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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계략남 이카르 (128/148)


#128화 계략남 이카르
2023.08.06.


“그만, 제발 그만해……!”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거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황비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쉼 없이 이어진 발길질과 모진 매질 때문이었다.

심문을 받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말할 기운조차 없어 보이던 시녀들은 그간 쌓은 분을 전부 터뜨려 버릴 기세였다.

이건 명백한 하극상이었다.

모함을 받아 갇히는 처지에 놓였다고는 해도 자신은 황비였고, 그녀들은 여전히 시녀였다.

하지만 그 신분의 차이를 주장할 수가 없었다.

지하 감옥 안은 좁았고, 그녀들을 말려 줄 시종도, 기사도 없으니.

지하 감옥 안은 비명으로 가득했으나, 아무도 들여다보러 오지 않았다.

황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퍼부어지는 폭력에 몸을 내맡길 뿐.

“……!”

어딜 잘못 맞은 건지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채로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내쉬려 했다.

그러나 잠시의 틈도 없이 시녀들의 폭력이 이어졌다.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그것도 지하 감옥 안에서 믿었던 시녀들에게 맞아서? 꼴사납게?

황비는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이 얼마나 무섭게 돌변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

앰버가 헐레벌떡 응접실로 뛰어들어 왔다.

“앰버, 무슨 일이야?”

“아가씨! 대공께서 붙잡혀 들어가셨대요!”

“……그래?”

“네!”

르네브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생각에 잠겼다.

예상보다 황제가 결단을 빨리 내린 모양이었다.

‘약간의 의심만 하게 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물론 황비의 죄목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1황자 독살 시도 및 시녀였던 헨리케 자작 영애와 시녀장이었던 앤드니 백작 부인 살해 지시.

그 외에도 황비를 따르는 귀족들에게 특혜를 주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등.

황제의 정부는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제국법 또한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황제의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진 지금, 그간의 죗값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대공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역모를 일으킬 만큼 포부가 큰 사람이 아니었고, 가진 것들을 지키는 성향을 가진 이였다.

그러니 대공을 붙잡아 들인 건 황제답지 않은 결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르네브가 건넨 기밀문서 하나만 가지고 대공을 잡아들이는 건 위험부담이 큰 게 사실이었으니.

“무슨 연유로?”

르네브의 물음에 앰버가 이건 황궁에서도 극비리의 정보라며 덧붙였다.

“대공 저에서 역모의 증거가 다수 발견되었다나 봐요.”

르네브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대공과 황비 사이를 의심하게 만들려던 건 르네브의 의도가 맞지만, 정말로 두 사람이 역모를 꾸몄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황후 폐하께서도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겠다고 하셨어요.”

얼마간 그 일로 앰버와 대화를 나누고 나자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르네브는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침실 창 너머로 밝게 빛나는 동그란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봄 축제가 끝나도 건강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다시 뵐 수 있기를…….’

르네브는 한동안 세이렌 후작이 안전하게 서부로 돌아가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소파에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

“…….”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침실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생각하다가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네.’

잠기운이 내려앉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르네브는 침실 안에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에 닿는 벽처럼 단단한 흉근의 감촉에 놀라며 시선을 들었다.

“……폐하?”

이카르가 그녀의 상체를 한쪽 팔로 단단히 끌어안은 채였다.

“일어났군.”

아직 잠기운이 남은 탓일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음영진 이카르의 모습이 어딘지 신비롭게 느껴졌다.

르네브는 몇 번 눈꺼풀을 깜빡이며 눈에 초점을 맞췄다. 이내 시야에 이카르의 얼굴이 선명히 들어왔다.

잠기운이 빠르게 달아나고 있었지만, 이카르의 근사한 얼굴은 여전했다.

“폐하, 언제 오셨어요?”

르네브는 부스스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그런 모습도 사랑스럽다는 듯 이카르가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조금 전에.”

조금 전에 왔다는 말과는 달리 이카르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다.

‘……이카르 품에 안겨서 푹 자 버린 건가?’

그런 생각을 입증이라도 하듯 몸이 가뿐하고 개운했다.

“오셨으면 저를 깨우지 그러셨어요.”

“달게 자는 것 같기에.”

그래서 깨우지 않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이카르의 그런 자상한 배려가 고마웠다.

르네브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덕분에 잘 자서 그런지 몸이 개운해요.”

“다행이군.”

이카르의 입꼬리 끝이 기분 좋은 듯이 말려 올라갔다.

“……?”

“이제 안 재울 생각이거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르네브는 곧 이카르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뺨을 붉혔다.

그게 또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은 이카르가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는 속삭였다.

“영애에게 전할 기쁜 소식이 있어.”

델 듯 뜨거운 이카르의 손이 부드러운 살결을 살살 쓸어내리는 감촉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르네브는 어깨를 살짝 떨며 이카르를 올려다봤다.

“기쁜 소식이 뭔데요?”

“세이렌 후작이 해적 토벌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서부로 떠났다는 소식.”

르네브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을 잘 넘기는 게 중요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해적 토벌 문제에 더해 봄 축제로 몰려든 인파까지, 여러모로 세이렌 후작의 주의가 분산되기 쉬웠던 시기였으니까.

“정말…… 다행이에요.”

르네브는 기뻐했고, 또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런 르네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카르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물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은가 보지?”

말캉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살짝 까끌 거리는 그의 입술 표면이 여린 살을 훑고 지나갔다. 르네브는 살짝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파라디움 남부에 다녀오셨나 보네요.”

조금 더 과감하게 이카르의 손이 그녀의 잠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잘 아는군.”

그녀에겐 세이렌 후작도, 이카르도 모두 소중했다. 제 가족을 위해 직접 남부로 가 준 이카르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래서 르네브는 솔직하게 제 감정을 털어놓았다.

“미안하고…… 고마워요.”

“앞의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은데.”

“어째서요?”

“영애의 가족은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가족의 위험을 빤히 알면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하아…….”

르네브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지?”

이카르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 채로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연신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내기를 반복했다.

“폐하가…….”

그러면서도 이어질 르네브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시선만큼은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사랑스러워서요.”

르네브가 말을 뱉자마자 이카르의 모든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품을 파고들던 손도, 연신 쪽쪽거리던 것도.

“……내게 적절한 보상을 주고자 함이었다면, 완벽했어.”

더 말해 달라는 듯 이카르가 그녀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래서 르네브는 이카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빌어먹을…….”

이카르가 낮게 욕설을 짓씹으며 르네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호랑이나 사자처럼 거대하고 위험한 짐승이 달려드는 것 같아 위협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르네브는 그를 피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이카르가 그녀를 다치게 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아니까.

***

아침 해가 밝아 오고도 한참, 이카르는 욕심껏 르네브를 탐했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까지 르네브의 뺨에, 코에, 눈꺼풀에……. 연신 이카르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이카르는 한참을 르네브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아…… 이젠 정말 가 봐야겠군.”

낮은 한숨을 흘린 이카르가 아쉬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침…… 드시고 가시는 건 어떠세요?”

르네브의 말에 잠시 굳어 있던 이카르가 곧장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괘씸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고는 르네브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려울, 까요?”

르네브가 의기소침하게 되묻자 이카르가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역시 영애는 정말 영악해.”

르네브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적으로 영악하다는 표현은 부정적으로 쓰인다. 하지만 이카르는 종종 칭찬의 의미로 쓰곤 했다.

‘그러니 싫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카르의 심리를 알 길 없는 르네브는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렵게 떠날 결심까지 한 날 붙잡는 걸 보면, 영애는 정말로 영악해.”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곧 화사한 미소가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마치 떠나는 그를 르네브가 붙잡아 주길 바라기라도 한 것처럼.

르네브는 이전에 딱 한 번, 떠나려는 이카르를 붙잡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근사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지금처럼.

르네브는 그 표정이 다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떠나기로 마음먹고 몸을 돌린 이카르를 붙잡은 것이기도 했다.

“아침, 저와 같이 드시는 거죠?”

르네브의 물음에 이카르가 크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르네브는 곧장 설렁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그런데 폐하, 대공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대공 저에서 역모의 증거까지 나온 상황이라던데…….”

르네브는 이카르의 무릎에 앉아 그가 건네는 빵 조각을 받아먹으며 조잘거렸다.

“……정말로 황비와 대공이 내연 관계에 있었던 걸까요?”

이카르가 그녀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핥아먹고는 말했다.

“글쎄. 두 사람이 정말로 내연 관계였는지는 모르지. 하지만 대공 저에서 역모의 증거가 나온 건 확실해.”

이카르가 단정적으로 말하며 르네브의 입에 오믈렛 조각을 가져다 댔다.

르네브는 짭짤하면서도 달콤한 오믈렛을 씹어 삼키며 생각했다.

‘황후조차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던 걸 이카르가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카르가 덧붙였다.

“대공 저에서 나온 증거들은 드한의 솜씨거든.”

“……!”

르네브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대공 저에서 발견되었다는 역모의 증거가 이카르 계획의 일부였다니!’

르네브는 그의 치밀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그가 제 편이라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이카르처럼 철저하고 집요한 사람을 적으로 두었다면 그녀의 미래가 어땠을지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입 더 크게 벌려.”

그런 르네브의 마음도 모르고 놀라 벌어진 그녀의 입술 틈으로 이카르가 바싹 구운 베이컨 조각을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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