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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소문 (115/148)


#115화 소문
2023.07.24.


밀레 자작 부인은 꽃을 쥔 아들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웬 꽃이야?”

“예쁘지? 이거 엄마 줄게.”

아들이 들고 있던 꽃을 내밀었다.

“도련님도 참…… 예쁜 꽃을 보고 마님 생각을 하셨나 보네요. 기특하셔라.”

유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칭찬했다.

밀레 자작 부인은 아들에게서 꽃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칭찬을 바라는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고마워.”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어?”

아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밀레 자작 부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어머나! 세심도 하셔라.”

유모는 이것 좀 보라면서 유난을 떨었지만, 밀레 자작 부인은 생각이 많아졌다.

아들이 우연히 이 꽃을 발견하고는 따 가지고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바라보았던 들판엔 피어난 꽃이 없었다.

꽃봉오리만 맺혀 있었을 뿐.

“엄마 왜 그래?”

아들이 생각에 잠긴 밀레 자작 부인을 일깨웠다.

“아들, 근데 말이야. 들판엔 아직 꽃이 안 피었던데. 이 꽃은 어디서 찾은 거야?”

밀레 자작 부인의 물음에 아들이 곤란한 듯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응? 이 꽃을 어디서 발견했는지 엄마한테 말해 주면 더 기쁠 것 같은데.”

부드럽게 채근하자 아들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누가 주고 갔어.”

“이 꽃을? 누가?”

“몰라.”

아이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밀레 자작 부인은 미간을 모은 채로 아들의 뒷모습을 쫓다가 유모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제가 따라 나가 볼게요.”

유모가 얼른 정리하던 옷가지를 내려놓고는 아이를 따라 나갔다.

밀레 자작 부인은 미간을 꾹꾹 누르다 시선을 내렸다.

보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을 한참 바라보던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냥 예민한 거겠지……?”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

황비의 손에 들린 편지가 보기 좋게 구겨졌다.

황비는 결국, 분을 못 이겨 들고 있던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다들 뭐 하자는 거야, 정말!”

앤드니 백작 부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황비는 자신의 격에 맞는 가문 몇 곳에 초대장을 보냈다.

그 가문의 부인들을 직접 만나 보고 시녀로 들여도 될지 결정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번번이 초대에 거절한다는 편지가 돌아왔다.

그 이유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대해 주신 건 감사하오나,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먼 길 떠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걸로 거절 편지만 벌써 세 번째였다.

아니, 세 번째 편지는 밀레 자작 부인이 보낸 것으로 휴가 기간을 좀 더 연장하고 싶다는 거였다.

황비는 그 말을 자신의 시녀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거절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였다.

“초대에 거절한 진짜 이유를 알아보세요. 그리고 거절 원인에 따라 그쪽 가문에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언질을 주고 말이죠.”

황비는 올라오는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황비 전하.”

시종이 곧장 대답하곤 몸을 돌렸다.

사실 황비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녀들이 어째서 제 초대를 거절했는지.

그녀들은 한결같이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저도 그녀들을 시녀 예비 후보로 결정한 것이었고.

“잠깐.”

황비는 막 응접실을 나서려는 시종을 불러 세웠다. 시종이 걸음을 멈춘 채로 황비를 돌아봤다.

“말씀하십시오.”

“밀레 자작 부인 쪽의 상황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시종이 응접실을 나간 뒤에도 한참을 씩씩거리던 황비는 문득 앤드니 백작 부인의 부재를 체감했다.

황비가 분노에 사로잡혀 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때면 언제나 앤드니 백작 부인은 그녀에게 차가운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항상 먼저 지시하지 않아도 눈치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을 증명하듯이.

그에 반해 밀레 자작 부인은 중요한 때에 곁에서 보필하기는커녕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있었다.

“멍청하게.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을 믿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황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에서 나뒹구는 편지를 바라봤다.

최근 자신을 바라보는 황궁 고용인들의 눈빛이 어딘지 이상했다.

어차피 가구와 같은 존재이니 그들의 생각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딘지 찜찜했다.

그래서 황비는 그 이유를 알아봤다.

이유인즉, 황비의 침실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매한 자들이 낸 소문이니 금방 사그라질 것이라며 넘겼다.

하지만 황궁 고용인들 입을 통해 소문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졌고, 귀족 가문의 부인들이 황비의 시녀 직을 마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태가 제법 심각해지자, 황비는 이전에 자신이 했던 선택을 조금 후회했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봤어야 했나…….”

앤드니 백작 부인이라면 금방 사태를 진정시킬 묘안을 찾아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

앤드니 백작 부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직도 황후에게 시달리고 있었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잘 아는데도 오늘따라 앤드니 백작 부인의 부재가 크게 와닿았다.

당장 제게 물 한 잔 떠 줄 사람도 곁에 없으니 말이다.

“하아…….”

황비는 눈을 질끈 감고 설렁줄을 당겼다.

곧 황궁 하녀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황비 전하.”

“차를 내오렴.”

“네.”

응접실을 나가는 하녀의 뒤통수에 대고 황비는 한마디 더 건넸다.

“뜨거운 것 말고, 차게 식힌 걸로.”

“알겠습니다. 황비 전하.”

일일이 제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하는 수고로움 때문인지 오늘따라 떠난 사람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

황비가 시녀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앰버를 통해 르네브의 귀에도 전해졌다.

“다들 황비의 시녀 자리를 마다하다니. 황비 전하도 참…… 안타깝네요.”

언뜻 황비의 곤란한 사정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했으나, 앰버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곧 익숙해지겠지.”

르네브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황비의 시녀 직의 인기가 시들해진 데는 그녀의 몫이 컸다.

“아가씨. 이러다 밀레 자작 부인까지 황비 전하의 시녀장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는 거 아닐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앰버가 말을 덧붙였다.

“아가씨께서 보낸 꽃 한 송이가 큰 역할을 한 걸까요?”

얼마 전 르네브는 휴가를 받아 별장으로 떠난 밀레 자작 부인에게 꽃 한 송이를 보냈다.

보복이라는 꽃말을 지닌 꽃이었다.

황후의 정보력에 의하면 최근 밀레 자작 부인은 악몽을 자주 꾼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식욕도 전보다 줄었고, 자연스럽게 야위어 갔다.

그러한 밀레 자작 부인의 변화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은 르네브는 한 가지를 추측해 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의 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앤드니 백작 일가가 죽기 전 지하 감옥을 찾은 건 밀레 자작 부인이었다.

앤드니 백작 일가가 직접 목숨을 끊었든 아니든 약물은 필요했을 거고, 그걸 제공한 사람은 밀레 자작 부인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밀레 자작 부인을 살짝 자극했다.

보복이라는 꽃말의 꽃을 보냄으로서.

그런데 예상 밖에 효과가 대단했다.

신경 쇠약에 걸린 사람처럼 밀레 자작 부인은 외출도 삼가고 별장에만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황비에게 예고했던 휴가 기간이 진즉 지났음에도 황궁으로 복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참 신기해요. 아가씨.”

“뭐가?”

“많이 배우신 귀족분들께서 그런 소문을 철석같이 믿는다는 게 조금…… 그렇잖아요.”

앰버가 말하는 소문이란, 앤드니 백작 부인의 혼령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황궁 안을 떠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이는 르네브가 지어낸 소문이었다.

최근 황비의 침실 근처에서 밤마다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린다거나, 아무도 없는데 컵이 깨졌다거나.

허무맹랑하다며 웃어넘길 수도 있었으나, 황후는 이 기회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황후마저 은근히 이 소문을 진실로 믿는다는 사실이 퍼지자, 더 빠르게 소문이 확산되었다.

밀레 자작 부인은 장기 휴가를 핑계로, 황비 시녀 직의 물망에 오른 귀부인들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대며 황비와의 만남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황비의 수족을 자르겠다던 르네브의 계획은 거의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르네브는 부스스 눈을 떴다.

“……무슨 일 있어?”

막 잠에서 깬 탓에 꽉 잠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가씨.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드한 경께서 찾아오셨어요.”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르네브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거라면 꽤나 중요한 일일 듯했다.

“곧 갈 테니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렴.”

“네, 아가씨.”

르네브는 대충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린 다음 커다란 숄을 어깨에 걸치곤 걸음을 옮겼다.

“드한 경?”

응접실 앞에 서 있던 드한이 앞뒤 설명도 없이 들고 있던 양피지를 르네브에게 내밀며 말했다.

“일찍부터 실례라는 건 알지만, 워낙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먼저 보고 이야기하시죠.”

드한이 양피지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르네브는 헉, 숨을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

문서에는 이번 해적 토벌전에서 시행할 세이렌 후작의 암살 계획이 담겨 있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드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고, 르네브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드한을 쳐다봤다.

“이건 파라디움의 남부 귀족 세력 중 한 사람과 황비가 주고받는 기밀문서입니다.”

드한이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저희 폐하의 비밀 호위가 중간에 가로챈 것으로 아직 황비 쪽으로는 전달되기 전입니다.”

“…….”

“이걸 보고 중요한 일정을 내팽개치고 폐하께서 직접 파라디움으로 오시겠다는 걸 겨우 뜯어말렸습니다. 영애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두겠다고 설명해 드리면서 말입니다.”

르네브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전 생에도 지금과 같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숨길 수 없는 분노로 손이 벌벌 떨려 왔다.

이전 삶에서 유산하고 아직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제 앞에서 황비는 정부를 들여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뒤에서는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던 거였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잠시 이성을 잃을 뻔했으나, 드한의 한층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르네브는 냉정함을 되찾았다.

“잠깐 내용을 자세히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르네브는 드한에게서 건네받은 양피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토벌하기로 한 해적 무리 속에 황비가 심어 놓은 밀정이 있다는 것과 언제 어디로 습격할 거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여러 번 문서를 재차 읽고 난 뒤에야 르네브는 입을 열었다.

“드한 경. 황비에게 보내기 전에 내용을 조작하는 게 가능할까요?”

“똑같이 필체를 흉내 내는 것도 물론 가능합니다.”

르네브의 물음에 드한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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