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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두 가지 안전장치 (124/148)


#124화 두 가지 안전장치
2023.08.02.


황후는 지하 감옥을 나서며 크산테 후작 부인에게 물었다.

“저 안에 지금 누가 없는 건가?”

“앤드니 자작 부인 다음으로 시녀장이 되었다던 밀레 자작 부인이 없던 것 같았습니다.”

크산테 후작 부인의 대답에 황후는 이제 기억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아, 휴가를 낸 뒤로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고 있다던 그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하필 이런 시기에 휴가를 내서 화를 면하다니.”

정말이지 운이 좋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흐름을 읽고 의도적으로 황비 곁을 떠났거나.

물론 곧 잡혀 들어가겠지만.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니었나.’

황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멈추고 아직 낮임에도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안을 돌아보았다.

‘황비, 자네도 이젠 늙은 모양이야.’

세월에 무뎌진 탓일까? 그래서였을까?

자네가 감당하지 못할 상대를 적으로 두게 된 건.

황후는 황궁에 들어온 뒤로 곁에 두어야 할 사람과 그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별해 내는 눈을 길렀다.

이는 전쟁터 같은 황궁 안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곁에 둘 사람을 잘못 골랐다가는 황후 자신 또한 그 구설에 휘말려 체면과 명성이 깎일 수 있었다.

나아가서는 목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적을 둘 때도 같은 이치가 적용되었다.

감당할 수 있는 상대이냐 아니냐에 따라 빠르고 정확한 대처가 필요했다.

올라오기 전에 짓밟아 죽일 것이냐, 아군으로 만들 것이냐, 두 가지로 좁혀졌다.

그리고 황후에게 있어 황비는 감당하기 버거운 쪽이었다.

그녀에겐 책사 역을 톡톡히 하는 앤드니 백작 부인이라는 충성스러운 시녀가 있었고, 무엇보다 파라디움 제국의 최고 결정권자인 황제를 좌지우지할 능력이 있었다.

아군으로 두어야 할 상대라는 뜻이다.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잘 알지만, 동시에 황비는 절대 공존이 불가한 상대이기도 했다.

황후에게 황비란 그런 존재였다.

제 아들을 황위에 올리지 못하면 죽는 건 황후, 저 자신이 될 테니까.

걸음을 멈춘 채로 지하 감옥을 내려다보는 황후를 보며 크산테 후작 부인이 물었다.

“황후 폐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이만 가지.”

황후는 고개를 내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가로질러 황궁에 도달했을 즈음 황후는 다시 입을 열었다.

“크산테 후작 부인.”

“예, 황후 폐하.”

“자네는 황비의 패착 원인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상대를 잘못 만난 것이 아닐까요? 세이렌 후작 영애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노련하고, 영민하니까요.”
크산테 후작 부인이 잠시 입을 닫았다가 작게 덧붙였다.

“그런 사람이 앞으로 적국의 황후가 된다는 사실에 걱정이 앞서네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의 말에 동의하네. 하지만 황비의 패착 원인은 상대와 자신의 격차를 파악하지 못한 게 크다고 생각하네.”

“격차라 하시면…… 황후 폐하께서는 세이렌 후작 영애가 황비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시는가 봅니다?”

황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황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하늘을 올려다봤다.

“만물의 모든 것은 상승기와 하락기를 맞는다 하지 않던가.”

“그럼 이제 황비 전하는 하락기에 접어든 것이겠군요.”

크산테 후작 부인의 대답에 황후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락기에 접어든 건 비단 황비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영광이 무색하게도 현재 파라디움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장 변화에 민감하지 않은 이들만 모를 뿐.

제국의 흥망성쇠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 지리적 우위나, 기근과 같이 통제하기 어려운 운의 영역까지.

그중 황후는 제국의 수장, 황제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파라디움의 황제는 젊을 때의 패기와 총명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반면, 바슈케르의 황제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그러니 오래지 않아 바슈케르와 파라디움 국력의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새로운 황제가 필요한 시점이지.’

파라디움 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제 아들이 짊어질 무게를 생각하면 황비의 몰락에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씁쓸하게 파라디움 황궁을 눈으로 쓱 훑어본 황후는 이내 황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가씨, 저 왔어요!”

앰버가 응접실로 들어오며 힘차게 외쳤다. 르네브는 읽던 책을 덮고는 앰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와.”

르네브는 번화가에 가서 사람들 반응을 살피느라 고생했을 앰버를 위해 차를 준비해 주려 했다.

그러자 앰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가씨. 제가 따라 마실게요.”

어릴 때부터 함께 했다고는 하나 르네브는 귀족이었고, 앰버는 평민 신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황후가 될 그녀가 직접 차를 준비해 주려는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 기쁜 모양이었다.

앰버가 생글생글 웃으며 직접 차를 내려 마셨다.

르네브는 긴 외출로 속이 비었을 앰버의 앞에 디저트 접시를 놓아 주었다.

“아가씨는 진짜 너무 상냥하시다니까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앰버가 감격한 얼굴로 블랑망제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이내 앰버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흐물거렸다.

그러나 밖에서 듣고 온 이야기를 하는 게 우선이라는 듯 얼른 차로 입안을 헹궜다.

“정말 신기할 따름이에요. 이대로라면 며칠 내로 온 제국 안에 소문이 돌겠던데요.”

“그래?”

르네브의 예상보다 더 용병들이 제 몫을 잘해 준 모양이었다.

‘이카르의 말대로 되었네.’

르네브는 파라디움의 황제에게 직접 기밀문서를 보여 주러 가기 전 앰버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을 맡길 용병을 구해 달라고.

그리고 앰버를 통해 용병들에게 가능한 한 널리 소문을 퍼뜨려 달라는 의뢰를 맡겼다.

이는 르네브가 구상한 계획에 이카르의 의견이 더해진 것이었다.

‘여태까지 황제의 성향으로 봤을 때 기밀문서 이야기를 꺼낸 자리에서 영애를 해치지는 못할 거야. 바슈케르와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지. 하지만…….’

이카르의 그 말엔 르네브도 동의했다.

르네브를 죽이거나, 가둔다면 바슈케르에게 전쟁의 명분을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세이렌 후작의 암살 계획을 알게 된 뒤 이카르는 세이렌 후작 저에 바슈케르의 기사들을 배치해 두었다.

갑자기 늘어난 기사의 수를 누군가는 수상히 여길 수 있었으므로 이카르는 그들에게 저택의 고용인처럼 위장을 지시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질 않았는지 이카르가 다른 제안을 해왔다.

‘……황궁에 가기 전 가능한 안전장치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두는 편이 좋을 듯싶은데. 영애의 생각은 어떻지?’

‘안전장치라 하시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요?’

‘예를 들면 파라디움 서부의 수호자이자 영웅인 세이렌 후작. 그를 황제가 비밀리에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거야.’

르네브는 곧바로 이카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여론전을 하자는 거구나.’

개개인의 힘은 미약하나, 뭉치면 그 힘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걸 이카르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파라디움 제국민들은 세이렌 후작을 존경했다.

황제에게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안타까워하는 여론이 절대다수일 만큼이나.

그런 그를 황제가 은밀히 제거하려 한다.

이 사실이 퍼지면 황제를 향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전쟁 시 병사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없어선 안 될 존재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뒤 그들에게 황제가 적절한 보상을 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전시 상황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라 치더라도 세이렌 후작은 파라디움 제국민의 안전을 위해 해적들과 싸우고 있다.

황제의 명으로 남부에 간 세이렌 후작이 공을 세우고도 죽임을 당한다면 과연 누가 황제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는가.

대가 없는 충성은 없는 법이다.

확실히 이카르의 제안은 여러 면에서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단기간에 소문을, 그것도 황제와 관련된 기밀 정보를 널리 퍼뜨리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르네브의 물음에 이카르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런 종류의 일이 용병들에겐 아주 쉬워. 영애가 황궁에 가서 황제를 만나고 나올 때쯤이면 이미 거리에 소문이 쫙 퍼져 있을 거야.’

르네브는 그때를 떠올리며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이카르의 말대로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런데 아가씨.”

어느새 접시 위의 블랑망제를 남김없이 먹어 치운 앰버가 입가를 쓱 닦으며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소문의 출처를 찾는다거나 하진 않겠죠?”

“굳이?”

“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며 불시에 잡아들이고는 하잖아요.”

앰버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황족의 일을 함부로 거론하다 붙잡혀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문의 출처를 찾을 필요는 없어.”

“왜요?”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을 찾자면 나밖에 없으니까.”

“아…….”

앰버가 탄식하며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곧 미간을 모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더 위험한 거 아닌가요?”

“황제 쪽에서도 내가 이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걸 알 거야.”

앰버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아가씨.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파라디움의 황제는 이 모든 게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한 바슈케르의 계략이라 생각할 거야.”

“계략이요?”

“응. 나는 대외적으로 바슈케르 황제의 연인으로 알려졌지. 하지만 파라디움의 황제는 그 말을 믿지 않을 가능성이 커.”

“…….”

“사랑 하나만으로 정혼자를 정하는 황제란 없다고 생각하겠지.”

황제 본인이 사랑하는 연인 대신 힘 있는 가문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던 것처럼.

그러니 황제는 지금쯤 르네브를 살려 둠으로써 이카르의 계획에 걸려들지 않았다며 자화자찬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르네브도 당당하게 기밀문서를 들고 황궁에 쳐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고.

‘그나저나, 이카르가 내 편이라 정말 다행이야.’

르네브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엔 그저 이카르가 르네브 그녀의 안전을 위해 그런 소문을 퍼뜨리자는 의견을 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속에도 이카르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황제가 세이렌 후작을 암살하려는 배후라는 소문이 돌게 된다면.

이는 나중에 세이렌 후작이 바슈케르로 망명할 때 엄청난 이점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충성을 다했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황제를 온 맘을 다해 모시는 쪽이야말로 멍청한 거니까.

그러니 그 누구도 세이렌 후작이 바슈케르로 망명을 한다는 뜻을 내비쳤을 때 자국을 버린 배반자라며 손가락질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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