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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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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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함정
2023.08.04.
세이렌 후작은 서둘러 봄 축제 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상황을 보고받았다.
“다수의 인질을 데리고 예배당을 점거한 상황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뭐라고 하던가?
“항해를 떠나기에 충분한 물자와 상당량의 금괴를 요구했습니다.”
“……그 외에는?”
“인근 해역으로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추적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인질 몇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과연 해적다운 요구였다. 하지만 세이렌 후작으로선 그들의 뜻에 따를 이유가 없었다.
“예배당의 내부 지도를 봐야겠군.”
“예. 찾아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부단장이 종기사에게 예배당의 내부 지도를 찾아오라 지시를 내렸다.
“예배당 안의 인질과 해적은 총 몇이나 되나?”
세이렌 후작은 서둘러 안전하게 인질을 구하면서도 해적 잔당을 처리할 방법을 모색했다. 함께 온 기사들은 세이렌 후작의 지시에 맞춰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
세이렌 후작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서둘렀다.
“허튼수작을 부리거든, 이 안의 인질들은 모조리 죽을 거다!”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인질과 인질을 위협하는 해적의 모습이 깨진 예배당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일단 진정하게. 요구한 물자와 많은 양의 금괴를 당장 구하기는 어려울 걸세. 이곳에 사는 귀족 모두의 금고를 탈탈 털지 않고서는.”
세이렌 후작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해적은 수염이 덥수룩한 입매를 히죽 끌어 올리며 킬킬거렸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먼. 그렇지 않아도 이 일대 귀족들에겐 아주 유감이 많거든. 그들의 금고를 전부 털어 온다면 더욱 좋지.”
세이렌 후작은 해적의 말 상대를 하며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간간이 부단장에게 일의 진척 상황에 대해 보고를 들었다.
한동안 대치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물자 준비에 상당히 시간이 걸리자, 슬슬 이상하다고 생각한 듯 해적이 외쳤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지?”
“배에 실을 물자는 거의 준비가 끝났네. 금괴도 일부는 준비가 되었고 다만…….”
성격 급한 해적이 세이렌 후작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헛소리하지 마! 누굴 속이려고? 동태를 확인하러 갔던 내 동료가 금괴 같은 건 보지 못했다고 하던데?”
사실이었다.
해적선 근처에 감시자를 두었을 수도 있었기에, 일단 물자를 옮기는 시늉은 했다.
하지만 많은 양의 금괴는 시늉을 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구하는 게 어려웠다.
세이렌 후작은 잔뜩 흥분해 소리치는 해적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해적이 소리쳤다.
“지금부터 1시간 주겠다. 그 안에 떠날 준비를 하지 못한다면 10분에 한 명씩! 인질들의 머리에 구멍을 내 주지.”
붙잡힌 인질들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도록 하지.”
세이렌 후작은 해적과의 대화를 통해 최대한 시간을 끌며 부단장에게 속삭였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갈 다른 출구는 찾았나?”
“와인 저장고와 육류 숙성고 쪽에 예배당 내부로 향하는 쪽문이 있긴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쪽문으로 진입한 기사들이 순식간에 해적들을 제압하지 못하거든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 불가피할 터.
세이렌 후작은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인질을 교환하는 게 좋겠군.”
부단장이 놀란 눈을 하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세이렌 후작은 그의 대답을 듣는 대신 해적에게 말했다.
“안에 있는 인질 전부를 무사히 내보내 준다고 약속하면 내가 대신 인질이 되어 주지.”
세이렌 후작의 파격적인 제안에 해적들이 술렁였다.
붙잡힌 인질 대다수가 평민이었다. 귀족들이 평민의 목숨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그들도 잘 알 것이었다.
해적들은 얼마간 회의를 거친 뒤에야 대답했다.
“좋다. 이 안의 인질 모두를 세이렌 후작, 당신 한 사람과 교환하도록 하지.”
결국 세이렌 후작을 인질로 붙잡아 두는 것이 더욱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세이렌 후작이 해적들이 있는 예배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해적이 말을 덧붙였다.
“대신 무기는 반입 금지, 손목도 묶는 게 전제 조건이다.”
해적이 가능하겠냐는 눈빛으로 세이렌 후작을 쳐다봤다.
“……후작님.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부단장을 비롯한 주변의 기사들이 모두 세이렌 후작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하지.”
세이렌 후작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종기사에게 건넸다. 그리고 손목을 모아 부단장에게 내밀었다.
“묶어 주게.”
망설이던 부단장은 상사의 명령에 거부하지 못하고 결국, 세이렌 후작의 손목을 묶었다.
그리고 후작은 부단장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인질들이 모두 안전히 빠져나간 다음 신호를 줄 테니, 그때 와인 저장고의 쪽문으로 기사들을 진입시키게.”
그때 등 뒤에서 해적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리 소곤거리는 거지?”
세이렌 후작은 부단장에게 자신을 믿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혼자 해적들 틈에 있어야 할 그가 걱정되었는지 부단장이 옅게 한숨을 내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렌 후작은 인질들과 자신을 맞바꿔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인질들이 모두 예배당을 빠져나갔을 즈음 세이렌 후작은 부단장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구석에서 튀어나온 해적 하나가 단검을 들고 세이렌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세이렌 후작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애초에 목적이 이거였나?’
봄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소매치기로부터의 위협도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
“폐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드한의 말에 이카르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파라디움의 황제가 황비와 시녀들을 구금한 뒤 황실 기사단에게 남부로 향하라 명령했다고 합니다.”
이카르는 잘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황제가 대공을 의심하기만 하면 이 일도 드디어 마무리되겠군.”
동의한다는 듯 베인과 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브가 기밀문서를 들고 황제를 찾아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 이카르는 소문을 퍼뜨리기로 한 것 외에도 안전장치를 한 가지 더 준비했다.
그간 황비와 대공이 주고받은 문서 일부를 조작해 대공의 저택에 몰래 숨겨 둔 것이다.
황제가 그토록 총애하던 황비를 가둘 정도면 대공의 저택을 수색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했다.
대공은 부정하겠지만, 버젓한 증거가 있는 마당에 황제가 그의 말을 믿어 줄 리가 없었다.
그럼 결국, 르네브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었다.
이카르는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즈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대로 퇴근하실 생각이십니까?”
드한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는 이카르를 올려다봤다.
“그래.”
재킷을 챙겨 입으며 이카르는 무심히 대답했다. 베인이 고양잇과 동물처럼 느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세이렌 후작 영애께 증인들은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의 정시 퇴근의 이유를 르네브에게 가기 위함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무서운 속도로 해야 할 업무를 처리하고 칼같이 퇴근하는 이카르를 보며 베인과 드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랑의 힘은 역시 위대하다면서.
평소 이카르는 하루 동안 처리할 적정선의 일 따윈 정해 두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많은 일을 닥치는 대로 해 두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일에 매진해도 날이면 날마다 바슈케르 제국 전역에서 날아드는 서류가 한 뭉텅이였다.
르네브가 바슈케르에 돌아오지 않는 한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이카르에겐 이게 최선이었다.
“아니, 오늘은 파라디움의 남부로 가 봐야겠다.”
이카르는 짧게 한마디 하고는 집무실을 나서려 했다.
“폐하, 남부라 하시면…….”
“세이렌 후작에게 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베인은 물론이고, 드한까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
“꼭 직접 가셔야만 직성이 풀리시겠습니까?”
드물게도 드한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이카르는 말없이 무감하게 드한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드한의 어깨가 움찔 떨렸으나, 물러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이 상황을 관망하던 베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드한과 이카르 사이에 끼어들었다.
“폐하.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이카르는 제 앞을 막고 선 드한과 베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불편한 심기가 표정에 드러났는지 드한이 슬쩍 말을 얹었다.
“정 가셔야겠다면, 기사들이라도 몇 데리고 가시지요.”
“비켜.”
절대 못 간다고, 가려거든 자신들을 짓밟고 가라며 바짓가랑이라도 붙들 것 같던 드한과 베인이었다.
하지만 이카르가 미간을 팍 찌푸리자 옆으로 사삭 비켜섰다.
집무실을 나서기 전 이카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덧붙였다.
“봄 축제가 끝나는 대로 바로 돌아올 거다. ……그리고 내 몸은 누구보다 내가 살뜰히 챙길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워.”
드한과 베인은 집무실을 벗어나 빠르게 멀어지는 이카르의 너른 등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서로 시선을 맞췄다.
용병 시절 온 대륙을 떠돌아다녀 본 결과 전 대륙 어디서도 이카르 이상의 강자는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분명 그를 돕는 신이 있다고 믿을 정도로 언제나 운이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전장에선 언제 불의의 사고가 생길지 모르니.
이카르가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드한은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베인이 드한의 엉덩이를 찰싹 내려쳤다. 근육질 엉덩이에서 제법 찰진 소리가 울렸다.
“……!”
깜짝 놀란 드한이 펄쩍 튀어 올랐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베인을 노려봤다.
……이게, 정녕 미친 건가?
드한의 머릿속 외침이 여과 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베인, 너 미쳤냐?”
“마저 일이나 하자고. 게다가…… 폐하께서도 이제는 혼자의 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실 테니.”
그러니 예전처럼 무턱대고 위험에 노출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
르네브는 꿈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파라디움의 황후로 살다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말이다.
하지만 묘하게 구체적이고 앞뒤가 딱 들어맞는 내용이라 이카르는 그 이야기를 도저히 꿈이라며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본래 이카르는 직접 보지 못한 것들은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르네브가 그때 가족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르네브의 개인사였기에 드한과 베인에게까지 상세한 설명을 덧붙일 순 없었다.
하지만 이카르는 어떻게든 세이렌 후작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러지 않으면 르네브의 마음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그것이 지금 이카르가 위험을 무릅쓰고 파라디움 남부로 향하는 이유의 전부였다.
남부의 해안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짙게 깔린 어둠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말의 속도를 늦추는 일은 없었다.
“이곳이겠군. 암살자들이 결전을 준비 중인 곳이.”
이카르는 깎아 놓은 듯 높은 절벽 위에서 빛을 환하게 밝혀 둔 봄 축제 거리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