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뜬소문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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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뜬소문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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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뜬소문의 출처?
2023.07.28.
재판장에서 1황자 암살의 배후가 황비였음을 증언하는 순간 밀레 자작 부인 또한 무사할 수는 없을 터다.
작위와 재산 몰수는 기본이고, 밀레 자작 일가 전체가 황족 암살 시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물론 밀레 자작 부인과 그녀 가문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며 감언이설로 꼬드겨 그녀를 재판장에 세운다면 쉬울 것이나, 르네브는 굳이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밀레 자작 부인 본인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럼 저하고 약속하신 거예요? 제 아이만큼은 안전하게 지켜 주신다고?”
밀레 자작 부인이 간절하게 표정으로 거듭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려 들었다. 르네브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 번 내뱉은 이상, 약속은 반드시 지켜요.”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
아이는 죄가 없으니까.
부모로 인해 아이의 인생까지 저당 잡히는 불상사가 또 있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세이렌 후작 영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대화가 끝나고, 르네브가 마차에 오르려는데 등 뒤에서 밀레 자작 부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르네브는 몸을 돌려세우곤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째서 황비 전하께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밀레 자작 부인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어렵사리 묻은 일을 다시 들춰 파헤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속에서 여러 가지 대답들이 올라왔지만, 르네브는 그저 엷은 미소만 머금은 채로 마차에 올랐다.
***
르네브가 밀레 자작의 별장에서 세이렌 후작 저로 돌아왔을 때, 하늘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르네브는 잠시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여유를 가진 것도 잠시, 초봄이라지만 밤이 되니 제법 공기가 싸늘했다.
‘얼른 들어가야겠다.’
살짝 어깨를 떨며 저택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르네브의 시야에 익숙한 마차가 들어왔다.
‘이카르가 온 건가?’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들뜬 마음으로 르네브는 빠르게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안으로 들어서자 집사가 르네브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녀왔어. 이 앞에 마차가 있던데?”
“예,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가 2층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히 계단을 오르는 르네브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응접실에는 이카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르네브가 드한에게 권했던 소파에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은 채로 편안하게 기대어 있었다.
‘자는 건가?’
소파 헤드에 머리를 누인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이카르를 보자 르네브는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문가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깐 눈을 붙이는 거라면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슬며시 눈을 뜬 이카르가 가늘어진 눈으로 르네브를 응시하며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지?”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르네브는 그제야 이카르에게 주춤주춤 다가갔다.
“잠깐 눈을 붙인 것도 같군. 신기하게도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이 소파도 꽤 편하고.”
맞은편에 앉으려는 르네브에게 이카르가 제 옆자리를 눈짓했다. 잠시 망설이던 르네브는 이내 이카르의 옆으로 걸어갔다.
르네브가 소파에 앉으려 하자 이카르가 낚아채듯 그녀의 허리에 팔을 휘감고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폐하, 오늘따라 더 피곤해 보이세요.”
르네브는 그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맞아. 딱 죽을 맛이거든.”
르네브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카르가 약간 뚱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대가 눈에 보이질 않아서.”
그러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기뻐하는 대형견처럼 르네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끔은 제가 바슈케르로 폐하를 만나러 가는 게 어떨까요?”
이카르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으며 르네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특하군.”
언뜻 아이 취급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대단히 기뻐하는 기색이 읽혔다.
“하지만 위험하니 마음만 받도록 하지. 그런데 오늘은 어딜 다녀온 거지?”
르네브가 좀 더 편안히 품에 안겨 있을 수 있도록 자세를 고치며 이카르가 물었다.
“밀레 자작 부인을 만나고 왔어요.”
“짐마차를 보아하니 번화가에 쇼핑이라도 하고 온 줄 알았는데?”
르네브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카르가 짐마차에 대해 어떻게 알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주무시고 계셨던 게 아니었나 보네요.”
앙큼하게도 깨어 있었으면 자는 척을 한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많이 그대를 봐야 하는데 잠들 수는 없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이카르의 눈빛에 왜인지 명치가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목을 끌어안고는 그의 너른 어깨에 뺨을 비볐다.
이카르가 한숨에 이어 씹어뱉듯 내뱉었다.
“하, 미치겠군……. 정말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의 넓은 흉통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맞닿은 몸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게다가 조금 전에 비하면 그의 목소리에도 묘하게 날이 선 것 같았다.
“……?”
르네브는 얼른 고개를 들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그의 눈매는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고, 입꼬리 또한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싫은 게 아니라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애교가 점점 늘어.”
“그래서…… 싫으세요?”
이카르가 한쪽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르네브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싫을 리가.”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지.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며 이카르가 사선으로 고개를 틀었다.
서서히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르네브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얼굴 마주치기 무섭게 이카르는 한참이나 르네브를 탐했다.
늦은 밤부터 시작된 이카르의 다소 과한 르네브를 향한 사랑은 아침 해가 밝아 올 때까지 멈출 줄을 몰랐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그간에 대한 보상을 전부 받아 내기로 작정한 것처럼.
그렇게 한참 르네브를 탐한 뒤에도 이카르는 그녀를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르네브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그의 품에 꽉 끌어안긴 채로 입을 열었다.
“폐하, 조금 조심스러운 질문이긴 한데……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카르가 느리게 르네브의 허리를 지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물어보라는 듯.
“혹시 파라디움에서 돌고 있는 폐하에 관한 소문을 알고 계시나요?”
“글쎄.”
이카르가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좋은 쪽의 소문은 아니거든요…….”
르네브는 말을 하면서도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행여나 이카르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지.
하지만 그는 여유롭게 피식 웃을 뿐이었다.
“제국의 군주에게 좋은 소문이 따라붙기는 어려운 법이지. 제멋대로의 폭군이라는 소문이라도 돌던가?”
어떤 소문이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이카르의 태도에 르네브는 조금 더 신경이 쓰이는 소문을 깊게 파고들 용기를 얻었다.
물론 단어는 최대한 골랐다.
“폐하께 여자가…… 많다는 소문이에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이카르가 손가락으로 너른 제 가슴께를 가리키며 반문했다.
“내가?”
르네브는 이카르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했다.
‘당황하지 않는 걸 보면 뜬소문에 불과했나.’
그녀가 내심 안도하는 순간 이카르가 어딘가 짚이는 곳이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소문이 그 사실이었어?’
자연히 르네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카르는 성인이고, 용병 생활을 오래 했다고 했으니 여자 경험이 전혀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스킨십이 꽤 능숙하기도 하고,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르네브를 몇 번이나 만족시키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
“질투하는 건 좋지만, 그대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이카르가 잔뜩 찌푸려진 그녀의 미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말을 이었다.
“황제가 되고 난 뒤로 유혹이 없었던 건 아니야.”
그 부분은 르네브도 충분히 이해했다.
거적때기를 걸친 거리의 부랑자였대도 이카르는 매력적이었을 테니까.
그에 더해 황제라는 높은 신분까지 갖추었으니 바슈케르의 귀족 여자들이 그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전부 거절했지.”
르네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카르를 올려다봤다.
“……왜요?”
파라디움이고 바슈케르고 귀족들은 여성이고 남성이고, 외모를 가꾸는데 금화를 아끼지 않았다.
본격적인 사교 시즌이 되면 매끼를 조금의 채소만 먹거나, 맹물만으로 버티며 체중 조절에 힘썼다.
마른 몸을 유지해 드레스 태를 조금이라도 더 좋아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황제인 이카르는 언제나 그들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무릇 황궁 무도회란 귀족들이 최고로 빛나야 하는 자리임에 틀림이 없으니까.
분명 대단한 미모를 가졌을 귀족 여인들의 접근을 전부 거절했다니?
“어째서 전부 거절하신 거예요?”
르네브는 다시 물었다.
이카르가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좁히며 으르렁거렸다.
“영애의 눈에는 내가 아무 여자하고 몸이나 섞는 그런 쓰레기로 보였나?”
‘아……!’
르네브는 순간 제가 대단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소문은 소문일 뿐, 실제 이카르의 정조 관념과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르네브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입장이 아닌가. 악녀라는 소문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
“제 뜻은 그런 게 아니라…….”
르네브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반복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당황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이카르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야 말했다.
“딱히 신경 쓰진 않고 있었지만…… 대충 그런 소문을 누가 퍼뜨렸는지는 알 것도 같군.”
르네브는 입을 꾹 닫은 채로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거절당한 여자 중 몇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거든. 악담을 퍼붓는 경우도 있었고.”
“…….”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를 보는 귀족들이 눈빛이 어딘지 묘해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군.”
그제야 이카르에게 차마 묻지는 못하고 혼자만 품고 있던 의문이 풀렸다.
귀족으로서의 드높은 긍지와 자존심을 지닌 그녀들에게 이카르의 거절이 얼마나 치욕스럽게 느껴졌을지도.
그 대단한 자존심에 흠집을 냈으니, 앙갚음하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
같은 여자로서 그녀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피해자는 이카르였다.
물론 그의 성격상 좋은 말로 그녀들을 거절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죄송해요, 폐하.”
르네브는 냉큼 이카르에게 사과했다.
그녀가 그 소문을 일부 믿었고, 이카르의 앞에서 거론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상처를 준 셈이었다.
“미안한 줄 알면 내게 입 맞춰 봐.”
이카르가 오만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가늘어진 눈으로 르네브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