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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하극상 (127/148)


#127화 하극상
2023.08.05.


먼 거리도 단숨에 이동 가능한 바슈케르와 파라디움의 사정은 달랐다.

그러한 이유로 정보 전달 부분에선 파라디움이 바슈케르보다 언제나 한발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이카르는 어쩌면 세이렌 후작의 암살 계획이 수면 위로 드러난 일 또한 남부 귀족들에게 아직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중대한 사안인 만큼 그들에게 소식이 전해지는 것도 시간문제겠지만, 어쨌든 암살 계획은 무산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르네브의 편지를 받고 세이렌 후작은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암살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면?

세이렌 후작이 먼저 그들을 찾아내 척결하는 것이 가장 깔끔한 결말이 될 것이나, 암살자들이 기존의 계획을 변경했을 가능성도 컸다.

어찌 되었든 세이렌 후작이 안전히 서부로 돌아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봐야 이카르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 다음 르네브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부드럽고 가녀린 몸을 꼭 끌어안고, 입 맞추고…….

르네브 특유의 달콤한 체향을 떠올리며 이카르는 불빛을 쫓아 말을 달렸다.

봄 축제가 한창인 거리가 가까워졌을 즈음이었다. 축제 현장과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카르는 말의 속도를 늦추며 그쪽으로 다가가 물었다.

“저건 봄 축제에 몰려든 인파인가?”

중년의 부인이 그를 돌아봤다.

무엇에 놀랐는지 중년의 부인이 입을 떡 벌리곤 멀뚱히 이카르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이카르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중년의 부인이 대답했다.

“뭍으로 올라온 해적들이 인질들을 데리고 예배당을 점거했다지 뭐예요. 이렇게 좋은 날에 당최 이게 무슨 일인지…….”

이쪽으로 걸어오던 중년의 남자가 말을 보탰다.

“세이렌 후작님께서 기사들을 이끌고 예배당으로 가신 지 벌써 한참이 지났는데, 일이 어떻게 될는지…….”

“세이렌 후작?”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예? 예. 그렇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다급히 양손을 공손하게 모으고는 대꾸했다.

“그게 언제쯤이었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몇 시간은 훌쩍 지났지 싶습니다.”

“알려 주어 고맙네.”

이카르는 그들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말고삐를 당겼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말을 몰았다.

“여보, 말투가 왜 그리 어색해요?”

“어색해 보였어? 내 평생 귀족 나리와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외지에서 오신 귀족이신가 봐요.”

“봄 축제를 구경하러 오신 모양이야. 그런데 묘하게 복식이 낯선 것 같은데.”

“수도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인가 보죠, 뭐. ……그런데 대체 어느 가문의 도련님이실까요?”

“당신이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깜짝 놀랄 만큼 잘생기셨잖아요! 눈 호강 제대로 하네요, 오늘.”

“거, 당신도 참.”

말의 속도가 붙으면서 자연히 그들의 말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세이렌 후작의 위치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예배당 주위로 몰려든 구경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지?’

손목을 결박당한 채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세이렌 후작의 모습을 보고 이카르는 미간을 모았다.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이카르는 고개를 돌렸다.

“화, 황제…… 폐하……?”

세이렌 기사단 갑옷을 입은 젊은 기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카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결혼 허락을 받으러 서부에 갔을 적에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쉬이.”

이카르는 서둘러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기사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괜한 소란은 피우고 싶지 않다는 그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기사가 쭈뼛거리면서도 얌전히 이카르에게로 걸어왔다.

“여, 여긴 어떻게…….”

“어째서 무기도 없이 세이렌 후작 혼자 적진에 들어가게 된 건지 설명해.”

이카르는 서두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기사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돌아가는 상황을 짧고 빠르게 보고했다. 마치 이카르가 자신이 모시는 황제라도 되는 양.

“그럼 현재 책임자는?”

“부단장님이십니다. 제가 황제 폐하께서 암행 나오셨다고 말씀 전하겠습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헐레벌떡 기골이 장대한 기사에게 뛰어갔다.

이카르에게 다가온 부단장이 꾸벅 묵례하고는 말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적절한 예를 차리지 못하는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오히려 이편이 좋았기에 이카르도 바로 입을 열었다.

“인질을 교환한 후엔 어찌할 작정이었지?”

“쪽문으로 진입할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후작님께서 신호를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쪽문이라는 곳은?”

이카르는 예배당의 구조를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예배당으로 튀어갈 것 같은 이카르의 기세 때문일까?

부단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후작님의 신호가 있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대기하는 것이 어떠신지…….”

이카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늦어.”

세이렌 기사단은 후작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를 것이다.

하지만 이카르는 세이렌 후작의 부하도, 파라디움인도 아닌 바슈케르의 황제였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모든 일의 책임은 내가 지겠다. 쪽문으로 안내해.”

이카르의 짧게 명령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부단장이 순순히 대답했다.

“……예.”

다른 기사들과 따로 동떨어져 있는 소수의 기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부단장이 말했다.

“예배당으로 진입할 세이렌 기사단의 정예병들입니다.”

이카르는 그들을 쓱 둘러봤다.

확실히 눈빛들이 살아 있었다. 쓸 만해 보였다.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단장이 세이렌의 정예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카르는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는 정예 기사들과 함께 예배당 뒤편으로 향했다.

“여깁니다. 폐하.”

부단장의 폐하란 말에 기사들이 흠칫 놀라며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카르는 동요하는 그들에게 개의치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전에 세이렌 기사단의 훈련에서 보았던 대로 기사들을 향해 대기하라는 손짓을 취해 보였다.

“…….”

발소리도 죽이고 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예배당으로 향하는 문 너머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카르는 지체하지 않고, 돌격하라는 손짓을 취한 다음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당 바닥에는 이미 세이렌 후작이 해치운 것으로 보이는 해적 몇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세이렌 후작은 무기 없이 맨몸으로 해적 여러 명과 대치 중이었다.

“……!”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카르와 기사들을 보며 해적들이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그들은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헐레벌떡 도망치려 들었지만, 예배당의 입구와 있는지도 몰랐던 쪽문까지 이카르와 기사들이 막고 있었다.

“이럴 수가……. 세이렌 후작, 거, 거짓말을 한 건가?”

가장 체격이 큰 해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으나, 세이렌 후작을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때, 비교적 체구가 작은 해적이 단검을 들고선 재빠르게 세이렌 후작의 품을 파고들려 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었나 보군.”

이카르는 짜증스럽게 내뱉고는 허리춤에서 꺼낸 비수를 던졌다.

“……!”

명중이었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해적이 바닥에 쓰러졌다.

곧 예배당으로 진입한 기사들이 빠르게 남은 해적 잔당을 소탕했다.

“폐하……?”

세이렌 후작이 이카르를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

한 명 한 명 감옥 밖으로 불려 나갈 때마다 시녀들은 피떡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들의 눈에 드리운 선연한 공포에 황비 또한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깥의 정보가 필요했다.

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시녀들을 붙들고 황비는 상세히 캐물었다.

‘내가 역모를 꾸몄고, 그 이유가 세이렌 후작의 군사를 빼앗아 루시우스를 황위에 올리기 위함이라는 건가?’

자신이 왜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는지, 어째서 시녀들을 고문하고 무엇에 대해 자백을 받아 내려 했는지 그 모든 의문은 풀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아직 가장 큰 의문이 풀리지 않았으니.

어째서 황제가 그러한 것들을 철석같이 믿고 행동에 나섰느냐에 관한 것.

세월이 흘렀고, 젊었을 때보다는 무뎌졌다고는 하나 황제는 황제였다.

마땅한 증거도 없이 이런 일들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황비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과 시녀들의 가문들이 다 함께 황제에게 등을 돌린다면 제아무리 황제라 해도 곤란해질 것이다.

‘진실이 아니라고 밝혀졌을 때 내 얼굴을 대체 어찌 보려고?’

그런 생각을 하며 황비가 미간을 모았을 때였다.

타박타박 감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황비는 가만히 철장 너머를 응시했다.

이내 철장 너머의 시야로 익숙한 남자의 옆얼굴이 들어왔다.

황비는 천천히 철장 앞으로 다가갔다.

“……대공?”

못 본 사이 제법 초췌해진 얼굴로 대공이 긴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틀림없소.”

황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만 끄덕였다.

“황비, 당신과 내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만남을 지속해 왔다고 폐하께서 믿고 있소.”

“……네?”

“그뿐이 아니었소. 루시우스 황자 전하의 핏줄 또한 의심하고 계신 것 같았소…….”

“……!”

황비는 눈을 부릅뜨곤 되받아쳤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막말을! 황제 폐하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을 믿고 계신다는 겁니까?”

“황제 폐하가 세이렌 후작 암살의 배후라는 소문이 난 뒤로 여론이 좋지 않소. 높아진 황실에 대한 반감을 잠재우기 위해 억울한 누명을 씌울 희생양이 필요했던 듯하오.”

대공의 말에 철장을 꽉 붙든 황비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대공의 뒤에 있던 기사가 끼어들었다.

“사실이 전부 밝혀지기 전까지 두 분의 대화를 금하란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잔말 말고 갈 길이나 가자는 뜻이었다.

대공은 다시 한번 단전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한숨을 뱉은 뒤에야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황비는 당황을 넘어서 당혹스러움에 연신 입술만 뻐끔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곧 죽을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던 시녀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황비의 힘이 황제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들이었다.

그러니 황제에게 버림받은 황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 지경, 이 꼴이 된 게……. 다, 너 때문이었어. 네 그 잘난 바람기 때문에.”

이전과는 확 달라진 태도로 시녀가 황비에게 따져 물었다.

“아, 아니야…….”

황비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하녀가 그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어떡할 거야? 당신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내 가족들 전부 죽게 생겼어!”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진짜 왜, 왜들 이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황비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좁은 감옥 안에 달아날 곳은 없었다.

“이, 이거 하극상이야, 알아?”

황비가 마지막으로 외쳤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시녀가 황비의 머리채를 낚아채 휘감고 잡아당겼다.

곧이어 다른 시녀들도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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