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봄 축제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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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봄 축제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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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봄 축제의 끝
2023.08.03.
“직접 걸을 수 있으니 이 손 좀 놔주겠어?”
에시카는 턱 끝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기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팔을 억세게 붙잡고 있는 기사의 손아귀 힘은 여전했다.
그뿐인가.
에시카의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 것처럼 대꾸조차 없었다.
“…….”
무례하기 짝이 없는 기사의 태도에 에시카는 혀를 차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것들이…….’
마구간에서 빌린 말을 타고 황궁을 빠져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성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경비병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것도 운이 좋았고.
하지만 무사히 황궁을 벗어난 그녀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크로프트 남작 저로 돌아갈까 생각했으나, 이내 마음을 바꿨다.
자신을 양녀로 받아들여 준 크로프트 남작 가에 폐를 끼치게 될 것을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크로프트 남작 가에서 에시카를 받아들인 이유는 가문의 번영을 위함이었다. 그녀가 더욱 나은 가문의 남자와 결혼해 그들에게 보탬이 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이상 자신을 거둬 줄 리 없었다.
오히려 여기 당신들이 찾는 여자가 있다며 황실에 고발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게다가 황실에서 그녀를 잡아 가둘 작정이라면 크로프트 남작 가에도 곧 기사들이 찾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에시카는 며칠간 거리를 떠돌며 부랑자처럼 지냈다.
그러던 중 묘한 소문을 주워듣게 되었다.
‘대공과 황비가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하는구먼.’
역모란 관련된 자들은 물론이고, 그 3대를 멸할 만큼의 대역죄였다.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도 루시우스가 황제로 등극한 뒤에 대공과 황비가 제법 가깝게 지내긴 했지.’
물론 1황자와 2황자가 모두 살아 있는 현 상황과 원작은 틀어진 지 오래였지만, 원작대로 흘러가는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 외에도 의아한 소문이 돌았다.
‘황제 폐하께서 남부로 해적 토벌을 떠난 세이렌 후작의 암살 명령을 내렸다던데?’
에시카는 처음 이 소문을 접했을 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길거리에서 떠들 만큼 황제의 비밀스러운 계획이 탄로 날 리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거리를 떠돌던 중 괴한들에게 큰일을 당할 뻔한 뒤로, 개죽음을 당할 바엔 황궁에 있는 루시우스의 곁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에시카는 제 발로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다.
빤히 붙잡히게 될 걸 알면서도.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거야?’
한참 길고 좁은 복도를 걷는데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왔다.
자연히 에시카의 고개가 냄새에 이끌리듯 움직였다.
황궁 고용인이 누군가의 식사를 챙겨 온 것 같았다. 에시카가 잠시 그쪽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였다.
“네가 있을 곳은 여기다.”
열린 문 속으로 우악스럽게 그녀를 밀어 넣는 손길에 에시카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기사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문을 닫고 떠나 버렸다.
에시카가 무례한 기사를 향한 막 욕지거리를 퍼부으려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탁.
들려온 소리에 에시카는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소리지?’
이번에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러시면 정말 고, 곤란합니다.”
“내가 이곳을 나가기만 한다면 정확히 지금 받은 것에 10배, 아니 그 이상의 사례를 하지.”
확실하지는 않았으나, 루시우스의 목소리 같았다. 에시카는 말소리가 들려온 방향 쪽의 벽면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빨리 말씀하시지요.”
“내 수하를 이곳으로 데려와 주었으면 해.”
“죄송합니다만, 감시가 워낙 철저한 터라 그건 제가 해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그대가 내 수하에게 말을 전하는 건?”
말 대신 행동으로 상호 의사소통을 한 듯했다. 에시카는 숨죽이고 다음 대화에 집중했다.
“한 가지만 더 묻지. 방금 나 말고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또 있는 것 같던데?”
“황자 전하의 지시로 황궁에서 머물고 계시던 귀족 가문의 아가씨께서 붙잡혀 들어오셨다 들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탁,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곧 타박타박 발소리가 멀어졌다.
에시카는 커다란 문에 작게 난 문을 열고 말했다.
“거기 계신 분이…… 루시우스 황자 전하 맞으신가요?”
“에시카? 그대인가?”
“네.”
루시우스는 그녀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정황을 물었다. 하지만 에시카는 며칠 전 기사들에게 붙들려 가는 루시우스의 모습을 보고 저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서 도망쳤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구태여 각색을 보태 이곳까지 오게 된 상황을 루시우스에게 설명했다.
“그렇다면 영애는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겠군?”
다행히 루시우스도 그런 것보다는 외부 상황이 더 궁금한 듯했다.
에시카는 거리에서 들었던 소문을 이야기했다.
대공과 황비의 역모, 그리고 세이렌 후작 암살 계획의 배후로 황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까지.
“하…….”
루시우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정말 어이가 없군.”
상황을 좀처럼 믿기 어려워하는 루시우스를 위해 에시카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었다.
“헛소문일 거예요.”
“그리 말하는 까닭은?”
“먼저 황제 폐하께서 정말로 세이렌 후작의 암살을 계획하고 계셨던 거라면, 거리에 소문이 나돌 리가 없죠. 대공과 황비 전하의 역모도 같은 이치일 거예요.”
“…….”
“황비 전하를 모함하기 위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유언비어일 테죠.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도 곧 증거가 없다는 걸 확인하시고 황자 전하를 풀어 주실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녀조차 이 일의 미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간의 신통방통한 예언 덕분인지 루시우스도 에시카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됐어. 이제 내 말대로 상황이 돌아가기만 하면 돼.’
***
세이렌 후작에게서 답변이 돌아왔다.
조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문장만 짧게 적혀 있었다.
이전에 르네브와 패트릭과 함께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불쑥불쑥 불안이 올라왔다.
하지만 르네브는 좋지 않은 생각을 빠르게 밀어냈다.
그리고 세이렌 후작을 믿기로 했다.
그는 누가 뭐래도 파라디움 제국 제일가는 기사였다.
그녀가 걱정하든 하지 않든 그가 굳건히 파라디움의 서부를 지킨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르네브는 다 읽은 세이렌 후작의 편지를 서랍에 소중히 보관했다.
그리고 막 돌아서려는데 집사가 말했다.
“아가씨. 전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야?”
“세이렌 후작 저 매입에 관심을 보이는 분이 있었습니다.”
규모가 작지 않은 만큼 거금을 들여 저택을 사들이겠다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아직 기뻐하기는 일렀다.
가격 부분이나 세이렌 후작 저에서 일하던 고용인에 관한 문제로 협의해야 했으니까.
“부가적인 이쪽의 조건은 잘 전달했고?”
“그렇습니다. 이쪽에서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애초에 아가씨께서 제시한 것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제시했습니다.”
“……얼마나?”
르네브는 세이렌 후작 저의 구매 희망자가 제시한 액수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인근 저택 시세보다 높은 금액으로 내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웃돈을 더 얹어 주겠다니?
‘수집가인가?’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큰 금액이 오가는 만큼 물정에 둔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니.
예술품처럼 의미 있는 저택을 수집하는 귀족은 많았다. 이전에 누가 살고 있었느냐에 따라 추후 저택의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이 저택이 세이렌 후작의 소유였다는 것 외에도 이제 곧 바슈케르의 황후가 될 그녀가 살던 저택이므로 프리미엄이 얹어지는 건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조건이 너무 좋을 때는 의심을 해 보는 편이 옳다.
“저택을 구매하겠다는 분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을까?”
“아가씨께서 뵙자고 하셨다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인 집사가 응접실을 나가자 뒤이어 앰버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대공께서 가택 연금에 들어갔데요.”
다른 황자들에게 계승 서열이 밀린 상황이라지만, 대공 역시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내 말을 믿기 시작했구나.’
르네브는 서둘러 이 소식을 이카르에게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
해적들이 뭍으로 올라와 전투를 치른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이었다.
하지만 벌써 그런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남부 지역의 번화가에는 봄 축제가 한창이었다.
세이렌 후작은 높은 망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늘로 봄 축제도 끝나는가 보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것이었으나, 부단장이 알아듣고는 대답했다.
“참여하기도 전에 축제가 끝나 버려서 아쉬우신 모양입니다.”
봄 축제의 끝은 르네브가 예고한 위험에서 벗어날 날의 종료를 의미했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부단장은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렇게 보였나?”
“사실 제가 아쉽습니다. 해적 토벌이 빨리 끝나거든 한 번쯤 들러서 봄 축제를 구경해 볼 생각이었거든요.”
“자네도 유흥을 즐길 때가 다 있고, 별일이군.”
“……아무것도 없는 서부와 달리 이곳은 풍요롭지 않습니까. 그래서 조금 궁금했을 뿐입니다.”
부단장의 말에 세이렌 후작은 생각이 많아졌다.
바다와 인접한 남부는 확실히 풍요로웠다.
그렇다고 거리에 부랑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평민들의 차림새만 보아도 남부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이유에는 다른 대륙과의 교역이 유리한 점 외에도 서부보다 땅이 비옥하다는 것을 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남부 일대를 관리하는 귀족들의 영향도 컸다.
과거 황제가 자신의 연인을 황비로 들이려 할 때, 그들도 처음에는 황비를 들이겠다는 황제의 의견을 반대했다.
하지만 황비가 그들과의 친목을 원하자마자 남부 귀족들은 곧바로 태세 전환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지금은 황비의 가장 큰 세력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그 덕을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반면 세이렌 후작은 황후, 황비 그 어느 쪽의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올곧게 황제에게만 충성했다.
그 결과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르네브가 편지로 위험을 알린 뒤로 세이렌 후작은 자신을 해하려는 세력을 추측해 보았다.
자신이 사라짐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볼 자가 누구일지.
오래 생각지 않아 답은 금방 나왔다.
‘황제.’
전부터 황제 쪽에서 서부의 군사력을 와해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다.
병사들은 세이렌 후작령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고, 세이렌 후작령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키워졌다.
황실의 큰 도움 없이 자력으로 생존한 군대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위험할 때는 내버려 두고선 르네브와 바슈케르 황제의 약혼이 성사되자마자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황제의 태도에 세이렌 후작도 이제는 넌덜머리가 났다.
입안이 썼다. 세이렌 후작은 봄 축제가 한창인 거리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조용히 물었다.
“그보다, 병력 안에 수상한 인물은 찾았는가?”
“못 보던 인물 몇이 병영 내에 섞여 들어와 있긴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달려와 외쳤다.
“큰일입니다! 봄 축제에 숨어든 해적의 잔당들이 인질극을 펼치고 있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