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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기밀문서 (116/148)


#116화 기밀문서
2023.07.25.


곧장 서재로 자리를 옮긴 르네브는 기밀문서에 새로 추가할 사항을 새 양피지에 적어 넣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드한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영애. 설마 이 문서를 일회성으로 끝낼 게 아니라 나중에 또 활용하시려는 겁니까?”

“물론이죠.”

르네브는 당연한 걸 묻는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나머지 변경 사항도 적어 넣으려 했다. 그러자 드한이 느리게 짝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드한 경?”

르네브는 가늘어진 눈으로 찌릿 드한을 흘겼다.

“네, 말씀하십시오.”

“지금…… 비꼬는 건가요?”

그러자 드한이 무섭다는 듯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엄살 피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비꼰다고 느끼셨다면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가며 양순하게 사과한 뒤에야 드한이 덧붙였다.

“그저 아버지의 화만 피해 가는 게 아닌 이 기회를 역이용하려는 영애의 전략에 감복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진심이라는 걸 표현하려는 듯 드한이 진지한 얼굴로 르네브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르네브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인지 가늠하려고 드한을 빤히 바라봤다.

“믿어 주십시오.”

“……알겠어요.”

거듭된 드한의 주장에 르네브는 대충 그의 사과를 받아 주고는 양피지에 나머지 문장을 적어 넣었다.

“이 부분의 문장만 이대로 변경해 주세요.”

르네브는 추가 사항을 적은 양피지를 드한에게 건넸다.

“와, 역시…….”

드한이 짧게 감탄했다.

“역시…… 뭐죠?”

르네브는 불안한 마음으로 드한을 올려다봤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건가 봅니다.”

“네?”

“아, 영애의 일 처리 방식이 저희 폐하와 꽤나 닮아 있어서요. 냉철하면서도 집요하고, 또 야비…… 아니, 영리하시죠. 그래서 놀란 것뿐이니 부디 오해 말아 주십시오.”

르네브는 잠시 책상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로 생각했다.

‘방금 야비하다고 하려다 만 것 같은데…….’

아니지. 저 정도면 거의 단어의 발음을 다 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드한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정중한 것 같으면서도 제법 격 없이 굴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러면서도 또 그 부분을 지적하면 곧바로 넙죽 사과했다.

‘이카르도 나름 힘들겠는데?’

덕분에 르네브가 이카르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럼 저는 이걸 가지고 서둘러 바슈케르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르네브는 곧장 떠나려고 몸을 돌리는 드한에게 물었다.

“부탁할게요. 그런데 헨리케 자작 영애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적응력이 남다르시더군요. 덕분에 무탈히 잘 지내고 계십니다.”

드한은 헨리케 자작 영애는 황궁 귀빈실에서 지내고 있으며 바슈케르의 문화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며 짧게 덧붙였다.

***

르네브가 준 양피지를 들고 곧바로 바슈케르로 돌아온 드한은 이카르의 집무실부터 찾았다.

이카르가 지금쯤 애타게 자신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집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드한은 아무도 없는 빈 집무실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곧 이 시간에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당장 파라디움으로 가겠다는 이카르를 겨우겨우 만류했었다는 것도.

“음…… 어떡할까.”

드한은 집무실 안을 서성이며 짧게 고민했다.

회의 중에도 어찌 되었을지 궁금해서 목이 빠져라, 르네브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을 이카르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회의가 끝나고 난 뒤에 보고를 올리는 편이…….’

드한의 발끝이 문과 집무실 안쪽을 왔다 갔다 하며 갈팡질팡할 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왔군.”

그리고 이카르가 집무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폐하……?”

보통의 회의는 길어지거든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불도저같이 밀어붙이는 성향의 이카르는 휴식이란 걸 몰랐다.

오늘 이카르가 참석한 회의도 논의할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다면 늦은 시각까지 계속될 터였다.

그러니 드한은 이카르가 집무실로 돌아온 이유가 당연히 회의가 일찍 끝나서인 거라고 판단했다.

“오늘은 회의가 일찍 끝난 모양입니다?”

“휴게 시간을 가지기로 했지.”

태연한 이카르의 대답에 드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예? 휴게 시간이요?”

그때 성큼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베인이 끼어들었다.

“파라디움에서 네가 돌아오거든 바로 알리라고 시종에게 말씀해 두셨어.”

“아…….”

드한은 그제야 이해했다. 자신이 황궁으로 복귀하자마자 이카르가 집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영애는 뭐라고 하던가?”

반듯한 미간에 선명한 세 줄의 실금을 드리운 채로 이카르가 물었다.

드한이 파라디움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장인께서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리러 당장 르네브에게 가 봐야 한다던 이카르였으나, 단 몇 시간 만에 제법 침착한 태도였다.

“폐하. 이걸 보십시오.”

드한은 대답 대신 르네브가 준 양피지를 내밀었다.

“영애께서 기밀문서에 살짝 추가해 달라고 하신 사항입니다.”

양피지를 읽어 내리는 이카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세이렌 후작 영애를 닮아 필체가 아름답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게 아닐까?’

드한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하…….”

이카르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한 또한 처음 르네브가 적은 추가 사항을 봤을 때 같은 반응을 보였던 터라 이카르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뭔데 그래?”

반면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베인은 드한과 양피지를 번갈아 힐끔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단번에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하는가 보군.”

이카르가 시원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드한도 그 말에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직 혼자만 양피지를 확인 못 한 베인이 연신 드한과 양피지를 번갈아 힐끔거렸다.

폐하께서 소중히 쥐고 있는 세이렌 후작 영애의 친필 양피지를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베인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을 때였다.

“자, 직접 확인해 봐.”

이카르가 마지못한 얼굴로 베인에게 양피지를 보여 줬다.

“설마…….”

이카르의 허락하에 양피지 내용을 확인한 베인의 눈이 커졌다.

“이거…… 황비에게 역모죄를 씌우려는 겁니까?”

“아마도 그런 생각이신 듯한데.”

드한이 동의하자 이카르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볼수록 매력 있어.”

또 한 번 반했다는 듯 이카르의 날카롭던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드한 역시 악랄한 르네브의 수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좀, 멋지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앞으론 르네브에게 툴툴거리지 말고 잘 보여야겠다고 속으로만 다짐했다.

‘겉보기와 달리 속이 시꺼먼 사람들을 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해.’

드한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은근슬쩍 이카르를 훔쳐봤다. 그 시선을 읽었는지 이카르가 툭 내뱉었다.

“뭐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드한이 재빨리 고개를 젓자 이카르가 지시를 내렸다.

“서둘러. 평소보다 답변이 너무 늦어지면 황비 쪽에서 의심할 수도 있으니.”

“예! 폐하.”

드한과 베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베인은 곧장 기밀문서에 쓰인 것과 같은 질감의 양피지를 준비했고, 드한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기밀문서에 적힌 필체의 특징들을 면밀히 분석했다.

“어때? 내가 보기엔 그렇게 어렵진 않아 보이는데.”

베인의 물음에 드한이 자신만만하게 히죽 웃었다.

“날 뭘로 보고.”

드한은 용병 시절 문서 위조의 달인이었던 제 실력을 과감하게 이용했다.

드한이 위조한 이 문서는 앞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 것이 분명했다.

***

드한이 떠나고 르네브는 새 양피지를 꺼내 깃펜을 들었다.

「아버지, 이제 봄기운이 완연하네요…….」

안부 인사로 시작한 편지를 반복해 읽어 보던 르네브는 곧 양피지를 꾸깃꾸깃하게 접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새 양피지를 책상 위에 펼쳤다.

이번에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몇 번이고 새 양피지를 꺼내 새로 편지를 적으며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저답지 않은 낯간지러운 인사말 대신 용건만 간단히 적어 내려갔다.

양피지의 반절 정도 채웠을 즈음 르네브는 여태 쓴 내용을 한번 읽어 봤다.

“이번엔 너무 딱딱한가…….”

적을 동안엔 몰랐는데 다시 읽어 보니 상부에 올리는 보고서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언제나 그렇지만, 중간은 참 어려웠다.

“휴우…….”

르네브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때 서재 문 너머로 발소리에 이어 앰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저 잠시 외출하고 올게요.”

“오늘인가 보구나.”

황후의 정보원과 접선하는 날이.

“앰버, 잠깐만.”

르네브의 부름에 앰버가 서재 문을 열고는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응. 잠깐 안으로 들어올래.”

앰버가 냉큼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황후 폐하께 전할 소식이 있는데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전해 주겠니?”

앰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께서 뵙자고 하셨다고 전해 드릴게요. 또 다른 건 없으세요?”

르네브는 잠시 앰버의 옷차림새를 쓱 훑어봤다.

‘……연애하나?’

딱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최근 앰버는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대충 질끈 묶어 버렸을 머리도 오늘은 반만 땋아 두어서 그런지 참해 보였다.

이전에는 없던 변화였다.

“없어. 그런데 오늘 예쁘네.”

앰버가 머쓱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런…… 가요?”

“응. 예뻐.”

르네브의 칭찬에 앰버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도 참…… 그럼 다녀올게요.”

귀까지 살짝 빨갛게 물들인 걸 보면 르네브의 칭찬이 싫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멀어지는 앰버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르네브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봄이구나.’

그러나 그런 말랑말랑한 생각을 한 것도 잠깐뿐이었다.

세이렌 후작에게 보낼 편지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조금 전까지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도 사라졌다.

르네브는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보고서 형태의 편지를 계속해서 작성했다.

자신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최근 파라디움 황궁의 상황은 어떠한지. 아버지와 딸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안부 편지처럼 느껴지도록.

황비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었어야 할 기밀문서가 이카르의 손을 통해 르네브에게 전해졌다.

그런 만큼 세이렌 후작에게 도착하는 편지들 또한 이미 누군가 엿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해서 섣불리 편지 안에 기밀문서의 내용을 적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곧 열리겠네요. 아버지께서 지내고 계시는 지역의 봄 축제가. 아버지께서도 봄 축제에 잠깐 들를 만한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르네브는 이대로 편지를 마무리할까 하다가 한 문장만 더 적어 넣었다.

「이전에 그곳을 방문해 본 다른 분께 전해 들었는데 봄 축제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네요? 특히 아버지처럼 부유한 귀족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린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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