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푸른색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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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푸른색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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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푸른색 꽃
2023.07.23.
“바슈케르에 안전을 부탁하신 분을 숨겨 둘 적절한 거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가능한 오늘 바로 돌아갔으면 합니다만?”
과거의 자신이 뱉은 말을 후회하는 듯했으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산뜻한 얼굴로 드한이 물었다.
그러고는 바슈케르로 데려갈 인물은 대체 어디 있냐는 듯한 시선으로 응접실 안을 기웃거렸다.
‘늦는 건가? 아니면 결정을 바꾼 건가…….’
약속 시각이 조금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는 헨리케 자작 영애 때문에 르네브는 살짝 불안해졌다.
하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 이곳에 왔을 드한에게 그런 내색을 하기는 어려웠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야겠어.’
르네브는 그렇게 마음먹고 드한에게 세이렌 후작 저 안에서도 가장 푹신하고 좋은 소파를 권했다.
“드한 경. 약속 시각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잠깐 앉으시겠어요?”
미심쩍은 시선으로 르네브를 힐끔 바라보던 드한이 곧 르네브가 권한 소파로 걸어갔다.
“그럼 사양은 않겠습니다.”
자리에 앉자 드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오…….”
살짝 감탄사를 내뱉기까지 하는 걸 보면 소파가 드한의 마음에 꼭 드는 모양이었다.
‘등과 엉덩이를 푸근하게 감싸 안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일품이지.’
르네브는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며 드한에게 양해를 구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마침 복도의 기둥을 닦고 있는 하녀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손님께 드릴 디저트를 부탁할게.”
“네, 아가씨.”
냉큼 하녀가 주방 쪽으로 뛰어갔다.
응접실로 돌아온 르네브는 진열장에서 예쁜 다기 세트를 꺼냈다.
그리고 티 포트에 직접 찻잎을 옮겨 담았다.
“영애?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드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새로운 찻잎이 들어왔는데 달콤한 디저트와 꽤 잘 어울리더라고요. 드한 경께도 맛보여 드리려고요.”
“아, 어째서 하녀에게 시키지 않고 영애께서 직접 차를 준비하시냐는 뜻이었습니다.”
드한이 엉거주춤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다. 미래의 황후 되실 분이 손수 내려 주는 차를 마시기에는 황송하다는 듯이.
르네브는 드한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손짓했다.
“바쁘고 귀한 분께서 세이렌 후작 저를 직접 찾아와 주셨으니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게 예의 같아서요.”
이 정도 대접은 했다, 하고 일종의 생색내기였다. 그리고 드한 너를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도 포함해서.
듣고서 기분 좋아지라고 한 말이었는데, 다행히 드한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였다.
‘은근히 알기 쉬운 성격이란 말이지.’
단순하고 솔직한 드한의 반응에 르네브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정확한 시간으로 우려낸 찻물을 예쁜 찻잔에 담아 드한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예쁜 찻잔을 생경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드한이 르네브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찻잔을 들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르네브는 싱긋 웃기만 하곤 제 몫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드한이 눈이 조금 커졌다.
“맛있습니다.”
“입에 맞으세요?”
“예. 사실 영애께서 내린 차 맛이 끔찍하지 않을지 그런 걱정을 조금 했는데, 뜻밖입니다.”
뒷말은 안 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쓸데없이 솔직한 드한 때문에 르네브의 눈썹이 절로 꿈틀거렸다.
그러나 르네브는 애써 모른 척, 태연한 척하며 찻잔을 들었다.
‘삐졌네, 삐졌어.’
오랜만에 봤으면서도 반기는 기색 하나 없이 입술을 비죽이는 드한을 보며 르네브를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바슈케르를 떠나 파라디움에서 지내는 일로 불만은 품은 건 이카르만이 아니었다고.
“아가씨, 말씀하신 디저트를 가져왔습니다.”
다행히 차가 식기 전에 하녀가 디저트를 가지고 왔다.
르네브는 부러 드한의 앞에 친절히 디저트 접시를 놓아 주며 싱긋 웃었다.
“차와 잘 어울릴 거예요. 드셔 보세요. 드한 경.”
“……예.”
드한이 조금 미심쩍은 눈빛으로 르네브를 바라보더니 이내 포크를 집었다.
오늘따라 과하게 친절한 르네브를 보며 조금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게 되어 있지.’
그리고 르네브의 예상은 딱 적중했다.
“……요즘 들어 신경질이 부쩍 느셨지 뭡니까?”
차에 곁들여 디저트를 한 접시 먹어 치운 드한은 바슈케르 황궁에서의 일을 술술 털어놓았다.
“폐하께서요?”
상상이 잘 안 되었다. 신경질을 부리는 이카르의 모습은.
“예에! 말도 마십시오.”
드한이 진저리를 치며 곁눈질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그게 꼭 고자질하는 남동생 같았다.
“수치가 틀렸군. 다시…… 아직도 그 일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드한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마치 이카르를 흉내 내는 베인처럼.
르네브는 이마를 짚은 채로 살짝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 그날 이카르는 최대한 본심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거였나 보구나.’
며칠 전 세이렌 후작 저에 방문했을 때 이카르는 이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했었다.
르네브의 뺨을 깨물고, 어깨를 깨물고. 마치 이가 자라기 시작한 강아지처럼.
그뿐이 아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쯤이 돼서야 그는 세이렌 후작 저를 떠났다.
그것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그를 억지로 돌려보낸 건 르네브였다.
‘……분리 불안인가?’
르네브는 잠시 이카르의 심리를 곱씹다 이내 결론을 내렸다.
얼른 이곳의 일을 마무리하고 이카르의 곁에 돌아가야겠다고.
얼마간 드한과 그간 밀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헨리케 자작 영애가 도착했다.
하녀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온 헨리케 자작 영애가 정면에 앉은 드한에게 꾸벅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드한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르네브를 쳐다봤다.
“어서 와요. 헨리케 자작 영애. 조금 늦으셨네요.”
그제야 헨리케 자작 영애가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르네브의 얼굴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는지 헨리케 자작 영애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오늘 헨리케 자작 영애는 언니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얻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따라왔다.
그러니 상석에 앉은 드한을 이 저택의 주인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세이렌의 르네브예요.”
당황한 듯 입술을 벙긋거리던 헨리케 자작 영애가 곧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헨리케 자작의 둘째 딸인 한나 인사드립니다. 지난번 가면무도회에서 제게 말을 걸었던 그분이 영애셨군요.”
“맞아요.”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헨리케 자작 영애가 빠르게 덧붙였다.
“그때는 제게 말을 건 분이 영애이신 줄은, 바슈케르 황제 폐하의 약혼자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혹여나 무례가 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헨리케 자작 영애가 난감한 듯 살짝 시선을 떨어뜨렸다. 르네브는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며 그녀를 다독였다.
“가면무도회였잖아요. 서로 몰라보는 게 당연하죠.”
르네브는 가면무도회에서 제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저 언니에 관해 알고 싶은 게 있다면 약속 장소로 나오라고만 했다.
서로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충분히 의심할 만했으나, 르네브는 그녀가 약속 장소에 나타날 거란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르네브의 이전 삶에서 헨리케 자작 영애는 제법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었다.
그녀는 용감했고, 과감하게 언니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 주고자 애썼으나, 결국 그녀 또한 행방이 묘연해져 버리고 말았지만.
“이분은 드한 경이세요. 저 대신 영애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실 분이시죠.”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드한 경.”
“이분은 헨리케 자작 영애세요.”
르네브는 드한을 향해 찡긋 눈짓해 보이며 말했다.
‘이 사람이 지켜야 할 증인입니까?’
따위의 쓸데없이 솔직한 말을 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드한은 별말 없이 헨리케 자작 영애에게 묵례하며 르네브에게 말했다.
“그럼 갈 길이 먼 관계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르네브는 헨리케 자작 영애가 마차에 오른 것을 확인한 뒤 드한에게 한마디 건넸다.
“다시 뵐 때까지 헨리케 자작 영애의 안전을 잘 부탁드릴게요. 드한 경.”
“3년간 지내 보셨으니 영애께서도 아시겠지만, 바슈케르 황궁은 사람이 막 죽어 나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드한이 약간 무뚝뚝하게 내뱉고는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그럼.”
그러고는 르네브에게 눈인사를 하고 말고삐를 당겼다.
르네브는 멀어지는 드한의 곧고 너른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헨리케 자작 영애를 안전하게 잘 지킨다는 말을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
초록빛 너른 들판엔 피어나기 직전의 색색의 꽃봉오리들이 그득했다.
신기하다는 듯 양 떼의 뒤를 망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아들의 귀여운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밀레 자작 부인의 입에서 이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
“마님. 요즘 한숨이 느신 것 같아요. 황궁 일이 많이 힘드신가요?”
짐 가방에서 제 아들의 옷가지들을 꺼내 차곡차곡 서랍에 정리해 넣던 유모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힘드냐고?
죽을 만큼 힘들다.
지하 감옥에 다녀온 뒤로 사는 게 아는 게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밀레 자작 부인은 거의 매일 밤을 뜬눈으로 보내다시피 했다.
피 칠갑을 하고 제게 달려 드는 앤드니 백작 일가의 꿈 때문에.
그때는 미처 몰랐다. 자신이 이렇게 죄책감에 시달릴 줄은.
그저 제 아들과 남편 그리고 식솔들을 위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지.
하지만 일가족이 죽을 걸 빤히 알면서도 제 손으로 수프에 독을 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행여나 황비가 제게 사람을 붙여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냥, 윗전을 모시는 게 쉽지 않네. 굼벵이를 삶아 먹었냐, 좀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순 없겠냐, 이런 말만 매일 들으니까…….”
밀레 자작 부인의 푸념에 유모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마음 이해한다는 듯이.
“잠깐, 유모?”
“예? 왜 그러세요, 마님.”
“왜 내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을 짓는 거야?”
밀레 자작 부인이 아래위로 눈을 흘기자 유모가 재빨리 손사래 쳤다.
“아뇨, 아뇨. 마님처럼 잘 대해 주시는 귀족이 이 파라디움 땅에 또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저는 마님의 깊으신 은혜를 뼛속까지 깊이 새기고 있다니까요.”
밀레 자작 부인은 진실을 가늠하는 눈으로 유모를 빤히 바라봤다.
유모의 동공이 잘게 요동치는 것을 바라보며 핀잔을 건네려다 그만두었다.
‘나도 황비 앞에서 간도 쓸개도 빼 줄 것처럼 비굴하게 굴면 조금 더 나은 대접을 받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앤드니 백작 일가의 일과 새로 맡은 시녀장이라는 직책까지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기에, 밀레 자작 부인은 얼마간 휴가를 낸 참이었다.
황궁과 조금 떨어져 지내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어머니!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좀 전까지 들판에서 뛰어놀던 그녀의 아들이 짧은 다리를 잘도 놀리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아들의 손에는 푸른빛에 가까운 보라색 꽃이 들려 있었다.
밀레 자작 부인의 시선이 자연히 아들이 들고 있는 꽃에 닿았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저 꽃은 ‘보복’이라는 의미의 꽃말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