한 수작이라며 비난했다.

그때였다.

황비가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내내 가만히 서 있던 밀레 자작 부인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밀레 자작 부인, 할 말이 있다면 해 보시오.”

재판장의 허락하에 밀레 자작 부인이 입을 뗐다.

“맞습니다. 저는 최근 잠 못 이루는 날이 잦았습니다. 그 때문에 시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지요…….”

밀레 자작 부인의 말에 여론 또한 황비의 의견이 맞는다는 쪽이 우세해졌다.

그러나 이어진 내용은 재판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고 말았다.

“제가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은……앤드니 백작 일가가 독살을 당한 뒤부터입니다.”

재판장이 흥미로운 눈을 하고 물었다.

“앤드니 백작 일가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황비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게 아니었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기 직전까지도 황비 전하께서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죠. 그들이 목숨을 잃은 이유는…… 제가 그들이 먹을 식사에 독을 탔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재판장은 개의치 않고 바로 질문을 이었다.

“어째서 앤드니 백작 일가가 먹을 식사에 독을 탔는지 말해 보시오.”

이제 침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재판장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건 황비 전하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밀레 자작 부인의 증언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재판장 안이 술렁였다.

“조용, 조용…….”

재판장이 사람들을 진정시킨 뒤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 사실을 밝히면 밀레 자작 부인, 당신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을 터. 솔직히 털어놓은 이유가 무엇이오?”

재판장이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그날 이후로 매일 같이 앤드니 백작 일가가 제 꿈에 나타나 저주의 말을 퍼붓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황궁으로의 복귀가 늦어진 것이지요.”

밀레 자작 부인은 그에 그치지 않고, 당시 상황을 입증할 만한 몇 가지를 덧붙였다.

음식에 탔던 독의 입수 경로와 철통 보안이나 다름없던 지하 감옥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까지.

“재판장님! 지금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보면 모르시겠어요?”

밀레 자작 부인의 증언이 이어지는 내내 사실이 아니라며 황비가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쏟아지는 방청석의 비난에는 황비도 어쩔 수 없었는지, 종내에는 재판장의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황비의 앤드니 백작 일가의 살해 사주 건 또한 유죄가 내려졌다.

자수했기에 감형을 받아 낼 수는 있었지만, 밀레 자작 부인 또한 처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는 밀레 자작 부인을 보며 황비가 꼴 좋다며 비웃었다.

하지만 누구의 미래가 더욱 처참할 것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기나긴 재판에 모두가 지쳐 갈 즈음 재판장이 말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세이렌 후작 암살 계획과 반역에 관한 증언이 있겠소.”

르네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증인석 쪽으로 걸어 나갔다.

***

황제는 독대하고 싶다는 루시우스의 요청을 여러 차례 거절했지만, 루시우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황제와 만날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간의 오해를 풀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황비의 처형식이 코앞에 다가왔을 즈음이 되어서야 황제는 루시우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루시우스는 금칠이 된 황좌에 앉아 유유히 술잔을 기울이는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래. 나를 보자고 했다지?”

황제는 마치 그간 숱한 만남 요청을 거절한 사실이 없었다는 양 태연하게 물었다.

어렵게 성사된 만남인 만큼 루시우스도 괜한 투정을 부리는 대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먼저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저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

황제는 아무 대꾸 없이 루시우스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오해가 무엇인지 굳이 되묻지 않는 것을 보고 루시우스는 확신했다. 그가 여전히 루시우스의 핏줄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음을.

“오해에 관해 말씀드리기 전에 폐하께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루시우스는 먼저 오래된 서적 하나를 내밀었다.

황제가 시선을 주자 시종장이 다가와 루시우스가 들고 있는 책을 받아 들고는 황제 앞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게 무엇이냐?”

황제가 슬쩍 테이블 위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제가 황제 폐하의 핏줄이며, 정당한 파라디움 황실의 일원임을 뒷받침해 줄 증거입니다.”

황제가 눈짓을 해 보였고, 시종장이 책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먼 선대의 특질이 대를 거쳐 먼 후대까지 내려오는 예도 있다고 합니다. 그 고서에도 적혀 있듯이 먼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푸른 눈을 가진 황제가 있다는 기록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루시우스는 수하를 통해 가능한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아오라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황제를 만나게 되거든 확실히 못 박아 둘 작정이었다.

자신은 황제의 아들이 맞으며, 역모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자신의 태생에 대해 직접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의 짜증이 일었지만, 당장은 머리를 숙여서라도 오해를 풀어야 했다.

살아남아야 이후의 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

황제가 고서를 꼼꼼히 살피는 시종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우스, 네가 내 아들이라 증명한들 무엇이 달라지느냐?”

루시우스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네 어미에게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겠지?”

“예…….”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그만 물러가 보아라.”

“……실례했습니다.”

루시우스는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절로 반듯한 이마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꽉 막힌 사고방식과 이미 굳어진 선입견 때문인지 황제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살기 위해선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

수도 중심지에 자리한 광장에는 황비와 그녀의 측근이자, 그간 파라디움의 권력의 중심이었던 자들의 처형을 보러 온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있었다.

르네브는 광장으로 모여드는 행렬의 가장 끝에 서서 현 상황을 지켜봤다.

“와, 아가씨. 저 좀…… 무서워요. 사람들이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앰버가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지르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오늘은 특히 날이 따뜻했다.

하지만 군중 심리란 확실히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네.”

앰버처럼 르네브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녀 또한 쌓인 분노를 표출할 비난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있었으니까. 저 자리에 직접 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우와아아아아!

황비와 시녀들이 단두대 옆 단상에 오르자 군중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아가씨. 여기 모인 사람들은 황비와 전혀 일면식도 없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제 일처럼 흥분하는 걸까요?”

앰버의 물음에 르네브는 잠시 먼발치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무언가에 단단히 화가 난 듯 끊임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황비와 시녀들을 조롱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같은 구호를 반복해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역모를 꾸미고 파라디움 황실을 능멸한 황비와 시녀들, 대공과 남부 귀족들을 처형하라!”

함성이 점점 높아졌다.

“황비를 처형하라!”

그리고 이내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처형하라!”

“황비를 처형하라!”

르네브는 바로 옆에 있는 앰버에게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 소음 속에서는 잘 전해지지도 않을 테니.

‘삶이 퍽퍽하니, 돌을 던질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 먹이로 황비가 주어진 셈이겠지.’

르네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 또한 저 위에서 목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파라디움 제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황후였다.

그들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적국과 내통한 반역자라는 꼬리표가 붙자마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황비를 향한 군중들의 분노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제일 먼저 황비가 단두대 앞에 꿇어앉혀졌다.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퍽 애처로웠다.

그녀는 끊임없이 무어라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의 함성만 더욱 높아질 뿐이었다.

“황비를 처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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