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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중독될 것 같아서 (113/148)


#113화 중독될 것 같아서
2023.07.22.


“바슈케르에까지 소식이 닿진 않았어. 나는 세이렌 후작 저에는 방금 막 도착한 참이고. 사실 영애와 하녀의 대화를 듣고 그럴 거라고 추측한 것뿐이거든.”

앰버와 잠깐 나눈 대화만 듣고도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마친 이카르에 새삼 놀랐다.

하지만 이카르가 자신을 놀리면서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부러 불퉁하게 내뱉었다.

“……절 놀리신 거였군요.”

“그런 표정 짓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표정이 어떤 표정이기에?

르네브가 반문하려는 순간 이카르의 얼굴이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 새초롬한 표정 굉장히 취향이거든.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귓가에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르네브는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돋아나는 걸 느끼며 이카르를 찌릿 째려봤다.

“저, 전 먹을 게 아니라고요.”

“글쎄.”

이카르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둥글게 휘어졌다. 뭔가 불길한데, 하고 생각한 순간 르네브는 뺨을 깨물렸다.

“……!”

아플 정도로 세게 깨문 것은 아니었으나, 르네브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아, 아파요. 폐하…….”

그러자 도망가지 못하도록 이카르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을 더욱 옭아맸다.

“장난은 이제 그만 치도록 하지.”

그녀의 어깨에 턱을 툭 내려놓은 채로 이카르가 말을 이었다.

“용건이 있다며 먼 나라의 황제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건 그대였을 텐데?”

사실이었지만, 앞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들었다면 오해할 만한 발언이었다.

물론 여기에 그의 말을 들을 사람이라곤 르네브뿐이었지만.

“어디 말해 봐, 내 주장이 틀렸는지.”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게 괘씸했는지 이카르가 르네브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무언가를 자꾸 씹고 깨물고 싶은 건 욕구불만이라고 했다.

며칠 보지 못했다고 무언가 잔뜩 쌓인 모양이었다.

르네브는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녀가 복수를 위해 파라디움에 남지 않았다면 이카르는 매일 밤 그녀의 침실로 찾아왔을 테니까.

르네브는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폐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지만요.”

“얼마든지.”

이카르가 후궁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는 우매한 황제처럼 고개를 까닥였다.

말 한마디만 하면 뭐든지 들어줄 것 같은 그의 여유롭고 오만한 태도에 조금 웃음이 났다.

“조만간 바슈케르에 사람을 좀 숨겨 두었으면 해요.”

“영애가 바슈케르에 숨겨 두려는 사람은, 여성이겠지?”

필시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이카르가 르네브를 쳐다봤다.

조금 전 이카르에게 농락당했던 게 살짝 억울했던 터라 르네브는 마음에도 없는 소릴 내뱉었다.

“……그 대상이 남자라면 폐하의 대답도 달라질까요?”

상상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이카르의 잘생긴 미간이 팍 구겨졌다.

“방금 건 못 들은 것으로 하지.”

“그런데 사람을 숨겨 달라고 하는 이유가 뭔지 묻지 않으시네요.”

“영애가 굳이 말하겠다면 듣기야는 하겠다만?”

이카르가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하고 싶거든 어디 해 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이후 있을 재판에서 중요한 증언을 할 사람이에요.”

“황비의 죽은 시녀 일 때문에 조심스러운 모양이군.”

“맞아요.”

“영애의 계획에 필요한 사람이라면, 그게 수백이든 수천이든 누구도 찾지 못하도록 바슈케르에 꼭꼭 숨겨 두겠다고 약속하지.”

그렇게 말하는 이카르의 표정이 너무 자신만만해 보였다.

“든든하네요.”

“이러니까, 정말 미녀에게 빠져서 나라를 망칠 황제가 된 기분이 뭔지 알 것 같군.”

이카르가 피식 웃으며 자조했다.

그러나 뱉은 말과 달리 그의 입꼬리는 곧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이카르는 르네브가 그에게 의지하는 걸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 기분이 꽤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래야 점점 더 영애가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될 테니까?”

이카르가 의문형으로 말을 끝마쳤다.

“폐하께서는 혹시, 제가 자주적인 게 싫으신가요?”

“그렇진 않아. 조금 더 내게 의지하길 바란 건 사실이지만. 혼자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게 조금 안쓰럽거든.”

이카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영애가 내게 의지하는 건 바슈케르 제국을 위한 일이기도 해.”

르네브는 이카르의 논리를 좀처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어째서 자신이 그를 의지하는 게 바슈케르 제국을 위한 일이란 말인가.

“황제가 평안해야 제국도 평안한 법이거든.”

“…….”

르네브는 순간 자신이 고서에나 등장하는 경국지색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제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일일이 반응하는 이카르 때문에.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이곳 일들을 정리하고 바슈케르로 돌아오란 뜻이야.”

제 일 때문에 혼자 외로웠을 그에게 미안했다.

르네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떨어뜨리자, 이카르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함께 세운 계획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난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대 생각은 어떻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폐하.”

이카르가 끙, 앓는 신음을 내뱉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이 정도면 정말 중증이군.”

“……?”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르네브의 속눈썹에 이카르의 입술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애원하는 그대의 모습에 중독될 것만 같아서.”

르네브를 바라보는 이카르의 눈빛이 한층 진득해졌다. 며칠 만나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녀는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

며칠 뒤 신문에 온 나라가 놀랄 만한 소식이 크게 보도가 되었다.

앤드니 백작 일가가 자신들의 목숨과 바꿔 1황자를 시해하려 했다고 의심받고 있는 황비의 결백을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둘로 갈렸다.

모시는 주인의 결백을 알리기 위해 그들이 목숨까지 바친 것을 보면 황비는 이 일과 무관하다고.

이건 황비와 관련이 있는 귀족들의 의견이었고, 또 다른 의견은 그들이 죽음으로 입막음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뭐가 되었든, 앤드니 백작 가만큼은 황족 시해라는 죄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앤드니 백작 가에서 그간 쌓아 올린 재산과 영토는 모두 황궁에 환수되었고, 죗값을 따져 물을 곳이 없게 된 황후는 앤드니 백작 일가의 시신을 단두대에 올렸다.

시체조차 명예롭지 못한 죽음이었다.

“아가씨. 그럼 이번 일은 이렇게 묻혀 버리는 건가요?”

앰버의 물음에 르네브는 체커보드를 응시한 채로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증인이 사라진 탓에 잠시 화를 피해 가게 된 것뿐이지.”

“…….”

상대도 없이 혼자 체스를 두는 르네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앰버가 입을 뗐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요. 전 말이죠, 아가씨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통 짐작할 수가 없어요.”

그제야 르네브는 시선을 들어 앰버를 쳐다봤다.

“왜?”

“뭐랄까요? 언제부턴가 엄청나게 변하신 것 같아요. 무덤덤하다고 해야 하나, 초연하다고 해야 하나…….”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굳이 따지자면 좋은 쪽이긴 하죠. 원래도 나이보다 성숙하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근데 최근엔…… 뭐라고 해야 하나…….”

턱을 감아쥐고 말을 고르는 듯한 앰버를 보며 르네브는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인생을 여러 번 살아 본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제 말이 우습다고 느꼈는지 멋쩍게 웃으며 앰버가 덧붙였다.

“아가씨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좀 상상력이 풍부하죠.”

르네브는 그저 피식 웃고는 체커보드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퀸을 보호하고 있던 상대편 체스 말 하나를 쓰러뜨렸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황비의 시녀 중에서도 가장 충성심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황비의 온갖 더러운 일 처리를 도맡아 온 것은 물론이고, 실상 황비의 책사나 다름없는 역할을 해 왔다.

황비는 이번 일로 가장 강력한 아군을 하나 잃었다. 그것도 제 손으로 그 아군을 쳐 낸 셈이고.

당장은 1황자 사건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배에 난 작은 구멍을 소홀히 하면 언젠가 배가 침몰하는 법.

그리고 황비는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의 배에 작은 구멍이 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르네브는 퀸을 보호하는 또 다른 체스 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앰버, 밀레 자작 부인의 동향을 알아봐 줘.”

“밀레 자작 부인이라 하시면…… 황비 전하의 시녀 중 한 분 아닌가요?”

앰버의 물음에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앤드니 백작 부인이 사라졌으니, 이제 시녀장 자리도 공석이 되었겠지.”

“……!”

잠시 눈을 깜빡이던 앰버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숨을 헉, 들이켰다.

“그럼 이제 밀레 자작 부인이 차기 시녀장이 되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르네브는 확신하고 있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의 자리를 밀레 자작 부인이 이어받게 될 것이라고.

이는 회귀 전에도 그러했다.

앤드니 백작 부인과 비교하자면 밀레 자작 부인의 능력은 다소 부족함 감이 있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이 황비를 향한 강한 충성심과 신분 상승이라는 또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움직였다면, 밀레 자작 부인은 현실에 안주하는 쪽에 가까운 성향이었으니까.

그래서 양심을 내다 버리고 황비의 비위를 맞추던 다른 시녀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안전 제일주의자였던 그녀는 점점 과감해지는 황비의 만행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 결과 단기간에 시녀장 직을 내려놔야 했으며 황궁을 떠난 뒤론 사교계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황비에게 제거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내부 고발자로 그녀만큼 적격자는 없었다.

르네브가 체스 말을 옮기며 제 계획을 다각도로 곱씹어 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르네브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앰버는 황궁 상황을 알아보러 갔고, 응접실엔 그녀 혼자였다.

“…….”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활짝 열린 응접실 문 앞에 드한이 서 있었다.

“악랄한 흉계라도 꾸미시는 것 같은 표정이군요, 영애.”

“드한 경. 오랜만이에요.”

반가운 얼굴의 등장에 르네브는 무감한 표정을 지우고 살짝 웃어 보였다.

“한가로이 혼자 체스를 두고 계신 줄 알았다면 서류라도 한 뭉텅이 챙겨 올 걸 그랬습니다.”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드한이 체커보드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은근히 비아냥거렸다.

언제나 그랬듯 르네브가 바슈케르를 떠나 있는 동안 혼자 황후의 업무를 보느라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음…… 이전에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요. 어차피 평생 해야 할 일인데, 혼전부터 고생하실 필요 없다고 말이죠.”

르네브는 곧바로 맞받아쳤다.

그러자 드한이 슬쩍 르네브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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