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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뜻밖의 증인 (129/148)


#129화 뜻밖의 증인
2023.08.07.


“대공 저에서 발견되었다는 역모의 증거가, 폐하의 계략이었다는 건가요?”

르네브는 우물우물 베이컨을 씹어 삼킨 뒤에 물었다.

“그래.”

르네브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는 중간중간 목이 메지 않도록 이카르가 착즙 오렌지 주스까지 살뜰히 마시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하는 동안 이카르는 파라디움 남부에서의 일과 대공 저에서 역모의 증거가 다소 발견될 수 있었던 속사정에 관해서 설명했다.

르네브는 이카르가 건네는 음식들을 아기 새처럼 족족 받아먹었고, 접시 위가 말끔하게 비워졌을 때가 되어서야 이카르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마치 잘 먹어서 너무 예쁘다는 듯이.

르네브의 뺨에 쪽 입을 맞춘 이카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도 마쳤으니 이제 바슈케르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그 외에 더 물어볼 건 없나?”

“기밀문서를 조작한 것도, 대공 저에 숨겨 둔 증거도 전부 드한 경의 솜씨였다는 거네요?”

“맞아.”

저번 기밀문서 때에 이어 르네브는 다시 한번 놀랐다. 드한에게 그런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는 사실에.

‘역시, 괜히 황제의 최측근이 아니었구나.’

르네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이카르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이카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아, 드한에게 질투하는구나.

이카르의 심리를 빠르게 파악한 르네브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대화의 흐름을 바꾸려 했다.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주제가 없었다.

그때 이카르가 먼저 원하는 것을 솔직히 요구했다.

“날 좀 더 칭찬해 주는 건 어떤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가 만족할 때까지 고맙다는 말은 해 줄 수도 있었으나, 칭찬은 조금 다른 영역이었다.

‘칭찬이라니…….’

이카르가 한껏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르네브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망설여졌다.

아니지, 칭찬을 꼭 말로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아이에게 하듯 머리라도 쓰다듬어야 하나……?’

르네브는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이카르가 바라는 것 또한 그런 게 아닐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한 르네브는 이카르의 목에 팔을 두르고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폐하, 정말 대단하세요.”

“그래. 그렇게 하면 돼.”

이카르의 얼굴에 근사한 미소가 어렸다. 르네브의 칭찬에 매우 만족한 것 같았다.

‘이게 정답이 맞았군.’

이카르의 반응에 힘입어 르네브는 조금 과감하게 그의 목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카르가 자연스럽게 르네브 쪽으로 끌려오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녀와 키를 맞춰 주려는 것 같았다.

“안 되겠군.”

“……?”

“오늘은 영애에게 그간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아 내야겠어.”

뱉은 말 그대로 르네브를 번쩍 안아 든 이카르가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폐하.”

“……?”

“아침 식사만 하고 돌아가시려던 것 아니었나요?”

허리에 휘감은 팔에 힘을 주고 그가 르네브를 바짝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경고하듯 뇌까렸다.

“날 먼저 유혹한 건 영애야. 행동에 따른 책임은 져야지.”

그 말을 끝으로 이카르가 다소 거칠고 다급하게 입술을 맞부딪혀 왔다.

***

그로부터 얼마 뒤.

모두의 관심이 주목된 사건인 만큼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황비의 첫 재판이 이루어졌다.

증거는 차고 넘칠 만큼이나 충분했고, 무엇보다 죄질이 너무 나빴다.

역모는 따로 재판 없이도 발각된 즉시 그 자리에서 처형이 가능한 중죄였으니까.

“아가씨. 이제 재판이 시작되려나 봐요.”

앰버의 말에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판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재판이 이루어지는 곳과는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곧 황비와 그녀의 시녀들이 줄줄이 끌려 나왔다.

“어머나,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녀들의 등장에 여기저기서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황비는 물론이고 시녀들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다.

고문이라도 당했다고 의심이 될 정도로 그녀들의 얼굴 여기저기엔 피멍이 들어 있었고, 입고 있는 드레스 또한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사교계의 빛나는 보석도 완전히 빛을 잃는 날이 오는군요.”

그 언제인가 황제가 했던 말을 비꼬는 것이었다.

저 말이 시발점이라도 된 듯 여기저기에서 황비와 시녀들에 대한 비난이 터져 나왔다.

“다들 그간 황비에게 쌓인 게 많았나 봐요.”

앰버가 르네브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이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렇겠지.”

르네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총애를 기반으로 황비는 꽤 오랜 시간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사교계의 특성상 늘 떠오르는 샛별은 있었고, 사교계의 샛별이 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이를 황비는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먼저 접근해 제 편이 될 것인지, 황후의 편이 될 것인지 선택을 강요했다.

그리고 황후의 편에 서는 이는 철저히 망신을 줘 사교계에 나서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구식 드레스를 입었다며 핀잔을 주는 건 기본이었고, 일부러 같은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황비와 같은 드레스를 입고 유유히 무도회를 활보할 만큼 간이 크지 못한 귀부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빠른 귀가를 택했다.

그렇게 유아독존이었던 황비의 추락을 지켜보러 온 이들이 재판장엔 한둘이 아니었다.

“조용, 조용…….”

재판장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잠재우고 황비의 죄목을 나열했다.

가장 큰 건은 당연히 역모였으나, 재판장은 시녀들의 살해 사주 건부터 시작했다.

“이건 모함입니다. 분명 나를 시기 질투한 누군가가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꾸며 낸 일이라고요.”

열거한 죄들을 인정하느냔 물음에 황비는 아니라고 잡아뗐으나, 재판장의 무미건조한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저 옅게 한숨을 뱉었을 뿐.

“허락하기 전까지는 발언에 주의하시오.”

재판장이 짧게 황비에게 경고하고는 말을 이었다.

“증인, 들어오시오.”

그리고 곧 재판장 안으로 헨리케 자작 영애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등장에 다시 웅성거림이 높아졌다.

“증인, 발언하시오.”

“저는 헨리케 자작 가의 사람입니다. 황비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제 언니의 누명을 벗기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헨리케 자작 영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비가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헨리케 자작 영애는 내 소중한 물건에 손을 대고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헨리케 자작 영애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한동안 사교계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질린다는 표정으로 소란스러운 장내를 한번 쓱 훑어본 재판장이 이내 제 할 일만 하기로 마음을 바꾼 듯 입을 열었다.

“그대가 말하는 언니의 억울한 누명과 황비 사이에 있는 상관관계가 무엇인지 설명하시오.”

발언권을 얻은 헨리케 자작 영애가 그간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언니는 몇 해 전 황비의 시녀로 발탁되어 황궁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언니와 소식이 끊겨 버렸습니다.”

어느새 다들 조용히 헨리케 자작 영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황궁에 찾아가 언니의 행방을 물었으나, 제 언니가 황비의 물건을 훔친 일로 시녀 직에서 잘렸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헨리케 자작 영애의 말허리를 자르고 황비가 끼어들었다.

“도둑X의 가문 사람이 하는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저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죠?”

다시 장내의 웅성거림이 높아졌다.

재판장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는 헨리케 자작 영애를 쳐다봤다.

주변에 개의치 말고 증언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언니는 끝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저희 가족들은 백방으로 언니를 찾았습니다만…….”

하지만 또다시 황비가 끼어들었다.

“아니, 제 가족 간수를 못 한 건 자신들의 책임이면서 왜 남 탓을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네.”

참다못한 재판장이 어딘가로 눈짓을 해 보였다.

결국, 황비에게 재갈을 물리고 나서야 재판은 원활히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헨리케 자작 영애의 모든 증언이 끝난 뒤에야 황비에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황비,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당연하게도 황비는 그 모든 사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헨리케 자작 영애는 그동안 모아 온 언니의 실종과 황비에 관한 증거를 제출했다.

“아가씨. 황비는 증거가 있는데도 계속 사실을 부정하려는 걸까요?”

앰버가 답답하다는 듯 제 명치를 퍽퍽 두드리며 물었다. 르네브는 헨리케 자작 영애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언제까지고 발뺌하기는 어렵겠지.”

그때였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사건을 증언할 또 다른 증인이 있습니다.”

헨리케 자작 영애의 발언에 황비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재판장은 그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했다.

“증인, 들어오시오.”

곧 재판장 안으로 밀레 자작 부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등장에 황비는 물론이고, 시녀들의 눈까지 휘둥그레 커졌다.

***

황비의 재판 소식은 그의 수하를 통해 갇혀 있는 루시우스에게도 전해졌다.

“후우…….”

루시우스는 심란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황비의 몰락은 그에게도 아주 큰 영향을 줄 것임이 틀림없었다.

왜 아직 황제가 자신을 황비와 엮어 지하 감옥에 가두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루시우스는 희망을 품었다.

황제가 자신만은 살려 두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폐하를 직접 만나 뵙고, 말씀을 올릴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봐.”

“알겠습니다, 황자 전하.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어렵사리 잠시 만날 수 있었던 수하가 떠나고 혼자 남겨진 루시우스는 사방이 막힌 방 안을 초조하게 서성이다 목소리를 높였다.

“에시카, 거기 있나?”

“예, 루시우스 황자 전하.”

“이야기는 전부 들었겠지?”

그러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네…….”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루시우스가 그녀를 채근하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께서 황자 전하를 지하 감옥에 가두지 않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아마도 황제 폐하의 친자가 맞는지 확실히 한 뒤에 결정을 내리시려는 걸 겁니다.”

루시우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비와 대공의 외도는 확실시된 듯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루시우스가 대공의 자식이라는 증거는 아직 없는 셈이니까.

“황제 폐하께서 접견을 허락하시거든, 저도 그 자리에 동석할 수 있을까요?”

“그대가?”

“예, 제게 황제 폐하를 설득할 만한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루시우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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