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뜻밖의 방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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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뜻밖의 방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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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뜻밖의 방문객
2023.07.26.
세이렌 후작은 딸아이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자상도 하지…….”
확실히 아들인 패트릭과는 달랐다.
패트릭과는 기사단 일로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부대끼며 살았지만, 부자 사이에 이렇다 할 대화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쩌다 나누는 대화 또한 일과 관련된 것이 주를 이뤘다.
반면 르네브는 자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꼼꼼히 적어 넣었을 뿐 아니라, 파라디움 황궁 내 상황까지도 자세히 알려 주었다.
어쩌면 패트릭과 르네브의 타고난 기질이 서로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이렌 후작은 그냥 딸이 최고라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패트릭과 달리 멀리 떨어져 지낸 기간이 길었던 탓에 더욱 살갑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지만.
편지를 잘 접어서 재킷에 넣었던 세이렌 후작은 다시 품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오늘은.
그렇게 다짐하며 세이렌 후작은 한 번 더 르네브의 편지를 읽었다.
마지막 문구를 재차 눈으로 훑어보고 나서야 세이렌 후작은 르네브의 편지를 도로 재킷 깊숙이 넣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걸음을 옮기려던 세이렌 후작은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눈을 깜빡였다.
얼마 전 바슈케르 황제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러 르네브가 서부에 왔을 때의 일이었다.
‘우리 가족끼리만 공유할 만한 특별한 사인이 있었으면 해요.’
식후 차를 마시던 도중 르네브가 제안했다.
‘특별한 사인? 어떤 상황에서 사용할 사인인데?’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던 패트릭이 이내 재밌겠다며 흥미를 보였다.
세이렌 후작은 딸과 아들이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예를 들면 말이야.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걸 알리는 신호로 쓰는 거지.’
패트릭이 세이렌 후작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런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르네브 스스로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을 겪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
그래서 가족끼리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르네브만은 파라디움에서 가장 안전한 황궁 근처에 저택을 마련해 두고 지내게 했다.
세이렌 후작이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는 귀한 딸을 험한 서부에서 지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위험에 르네브를 그대로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부인을 잃은 뒤 세이렌 후작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있었다.
그 때문에 원래는 패트릭도 르네브와 함께 파라디움 중심부에 머물게 하려 했다.
하지만 패트릭은 세이렌 후작의 성격을 많이 닮아 있었다.
패트릭 역시 더는 가족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는지 안온한 환경 속에서 나약하게 자라고 싶지 않다며 세이렌 후작을 설득했다.
세이렌 후작도 이에 깊이 공감했다.
르네브와 달리 패트릭은 언젠가 서부를 짊어져야 할 테니.
그런 이유로 세이렌 후작은 패트릭만은 서부에서 지내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이인데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 가족끼리만 알 수 있는 사인을 만들자고 하다니?’
마음이 복잡했으나, 세이렌 후작은 일단 르네브의 뜻대로 하자고 말했다.
‘그래. 좋은 생각 같구나.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으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르네브가 이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많으니까, 편지에 적은 단어로 위험을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르네브가 의견을 묻자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은 것 같은데. 아버지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도 좋구나.’
‘그럼 그 단어를 정하기로 해요.’
그때는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세 가족이 오붓이 앉아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일 또한 세이렌 후작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늘 르네브에게서 온 편지에는 그날 가족끼리 정했던 단어가 적혀 있었다.
「아, 곧 열리겠네요. 아버지께서 지내고 계시는 지역의 봄 축제가. 아버지께서도 봄 축제에 잠깐 들를 만한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때 가족끼리 정한 단어는 ‘봄’이었고, 연달아 적는 것으로 위험을 알리기로 정했었다.
그리고 이후의 문장을 다시 떠올려 보던 세이렌 후작의 눈이 돌연 커졌다.
「이전에 그곳을 방문해 본 다른 분께 전해 들었는데 봄 축제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네요? 특히 아버지처럼 부유한 귀족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린다더라고요.」
처음에는 이 문장을 보고 그냥 웃어넘겼다.
세이렌 후작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대범하기 짝이 없는 소매치기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르네브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세이렌 후작은 파라디움 안에서 제법 이름을 알렸다.
그건 서부에서만 통용되는 게 아니었다. 남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건 지나친 걱정이라며 웃었지만, 내심 제 걱정을 하는 딸의 모습에 흐뭇해하기도 했다.
반복적으로 읽고 또 읽었던 그 문장을 다시 곱씹어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하고자 하는 암시가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곧 르네브가 어째서 구구절절 제가 어떻게 잘 지내는지를 일일이 편지에 담았는지 깨달았다.
위험에 처한 사람은 르네브가 아닌 세이렌 후작 본인임을 인지시켜 주기 위함이었던 것.
르네브의 편지는 이곳 봄 축제 기간에 누군가 세이렌 후작 본인을 노리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자신을 노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만…….
***
“앉아!”
망!
“잘했어, 코코.”
양몰이 개에게 훈련한다는 명목하에 놀고 있는 아들과 그 옆에서 뜨개질하는 유모의 모습을 바라보던 밀레 자작 부인은 이내 침실 방 창문을 닫았다.
“오늘도 평화롭네.”
물론 그녀의 마음은 평화롭지 못했다.
밀레 자작 부인이 올라오는 여러 상념을 밀어내고자 애쓸 때 유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자연히 밀레 자작 부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먼 시골까지 찾아온 손님이 누구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처음 휴가를 내고 별장을 찾았을 때만 해도 그녀를 찾아오는 근방의 하급 귀족들이 몇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최근엔 그마저도 딱 끊어졌다.
밀레 자작 부인이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무는 시일이 길어지자 다들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황비 시녀 직에서 잘린 모양이에요.”
“그런 거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황궁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여기 계실 이유가 딱히 없으니…….”
그런 소릴 듣고 난 뒤부터 밀레 자작 부인은 가끔 번화가로 외출하던 것도 그만두고 별장에 틀어박혔다.
그런데 손님이라니?
보나 마나 정보에 어두운 얼치기 같은 작자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을 매개로 황궁에 인맥을 만들어 보려고 말이다.
“돌려보내.”
밀레 자작 부인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유모가 난감해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그것이…….”
그때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아들이 침실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러고는 밀레 자작 부인의 드레스 자락에 폭 안겨 들었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신이 났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가에 옅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들만이라도 매일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들, 왜 이렇게 신이 나셨어?”
밀레 자작 부인의 물음에 아들이 고개를 바짝 꺾어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 나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
“……!”
밀레 자작 부인의 입이 충격으로 떡 벌어졌다.
“아휴, 도련님도 참…… 결혼이라니요. 도련님께는 너무 이른 이야기에요.”
굳어 있는 밀레 자작 부인 대신 유모가 아이를 나무랐다.
그녀는 얼른 유모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 촌구석에 예쁜 어린아이라도 있는 거냐며.
그러자 유모가 작게 속삭였다.
“아마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손님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 것 같아요. 도련님께서 눈을 못 떼시더라고요.”
“…….”
밀레 자작 부인은 아들로 인해 잠시 잊고 있던 손님의 존재를 자각했다.
그러나 아들 쪽이 조금 더 급했다.
“왜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졌는데?”
“예뻐.”
“……예쁘다고?”
그게 전부인가.
“응. 그것도, 엄청 예뻐.”
“엄마보다 더?”
밀레 자작 부인의 물음에 아들이 곤란한 듯 귀여운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피했다.
‘언제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예쁘다더니…….’
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밀레 자작 부인이 속으로만 분노를 삭이는데 유모가 밖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마님. 어떻게 할까요? 먼 길 오신 손님 같은데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알았어, 알았어. 내가 나가 볼게.”
밀레 자작 부인은 간단히 숄을 챙겨 두르고는 별장을 나섰다.
대체 제 아들의 마음을 훔친 아름다운 여자가 누구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별장 밖으로 나가자 푸르른 산맥을 보고 선 여자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옆에서 코코가 힘차게 꼬리를 흔들며 여자의 관심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키우는 개마저…….
쯧, 혀를 차며 밀레 자작 부인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를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밀레 자작 부인의 목소리에 손님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거세게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은발이 흩날렸다. 햇빛에 투사된 은발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들려 한 것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오랜만에 뵙네요. 밀레 자작 부인.”
올곧은 자세로 서 있던 세이렌 후작 영애가 우아하게 밀레 자작 부인 쪽으로 걸어왔다.
순간 밀레 자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몇 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그녀는 묘하게 더 당당했다.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같은 것이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된 것도 잠시. 과거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위 귀족이라 해도 엄마 없는 아이는 어쩔 수 없이 티가 나는 법이죠.’
모두가 세이렌 후작 영애를 손가락질할 때 그녀 또한 동참했었다.
그때는 황비라는 거대한 뒷배가 있었기에 그녀에게 비수를 꽂을 수 있었다.
아니, 황비가 그런 분위기를 조성했으니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하면 오히려 따돌림을 당하는 건 저 자신이었을 터였다.
자신도 약자의 입장이었고, 소외되고 싶지 않아 그랬을 뿐이었다.
하지만 속으로 구차한 변명을 되뇌어 봐도 변하지 않는 건 있었다.
바로 신분의 고하.
세이렌 후작 영애는 명실상부 파라디움 제국의 대귀족이었다.
세이렌 후작의 하나뿐인 딸이었으며 현재는 바슈케르 제국 황제의 약혼녀가 되었다.
이전부터 밀레 자작 부인의 신분으로는 감히 말 한번 붙여 보기 어려운 상대였고, 이제는 아예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