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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저마다의 전투 (122/148)


#122화 저마다의 전투
2023.07.31.


황후가 황제의 침실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시종장이 고했다.

“폐하, 황자 전하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자? 내겐 아들이 여럿이니, 황자라하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1황자 전하와 2황자 전하이십니다.”

시종장의 대답에 황제는 그저 허허 웃었다.

“시종장.”

“예, 폐하.”

“부인과 그 애들이 동시에 나를 찾아오는 일이 이전에도 있었던가?”

취기 어린 눈을 깜빡이며 황제가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시종이 대답했다.

“……물론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말입니다.”

황후는 슬쩍 시선을 돌리곤 속으로만 쯧, 혀를 찼다.

‘다음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시종이 눈치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황자 전하들께서 어릴 때는 황제 폐하께서 가끔 책을 읽어 주고는 하셨지요. 곁에는 황후 폐하도 함께 계셨고요.”

그리운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황제의 눈빛에 회한이 어렸다.

마치, 그래. 그럴 때가 있었구나. 내가 두 아들에게는 꽤나 무심했구나 하는 듯한.

바닥의 붉은 카펫을 잠시 내려다보던 황제의 입에서 결국,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들라 하게.”

“예, 폐하.”

그렇게 황후에 이어 1황자와 2황자까지 합류해 황제의 다친 마음을 위로했다.

술에 취한 황제가 침상에 들 때까지 황후와 황자들은 화목한 가족 연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야 황제가 다른 이의 부재를 느끼고 허전해할 틈이 없을 테니까.

금세 잠들어 버린 황제를 두고 침실을 나선 황후는 두 아들에게 고생했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그녀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1황자와 2황자가 각각 제 침실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황후는 생각했다.

세이렌 후작 영애의 조언을 흘려 넘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

해적들이 뭍으로 올라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세이렌 후작은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우와아아아아!

검을 뽑아 든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뭍으로 올라오는 해적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세이렌 후작은 높은 망루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수가 제법 되는군.”

“최근 서로 반목하던 해적들끼리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수하의 말에 세이렌 후작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도 예상한 바였다.

이 근방 해적들은 이전까지 물건을 나르는 상선이나 호화 여객선을 약탈하며 생계를 꾸려 왔다.

귀금속과 같이 값이 나가는 물건들은 다른 대륙에 장물로 팔아넘겼고, 귀족들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다른 대륙과 무역업을 하는 남부 귀족들의 피해가 심심치 않았다.

매해 그런 피해를 입으면서도 해적들을 전부 소탕하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작은 무리로 나뉘어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해군을 투입해 소규모 해적단을 하나 잡아들인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영역을 차지하는 새로운 해적단이 나타났다.

근간이 변하지 않는 이상 뿌리까지 뽑기가 어려웠다.

세이렌 후작은 육지와 조금 떨어진 거리의 바다 위의 해적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하의 말처럼 해적선의 깃발 무늬가 제각각이었다.

이전까지는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던 해적들이 단합하기로 약속이라도 한처럼.

황제의 명으로 세이렌 후작이 남부에 왔다는 소문이 벌써 그들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서로 뭉쳐 일제히 공격에 나선 걸 보면.

“……?”

그때 저를 향한 시선을 느낀 세이렌 후작은 기민하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수많은 군사 중 누가 조금 전까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바로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세이렌 후작은 굳은 얼굴로 재킷 속 편지를 매만졌다.

봄 축제에서는 소매치기를 주의해야 한다던 르네브의 말을 되새기며.

뭍으로 올라온 해적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지 얼마일까.

살아남은 몇몇 해적들이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해적들이 퇴각하려나 봅니다.”

그들이 뭍으로 올라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세이렌 후작은 남부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대륙으로 향하는 무역선과 여객선의 출항을 전면 금지했다.

해적들로선 바다 위의 보급품이 완전히 끊긴 것과 다름없었다.

작은 어선들만 공격하는 것으로는 그들을 배 불릴 수 없을 테니.

해적들은 물과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육지에 정착해야 했는데 세이렌 후작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급품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 다른 대륙으로의 이동은 어리석었다.

바다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말처럼 남부 인근 해적들은 지금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러니 바다 위라는 지리적 우위를 두고 뭍으로 올라온 것일 테고.

세이렌 후작은 해적들이 떠난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외쳤다.

“부상자들을 이송하라.”

***

르네브가 조작된 기밀문서를 들고 황궁으로 찾아간 날 밤의 일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황비는 드레스를 갈아입기 위해 트왈렛 룸으로 향했다.

그때 난데없이 기사들이 황비의 침실로 들이닥쳤다.

“어맛!”

문가에 서 있던 시녀 하나는 침실로 밀고 들어오는 기사와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었고.

“……꺄악!”

또 다른 시녀는 깜짝 놀라 미용수가 담긴 물그릇을 엎질렀다.

고요하던 황비의 침실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돌아오던 황비는 침실 안 상황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죠?”

어금니를 사리문 채로 황비는 기사를 노려봤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시선에도 기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다른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포박하라.”

“예!”

침실 안을 점령하고 있던 기사들은 일제히 황후와 그녀의 시녀들을 제압했다.

시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황비 또한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것…… 놔! 놓으란 말이다!”

그러나 기사들은 힘껏 저항하는 그녀들을 배려 없이 복도로 끌어냈다.

황비는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누구의, 대체 누구의 지시로 내게 이러는 것이냐?”

그러나 기사들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서두를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기사들에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그들을 살필 경향이 없었던 황비는 그제야 이들이 황제의 기사라는 걸 깨달았다.

‘황제……? 황제가 어째서 날…….’

황비는 오늘 낮 황제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그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그가 뜬금없이 예전 일을 입에 올린 건 조금 의아했지만.

‘황비.’

‘네, 폐하.’

‘내 황후가 되어 달란 청혼을 받았을 때의 감상은 어땠지?’

황제의 물음에 황비는 꿈꾸는 소녀처럼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제 생에 다시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답니다.’

‘……그랬군.’

황비의 대답이 만족스러울 법도 한데 황제의 입매는 고집스럽게 꾹 다물려 있었다.

‘……?’

‘그럼 그런 약속을 어기고, 다른 여자를 황후로 맞이했을 때는 어땠지?’

수년간 들인 공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잊을 리가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울컥 분노가 치밀었지만, 황비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마음 아프지만…… 그 또한 폐하의 뜻이며, 폐하의 대업을 위한 일이라면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날 원망하지는 않았고?’

이어진 질문에 그녀는 황제가 오늘 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하지만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세상 모두가 폐하를 저버린대도 저만큼은 폐하의 편으로 남을 것입니다.’

황비는 저 스스로 생각해도 완벽한 정답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의 반응은 이전과 달리 꽤 덤덤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이러나 싶어 황비는 다른 때보다 더욱 극진히 황제를 대했다.

그도 곧 과거의 이야기에 관심을 잃은 듯 황비가 꺼낸 주제에 맞게 대화를 이어 갔다.

황비는 그것을 그저 황제의 변덕이었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 결과가 구금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황비 전하!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

“예, 어찌 된 일인지 말씀 좀 해 보세요.”

시녀들이 이유를 따져 물으며 시끄럽게 굴었지만, 황비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생각하는 데 집중했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붙잡혀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

같은 시각.

대낮부터 술에 취해 겨우 잠이 들었던 루시우스는 어렵게 눈을 떴다.

어쩐지 복도 쪽이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별안간 침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

루시우스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기사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기사가 루시우스의 팔을 잡아챘다.

“나중에 후회할 짓 말아라.”

루시우스는 으르렁거리듯 낮게 경고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루시우스의 경고를 듣지 못한 것처럼, 그를 침실에서 끌어냈다.

“놔라! 직접 걸어가겠다.”

루시우스는 크게 저항하지 않고, 그들의 뜻에 장단을 맞춰 주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

에시카는 루시우스의 침실로 향하던 중 목격한 상황에 깜짝 놀라면서도 반사적으로 커튼 뒤에 몸을 숨겼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황제의 기사들이 루시우스를 끌고 가다니?

에시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현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 황제가 루시우스를 잡아들이려 하는지.

이유는 알지 못했으나, 그녀의 촉이 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어서 이곳에서 도망쳐.’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에시카는 커튼을 젖혔다.

‘일단 침실로 돌아가서…….’

제 침실 쪽으로 몸을 틀었던 에시카는 이내 우뚝 걸음을 멈춰 세운 채로 생각했다.

루시우스가 어떤 이유로 기사의 손에 끌려가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녀가 황궁에 머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침실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곳에 기사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루시우스는 괜찮을까?’

정신없이 달리는 동안 잠깐은 그런 생각을 한 것도 같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제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허억…… 헉…….”

에시카는 턱까지 차오르는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고 또 달렸다.

치렁치렁한 드레스에 다리가 걸려 넘어질 뻔한 것도 여러 번, 높은 구두에 발목까지 접질렸다.

그럼에도 다행히 황궁 후문에 도착하는 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루시우스가 알려 준 황족들이 드나드는 지름길 덕분이었다.

에시카는 그녀가 황궁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마차가 대기하고 있던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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