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협박 아닌 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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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협박 아닌 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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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협박 아닌 회유
2023.07.27.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었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네요.”
세이렌 후작 영애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밀레 자작 부인을 걱정하는 듯도 했으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어딘지 거북했다.
그래서 밀레 자작 부인은 그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이런 외진 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이 근처 양털의 품질이 아주 우수하다고 들었어요. 날이 따뜻해지고 있긴 하지만 서부는 여전히 춥거든요.”
“……?”
“저희 아버지께서도 이제 연세가 드셔서 그런가, 최근 들어 추위를 타시는 것 같아서요.”
밀레 자작 부인은 세이렌 후작 영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세이렌 후작은 이제 막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삼십 대로 보일 만큼 젊어 보였다.
상처하고 한참 혼자 지내는 그에게 눈독 들이는 미망인들이 여럿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가능한 바슈케르로 돌아가기 전에 좋은 품질의 양털로 옷을 지어 드릴까 해요. 혹시 품질 좋은 양털을 판매하는 상인을 알고 계시거든 제게 소개 좀 해 주시겠어요?”
“…….”
“귀부인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양모는 체온을 유지하면서도 땀과 수분을 빠르게 흡수하잖아요. 게다가 습기를 발산하는 기능도 있고…….”
세이렌 후작 영애가 양모의 기능적 우수성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묘하게 빠져 드는 기분이 들었다.
몸에 해로운 독초라도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구매하겠다며 금화를 건넬 것 같달까…….
밀레 자작 부인은 그녀의 언변에 깜빡 넘어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원하는 대답이 맞았는지 그제야 세이렌 후작 영애가 싱긋 웃어 보였다.
‘……이거였나?’
밀레 자작 부인은 세이렌 후작 영애가 어떻게 해서 젊고 잘생긴 바슈케르 황제의 마음을 훔쳤는지 줄곧 궁금했다.
이는 비단 그녀뿐이 아니었다.
황비의 시녀들도, 사교계의 귀부인들도 그러했다.
다들 겉으로는 아닌 척 내숭을 떨었지만, 내심 그 이유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모양인지 두 사람 이상 모였다 하면 어김없이 세이렌 후작 영애의 이름이 거론되곤 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그 궁금증을 한층 부채질한 건 소문만 무성하던 바슈케르의 황제가 파라디움 황궁에 예고 없이 나타난 뒤부터였다.
폭군, 냉혈한, 바람둥이 등등.
3년 전까지만 해도 바슈케르 황제를 둘러싼 소문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심지어는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래서 다들 그의 엉덩이가 가볍고 얼굴값, 신분값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남자를 세이렌 후작 영애가 결혼 약속으로 묶어 두었으니, 사교계 호사가들의 관심을 끄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체 어떤 대단한 매혹술을 가졌기에, 바슈케르 황제를 결혼으로의 정착을 유도했는지.
밀레 자작 부인은 세이렌 후작 영애의 그린 듯 화사한 미소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왜 바슈케르의 황제가 그녀를 선택했는지를.
여자인 밀레 자작 부인의 눈에도 세이렌 후작 영애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잠시 넋을 잃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만큼이나. 물론 그에 못지않게 화술도 뛰어났고 말이다.
“밀레 자작 부인? 괜찮으세요?”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실례했습니다. 영애.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곧 도움을 드릴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밀레 자작 부인은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유모에게 최고급 양모를 판매하는 상인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마님. 금방 다녀올게요.”
손님에게 내줄 차를 준비하던 유모가 냉큼 별장을 나설 채비를 했다.
***
르네브는 운송비와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은 파격적인 가격에 우수한 품질의 양모를 구매할 수 있었다.
자연히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갔다.
예고했던 세이렌 후작의 옷을 만들 양모 외에도 그녀는 패트릭과 이카르의 몫도 샀다.
앰버와 키어넨, 그리고 드한과 베인의 몫은 덤이었다.
“……더 필요하시진 않으시고요?”
대금을 지불하고, 구입한 양모를 짐마차에 실어 나르는 모습까지 보고 나자 밀레 자작 부인이 물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그쯤 되자 밀레 자작 부인도 르네브가 정말 양모를 사러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한 것 같았다.
르네브는 밀레 자작 부인이 저를 향한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고 생각했을 즈음이 돼서야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부인께선 이대로 복직하지 않을 생각이신가요?”
“여, 역시 그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게 맞았군요.”
밀레 자작 부인의 눈초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르네브는 그게 어쨌다는 거냐는 듯 한쪽 눈썹만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밀레 자작 부인이 살짝 불쾌한 내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곧 바슈케르의 황후가 되실 분께서 왜 파라디움의 황궁 사정에 이리도 관심을 두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전에…….”
르네브는 밀레 자작 부인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보고 계신지 밀레 자작 부인의 견해를 들어 보고 싶군요.”
밀레 자작 부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르네브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르네브는 차분히 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폈다.
“황비의 시대는 곧 끝이 날 거예요.”
밀레 자작 부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르네브로서도 사실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꺼내는 건 일종의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밀레 자작 부인이 현명하지 못하다면 황비에게 오늘 일을 알릴 테니까. 물론 그렇게 하도록 가만히 놔두지는 않겠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을 삼가는 밀레 자작 부인의 태도에 힘입어 르네브는 제 견해를 내놓았다.
“권력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늘 시대의 변화를 주목해야 하죠.”
“마치…… 사교계와 권력 집단에 대해 잘 아시는 듯한 말씀이시네요.”
밀레 자작 부인이 곧장 르네브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가 보기에 르네브의 현 사교계 입지는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튀탕트 이후 얼마 뒤 바로 바슈케르로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바슈케르 사교계를 구르며 경험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3년은 퍽 짧다.
황비와의 차이를 두자면 더욱 컸고, 밀레 자작 부인에게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경력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르네브가 권력 집단이나 시대의 흐름에 관해 논하는 게 우습게 보이겠지.
‘어쩔 수 없지…….’
르네브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 하나를 들이밀기로 했다.
“귀부인께서도 알고 있다시피 저는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지요.”
이미 세상 사람 다 아는 그 사실을 굳이 꺼내는 이유가 뭐냐는 듯 밀레 자작 부인이 미간을 모았다.
“……!”
그러나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밀레 자작 부인의 눈이 커졌다.
르네브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을 이었다.
“바슈케르에 아무 연고도, 그렇다고 가문의 뒷배도 없는 제가 과연 어떻게 바슈케르 황제 폐하의 약혼녀가 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사실 말을 하고 있는 르네브 또한 그 이유를 몰랐다.
어째서 이카르가 저에게 분에 넘칠 만큼 과한 사랑을 퍼부어 주는지.
르네브가 구해 주지 않았다면 진즉 죽었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이 이카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라고 치기에는 어딘지 부족한 감이 있었다.
르네브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 생각을 곱씹다 이내 깨달았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카르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싫어하는 것에도 이유가 없듯 좋아하는 것 또한 마땅한 이유를 찾기 어려우니까.
르네브가 짧은 고찰을 하는 동안 생각을 정리한 밀레 자작 부인이 입을 뗐다.
“제,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듯 밀레 자작 부인이 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지금 무엇에 강한 동의를 표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결 대화가 쉬워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좋아요. 그럼 다시 묻죠. 밀레 자작 부인. 당신은 황비의 권세가 이대로 쭉 영원할 거라 믿나요?”
밀레 자작 부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적 갈등을 하는 것 같았다.
해서 르네브는 조금 더 과격한 언어로 밀레 자작 부인을 부추기기로 했다.
“속된 말로 황제 폐하께서 버리시면 황비 전하는 그대로 끝이에요.”
“…….”
밀레 자작 부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그녀 또한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귀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신 모양이네요. 황비 전하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 정도는.”
“여, 영애. 그런데 어째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밀레 자작 부인이 르네브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증언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증언이라 하시면, 어떤……?”
밀레 자작 부인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물었다.
“그날, 지하 감옥에서 있었던 일과 그 일을 사주한 사람이 누군지.”
순간 밀레 자작 부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저, 저는 영애께서……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네. 전혀 하나도 모르겠어요.”
밀레 자작 부인이 말까지 더듬어가며 격하게 부정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그녀의 손도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르네브는 밀레 자작 부인의 손등 위에 제 손을 포개듯 덮었다. 위협을 하려는 것이 아닌, 떨리는 그녀의 손에 온기를 주기 위함이었다.
“아이만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곤 들판에서 뛰어노는 그녀의 아이 쪽을 힐끔 바라봤다.
“제, 제!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하시려고!”
밀레 자작 부인이 발작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르네브를 쏘아봤다.
조금만 더 아들 이야기를 꺼내면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 것처럼 매서운 기세였다.
“침착하세요, 부인. 괜히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지 마시고.”
르네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죽일 듯 자신을 노려보는 밀레 자작 부인을 향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를 가져 본 적 없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쉽사리 수긍하긴 어려우시겠지만, 저는 지금 아이의 안전을 우선시하라고 권유하는 거예요.”
“…….”
그녀의 말을 듣고 마룻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동안 침묵하던 밀레 자작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결연한 눈빛을 보아하니 결정을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
“제가 증언을 하면, 제 아이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주실 건가요?”
르네브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물론이죠.”
긍정적인 대답에 밀레 자작 부인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감이 엿보였다.
“아이‘만’이에요.”
르네브는 특정 단어를 힘주어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