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넌 나하고 다를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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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넌 나하고 다를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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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넌 나하고 다를 것 같지?
2023.07.21.
“네 이년……!”
앤드니 백작 부인은 벌떡 일어나 밀레 자작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창살에 가로막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창살 틈으로 손을 뻗어 밀레 자작 부인의 드레스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발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허공에 헛손질만 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너무 무섭네.”
뱉은 말과 달리 밀레 자작 부인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게 더욱 앤드니 백작 부인의 분노를 자극했다.
“음식에 뭐, 뭘 넣은 거야!”
혀가 굳어 가면서 발음이 쉽지 않았지만, 앤드니 백작 부인은 빽 소리쳤다.
“다 죽어 가면서도 기세는 여전하시네. 생애 마지막 질문은 그걸로 충분하실까요?”
“……?”
밀레 자작 부인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음식에 뭘 넣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그 음식에 독을 넣으라고 지시했는지 그걸 물어봤어야죠.”
밀레 자작 부인의 말투는 흡사 어린아이를 훈계하는 듯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괴로워하며 비틀거리다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누가 자신과 제 가족이 먹을 음식에 독을 타도록 사주했는지.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나면 앤드니 백작 부인의 인생에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높은 신분도, 부유하고 윤택한 생활도. 이런 냄새나고 더러운 지하 감옥에서 죽는 마당에 아무 쓸모가 없었다.
하다못해 명예마저 잃게 되겠지.
끝끝내 황비의 이름을 내뱉지 않는 앤드니 백작 부인을 향해 밀레 자작 부인이 혀를 쯧쯧 찼다.
“쓸데없이 고집스럽고 충성스럽긴. 미련하게 평생을 한 사람에게 충성했는데 결국, 이 꼴이네요.”
옅게 한숨을 내쉰 밀레 자작 부인이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의 딸과 남편을 힐끔 바라보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이지러지는 시야 속에서 멀어지는 밀레 자작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앤드니 백작 부인은 중얼거렸다.
“……넌 나하고 다를 것 같지?”
밀레 자작 부인은 걸음을 멈춘 채로 뒤를 돌아봤다.
“죽기 직전까지 저주의 말이나 내뱉다니…….”
참으로 그녀다웠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황비의 시녀 중에서도 가장 황비에게 충성하는 인물이었다.
황비가 죽으라고 말 한마디만 하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죽는시늉이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충성스러움과 앤드니 백작 부인이 바꾼 것은 남편의 백작 작위였다.
하급 귀족 가에서 태어난 그녀가 더 나은 신분의 남편과 결혼하지 않고서 올라갈 수 있는 신분 체계의 정점을 찍은 셈이었다.
그래서 한때 밀레 자작 부인은 그녀를 동경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아니지만.
황비에게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보고하러 가는 동안 밀레 자작 부인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말을 밀어내야 했다.
‘……넌 나하고 다를 것 같지?’
***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온 밀레 자작 부인은 곧장 황비를 찾아갔다.
그녀는 곧 있을 저녁 만찬회장에 가기 위해 한참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황비 전하.”
황비가 밀레 자작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밀레 자작 부인은 황비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곧 간수들에게 발견될 겁니다.”
“저항은 하지 않던가?”
“……예.”
황비가 옅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황후도 더는 이 일을 물고 늘어지진 못하겠지.”
그러자 곁에서 황비의 치장을 돕던 다른 시녀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크게 이길 패를 쥐었다고 기고만장했을 텐데, 황후의 높은 코가 납작해졌겠는걸요.”
“말해 뭐 해요. 지금쯤 혈압이 올라 황궁의를 부르라며 소리치고 있을지도요?”
시녀들이 속살거렸고, 황비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들과 웃음을 터뜨렸다.
“…….”
밀레 자작 부인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 그들의 모습을 관조했다.
증인을 없애기로 하고 지시를 내린 건 황비였고, 밀레 자작 부인은 이제 엄연한 그녀의 최측근으로서 일을 속행했다.
그리고 다른 시녀들은 앤드니 백작 일가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아직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황비가 멀찍이 떨어져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있는 밀레 자작 부인에게 손짓했다.
“장신구 함을 가져오시게.”
황비의 말에 시녀들이 일순 동작을 멈췄다.
“…….”
지금까지 황비의 장신구 함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시녀장인 앤드니 백작 부인뿐이었다.
당장은 그녀가 이 자리에 없으니 대신 밀레 자작 부인에게 일을 맡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시녀들은 이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길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밀레 자작 부인, 거기 계속 서 있을 건가요?”
“아닙니다, 황비 전하.”
황비의 채근에 밀레 자작 부인은 냉큼 옆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순 동작을 멈추고 침묵하던 시녀들 또한 다시 황비의 치장에 속도를 높였다.
“화, 황비 전하! 급히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순간, 트왈렛 룸으로 시종이 다급히 찾아왔다.
황비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덧붙였다.
“애, 앤드니 백작 일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습니다!”
“……!”
시녀들이 헉, 숨을 들이켜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침입자의 흔적은 없었나요?”
황비의 물음에 시종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조사가 더 필요하겠지만,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황제 폐하께서는 이 일에 대해 뭐라고 하시던가요?”
“관련자들을 조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시종의 대답에 황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말려 올라갔다.
황비에게 책임을 묻고자 했다면 당장 그녀를 불러들이란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가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았어요. 그래도 내 측근이었던 자들이니…… 앤드니 백작 일가의 시신 수습과 뒷마무리를 부탁하죠.”
황비가 그만 나가 보라고 손짓하자 시종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서둘러 줘요. 황후께서 또 황제 폐하의 속을 뒤집어 놓으실 예정이니 제가 가 봐야겠군요.”
황비의 말에 곧 시녀들은 아무렇지 않게 황비의 치장에 열을 올렸다.
옆방에서 장신구 함을 챙긴 밀레 자작 부인은 그 광경을 마주하고 잠시 걸음을 멈춘 채로 생각했다.
‘나도…… 저랬나?’
너무나 태연한 황비와 시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몇 년 전 헨리케 자작 영애가 실종되던 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 전 정말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황비 전하, 이건 모함이에요. 제발 저를 믿어 주세요!’
당시 시녀들은 황비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어린 헨리케 자작 영애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밀레 자작 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앤드니 백작 부인이 딱 버티고 있는 한 언제까지고 2인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새로운 다크호스가 나타난 셈이었으니.
그런 헨리케 자작 영애가 황비의 시녀 직에서 내쫓기다시피 했을 때 시녀들은 서로 말은 안 했으나, 내심 반기는 분위기였다.
황비의 시녀 중 누군가가 헨리케 자작 영애를 밀어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누구도 나서서 헨리케 자작 영애를 두둔하지 않았다.
그게 황비의 뜻이라 믿으며.
너무나 태연한 제 눈앞의 황비와 시녀들을 보며 밀레 자작 부인은 생각했다.
황비는 어떤 일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고선 제 지시로 일가족이 몰살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리 태연할 순 없는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밀레 자작 부인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황비가 1황자 암살 시도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으면 그녀의 시녀인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제 가문을 지키기 위해 황비의 지시에 따랐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서워졌다.
‘자칫 잘못해서 나 또한 황비의 눈 밖에 나면 어쩌지?’
그럼 자신도, 제 가족들도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이십 년 가까이 함께한 앤드니 백작 부인조차 파리 목숨쯤으로 취급하는 황비다.
그녀에게 제 목숨값의 가치는 어떠할까?
‘넌 나하고 다를 것 같지?’
다시금 앤드니 백작 부임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건 저주가 틀림없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안에 황비를 향한 불신과 불안이라는 감정을 심어 놓고 떠났다.
***
앤드니 백작 일가의 소식을 접한 르네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딘지 석연치가 않았다.
르네브가 아는 그녀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으니까.
“아무리 황비 전하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렇지. 일가족이 한날한시에 목숨을 끊다니…… 너무 비극적이에요.”
앰버가 미간을 모은 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글쎄. 정말로 주인을 향한 충성심이었을까……?”
르네브의 말에 앰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였다.
“자살당한 거겠지.”
문 쪽에서 나지막한 저음이 들려왔다.
르네브와 앰버의 고개가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아갔다.
언제 온 건지 문가에 이카르가 서 있었다.
“폐하, 언제 오셨어요?”
“지금.”
처음부터 여기 있던 사람처럼 유유히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이카르를 보며 앰버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벅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앰버를 향해 이카르가 말했다.
“차는 되었다.”
“예, 황제 폐하…….”
방해하지 말라는 뜻임을 알아들은 앰버가 냉큼 응접실을 나갔다.
자연스럽게 르네브 쪽으로 다가온 이카르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휘감았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가 떼어 냈다.
“하, 갈수록 애교가 늘어서 큰일이군.”
“그럼 앞으로는 하지…… 말까요?”
르네브는 이카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이카르가 르네브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대 때문에 내 명이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나날이 늘어 가는 영애의 애교를 꼭 봐야겠어.”
이카르가 아주 자연스럽게 르네브를 제 무릎 위에 앉혀 놓으며 덧붙였다.
“방해할 사람은 없으니, 안심하고 나에게만 집중하도록.”
“그런데 벌써 바슈케르에도 이 소식이 전해진 건가요?”
앤드니 백작 일가에 관한 일은 아직 극비일 터였다.
“서운하군.”
이카르가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답지 않은 귀여운 행동에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르네브는 빠르게 물었다.
“혹시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폐하를 서운하게 한 건가요?”
“내 정보력, 아니, 바슈케르의 정보력을 그대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지.”
“저도 방금 전달받은 소식을 알고 계시기에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결단코 바슈케르를 얕잡아 보려던 건 아니었어요.”
르네브는 혹여나 이카르가 오해할까 걱정하며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러자 이카르가 픽, 웃으며 르네브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가 떼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