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직감 (123/148)


#123화 직감
2023.08.01.


늦은 밤이라서일까?

마구간 근처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다.’

에시카는 살금살금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말 몇 마리가 에시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시카는 황급히 검지를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혹여나 낯선 이를 보고 소리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쉬이…… 착하지?”

딱히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는지 말들이 에시카를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에시카는 마구간 내부를 둘러봤다.

짐승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났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에시카는 제게 관심을 보이는 말들을 쭉 훑어보다 가장 크기가 작고 순해 보이는 말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먹을 걸 줘야 친해질 수 있으니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말의 호감을 살 만한 먹이는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북이 쌓인 건초 더미에서 일부를 퍼다 작은 말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작고 온순해 보이는 말이 에시카를 흘낏 쳐다보더니 이내 그녀의 손에 들린 건초를 받아먹었다.

“옳지. 착하다.”

그렇게 얼마간 에시카는 작은 말에게 먹이를 제공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작은 말이 그녀에게 경계를 풀었다고 생각되었을 즈음이 돼서야 말고삐를 당겼다.

“너, 나랑 좀 가야겠다.”

대답이라도 하듯 작은 말이 작게 투레질을 했다.

***

루시우스는 낮인지 밤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도 없는 사면이 막힌 방에 갇혀 있었다.

방 안에는 침대와 테이블 그리고 깨끗한 욕실이 딸려 있었다. 하루 세 번 식사도 나왔다.

황자로서의 생활에 비하면 형편없었지만, 불평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언제까지 여기 가둬 둘 작정이지?’

내게 이러는 이유를 속 시원하게 말해 보라며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 생활로 인해 좋은 것도 있었다. 바로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르네브와 바슈케르 황제의 약혼 소식을 들은 뒤로 루시우스는 술로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 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밤낮이 바뀌어 생활 패턴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빈속에 술을 들이붓다시피 하니 항상 위가 따끔거렸다.

전처럼 활발한 사교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 틀어진 일상을 바로잡기 위한 황제의 강경한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새 옷을 가져다주는 이도, 시간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는 이도 루시우스의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정신 못 차리는 아들을 위한 방법이라기엔 다소 과격한 감이 있었다.

‘대체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루시우스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할 때였다.

복도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새 옷과 식사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이내 작게 난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가느다란 손목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루시우스는 날렵하게 그쪽으로 다가가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앗!”

작게 난 문 사이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루시우스는 손목을 단단히 붙든 채 제 셔츠 단추를 거칠게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의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갇혀 있는 신세라고는 하나 셔츠에 달린 단추들은 보석이었다. 식사를 챙겨다 주는 이 또한 황궁의 고용인일 터.

“언제쯤 폐하를 뵐 수 있지? 이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대답을 망설이는 것 같던 상대가 이내 작게 속삭였다.

“다른 분들의 심문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역시 금은보화 앞에 장사는 없었다.

“……심문이라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

상대의 알쏭달쏭한 말에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였다.

상대가 루시우스의 손목을 탁 내리쳤다. 반사적으로 상대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루시우스의 손아귀에 힘이 살짝 풀어졌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쪽에서 루시우스에게 붙잡힌 손목을 빼냈다.

곧 작게 난 문이 탁, 닫혔다.

루시우스는 따끈한 스튜와 빵은 내버려 둔 채로 다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작게 읊조렸다.

“심문이라…… 대체 무엇에 관해? 누구에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루시우스는 작게 난 문을 힐끔 보며 생각했다.

‘일단 이곳까지 수하를 불러들일 수 있도록 잘 구슬려 봐야겠어.’

셔츠의 단추는 아까 준 것 외에도 더 있으니.

***

시녀 한 명이 끌려갔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해. 그보다…….”

황비가 투옥된 감옥과 멀지 않은 곳으로 끌려간 건지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그녀는 꼿꼿했다.

차디찬 맨바닥에서 잠을 자도, 메마른 빵으로 배를 채워도 자신이 귀족이라는 존귀함을 잃지 않은 듯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울부짖으며 애원했다.

“진짜라고! 아니, 진짜라니까요? 나, 난 아무것도 모른다니……!”

날카로운 비명이 적막한 지하 감옥을 가득 채웠다.

아직 불려 가지 않은 시녀 하나가 입술을 달달 떨며 말했다.

“저, 저도 곧 저렇게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게 되는 걸까요?”

그러자 공포에 질린 다른 시녀가 황비의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흔들었다.

“화, 황제 폐하를 한 번만 만나면, 황비 전하께서 얼굴 뵙고 말씀드리면, 일이 전부 원만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 그렇죠? 어떻게 안 될까요?”

황비는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녀들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자신조차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그녀들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식사를 가져다주는 이에게 수차례 황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조용히 언질을 주었으나, 반복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이는 모두 황제 폐하의 뜻입니다.’

황비는 여전히 제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흔들어 대는 시녀를 툭 밀어내고는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단서라도 알아야 대책을 세울 텐데…….’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유를 알지 못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때 발소리가 울렸다.

“여기인가?”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예, 황후 폐하.”

어슴푸레 지하 감옥 안을 비추고 있는 불빛 아래에 서 있는 건 황후였다.

“한 명이 비는 것 같은데?”

황후가 감옥 안의 사람 수를 세어 보며 말했다.

황비는 직감했다.

자신을 이 더러운 시궁창에 처박아 놓은 사람이 바로 황후라는 것을.

황비는 비틀린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한껏 비아냥거렸다.

“하아? 황후 폐하처럼 귀한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어인 일이신지?”

그러자 철창 너머로 황후의 붉은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 찾아와 봤다만…….”

쯧쯧 혀를 찬 황후가 말을 이었다.

“……며칠 사이 많이 야위었네.”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는 시선이 퍽 가증스러웠다.

“저를 이곳에 가두도록 종용하신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만?”

“가두다니? 그대를? ……내가 말인가?”

황후가 과장 되게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시치미를 떼시겠다?’

황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입매를 삐뚜름히 비틀어 올렸다.

“제게 남편을 빼앗긴 것이 그리도 억울하셨습니까?”

“빼앗겨? 아닐세. 황비. 그대가 잘못 알고 있네.”

황후가 느리게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말했다.

“파라디움 제국인 이라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회피하시려는 겁니까?”

“황비.”

“…….”

“남편을 왜 남편이라 칭하는지 아는가?”

황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내 시녀들이 우스갯소리로 그러더군. 남의 편이라서 남편이라 부른다고. 원래 내 것이 아닌데 빼앗길 것이 어디 있겠어.”

말문이 막힌 황비는 가늘어진 눈으로 황후를 노려보다 말을 내뱉었다.

“아하, 이제 알겠습니다. 이미 다 지난 과거 일에 연연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황후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황비를 응시하기만 할 뿐.

“1황자 전하의 독살을 사주한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지요. 아마도 황후 폐하께서는 그것이 저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황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황후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폈다.

상대에게서 감정적 동요를 끌어낸 뒤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황비는 이 기술을 잘 이용하는 편이었다.

‘걸려들었네.’

예상대로 황후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표정 또한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굳어졌다.

“……증거 있으십니까?”

황비는 최대한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의 심기를 살살 건드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그녀가 감정적으로 나올 테니까. 황비는 잔뜩 흥분한 황후에게 쓸 만한 정보를 얻어 낼 작정이었다.

“증거. 그래…… 증거라. 황비, 그대의 말이 옳아.”

“…….”

“증거가 없다면 문제를 제기하지 말아야 하지. 그건 그대가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네.”

……어라?

예상외로 쉽게 제 말에 긍정하는 황후를 보며 황비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얼굴 보았으니 되었네. 나는 이만 가 보겠네.”

그 말을 끝으로 황후가 정말 가 버리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설마…… 정말 이대로 간다고?’

제 처지를 비웃으러 온 거라면 아직 충분치 못할 터였다.

“아, 참…….”

그런 생각을 하는데 황후가 막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럼 그렇지.’

황비는 눈을 빛내며 황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네에게 강한 원한을 품은 분이 계시다네.”

‘내게 원한을 품은 건 바로 당신이겠지, 황후.’

황비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켰다.

“나는 그분 덕에 손 안 대고 코를 푼 것뿐이고.”

황후가 눈을 반달로 휘어 웃으며 황비를 쳐다봤다.

“……그분이라니요? 또 무슨 수작이십니까?”

황비가 물었지만, 황후는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젓고는 몸을 돌렸다.

곧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황비는 입술을 짓씹은 채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분이라니?’

뜻 모를 말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황후가 너무 얄미워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파라디움 제국 안에서 황후가 그분이라는 존칭을 사용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황제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

그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비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얼마 전 바슈케르 황제의 팔짱을 끼고 황궁에 나타난 세이렌 후작 영애와 황후가 은밀히 시선을 교환했던 그때의 기억이.

이어서, 세이렌 후작 영애가 황녀 대신 바슈케르로 자원하겠다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던 날, 황후와 함께 그레이트 홀로 걸어오던 모습까지.

‘……둘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걸까?’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날의 장면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황비는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직감이 뛰어났다.

그녀가 왠지 모르게 싸한 기분을 느낄 때면 어김없이 그럴 만한 원인이 있었음이 밝혀지곤 했다.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고부터 황비는 제 직감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직감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황후와 세이렌 후작 영애 사이에 긴히 오간 무언가가 있어.’

1690888252874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