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침몰하는 배 (111/148)


#111화 침몰하는 배
2023.07.20.


에시카가 항상 루시우스와 만나던 응접실 근처 복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려왔다. 응접실 문이 미세하게 덜 닫힌 탓인 듯했다.

에시카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투옥되었다고 하던데, 어머니께서는 부디 이 일과 무관하시길 바랍니다.”

화가 난 듯 살짝 높아진 루시우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요. 물론입니다. 다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 황자께서는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답니다.”

곧 황비가 그를 다독였다.

‘앤드니 백작 일가의 투옥 건으로 루시우스와 황비가 다투는 건가?’

그때 돌연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살짝 열려 있던 문이 닫혀 버렸다.

그 때문에 더 이상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수는 없었으나, 에시카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루시우스가 저토록 흥분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앤드니 백작 부인의 투옥 건은 황비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었으니.

황비가 이번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면 그녀의 아들인 루시우스 또한 무사할 리가 없었다.

황위 쟁탈에서 완전히 밀리는 건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황자라는 신분에까지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황제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이전까지 황비가 벌인 크고 작은 문제들은 황제 선에서 해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황족 시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만약 황제가 황비를 감싸지 않기로 결정을 내리면 루시우스도, 그만을 의지하고 있는 에시카도 끝이었다.

‘일단은 침실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겠어.’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들켜선 안 되었기에 에시카는 이만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오던 황비와 딱 맞닥뜨렸다.

“황비 전하를 뵙습니다.”

에시카는 놀란 마음을 감추고 황비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에시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저…….’

에시카는 속으로만 황비의 무례를 비난하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우스는 문 쪽을 등지고 서 있었다.

“황자 전하께서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루시우스가 그제야 에시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외출했다고 하던데 일찍 돌아온 모양이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밖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에시카는 살짝 미소 지었다.

오늘 외출해서 르네브를 마주쳤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괜히 루시우스 앞에서 르네브 이야기를 꺼내 좋을 게 없었으니까.

오늘의 외출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조금 전 모자의 대화를 엿들었던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저 황자 전하. 사과드릴 게 있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황비 전하와 나누시던 대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밖에 있던 자가 그대였나 보군.”

루시우스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걸 보면 먼저 사실대로 말한 게 정답이었다.

“그래. 그대는 이 일 또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견할 수 있겠나?”

최근 들어 그는 에시카가 지닌 능력을 조금 의심하는 것 같았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눈치챈 것도 같았고.

그리고 그러한 의심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상황이 펼쳐진 것에 기뻐하며 에시카는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께서 이번 일로 마음 쓰시는 건 응당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걱정하시는 것과 달리 잘 풀릴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말할 수 있지?”

“황후 측에선 앤드니 백작 가가 황비 전하의 사주로 1황자 전하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주장하시겠지요.”

“…….”

“황비 전하께서는 앤드니 백작 일가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 주장하고 계시고요.”

루시우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면 먼저 앤드니 백작 가의 자백이 필요합니다. 여러 증거도 필요할 테고요.”

“…….”

“하지만 앤드니 백작 가와 황비 전하를 엮을 증인이 전부 증발해 버린다면 어떨까요?”

“의혹만 남고,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될 거란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는 여전히 황비 전하를 아끼십니다. 아랫사람 관리를 잘못했다는 명목으로 약간의 벌을 받게 하시겠지만, 아마 그대로 이번 일을 묻으려 하실 겁니다.”

잠시 침묵하던 루시우스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기가 막히지만……. 그래, 그 정도로 진실한 사랑이라 이건가.”

황비를 향한 황제의 과도한 애정을 비웃으면서도 이제는 자신도 그 마음을 알 것 같다는 듯이.

그게 에시카의 마음에 또 한 번 비수를 꽂는다는 것도 모르고.

***

지하 감옥 안은 어둡고 습해 눅눅한 공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죽음의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속에서도 앤드니 백작 부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곧 황비 전하께서 우리를 구해 주실 테니 조금만 더 버티렴.”

앤드니 백작 부인은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는 제 딸을 다독였다.

반쯤은 저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더는 버틸 힘이 없었으니까.

일생을 따뜻하고 안전한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던 귀족들에게 지하 감옥의 환경은 너무나 가혹했다.

이대로 며칠 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면 가족 중 누군가는 크게 몸이 쇠할 것이 분명했다.

“그만 좀 하시오. 부인. 황비는 우리 가문을 버린 것이오. 그렇지 않고선 벌써 며칠이나 이곳에 갇혀 있는 걸 빤히 알면서도 우릴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소.”

남편이 다 쉬어 빠진 목소리로 지껄였다.

며칠 사이 통통했던 남편의 얼굴도 야위어 있었다.

“그래요. 어머니. 황비 전하만 믿고 있다가는 우리 모두 굶어 죽고 말 거예요.”

구석에 모로 누워 있던 딸도 남편의 말을 거들었다.

“저런 부정적인 말은 들을 필요 없단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한심한 눈빛으로 남편을 쏘아보며 딸아이의 귀를 틀어막았다.

아이까지 남편처럼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사교계에 발 들이기 전부터 황비를 따랐다. 그녀가 미래의 황후가 될 거라고 굳게 믿으며.

그녀가 황후가 되면 그녀를 모시는 제 삶 또한 극적인 변화를 이룩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황제는 다른 여자를 황후로 들였고, 지금의 황비는 그대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타개책을 마련해 낸 건 앤드니 백작 부인의 명석한 두뇌와 황비의 빠른 실행력 덕분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일궈낸 제 인생 최대의 역작이 지금의 황비였다.

그런 황비를 부정한다는 건 그녀에겐 제 인생을 통제로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렇게 쉽게 죽을 줄 알고.”

앤드니 백작 부인은 주문을 외듯 같은 말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남편은 물론이고 딸까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등을 돌렸을 때였다.

“……누가 왔나 봐요.”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지하 감옥 안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렸다.

또각또각.

차가운 돌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굽 소리로 보아 방문자는 여성인 듯했다.

“그거 보세요. 제가 뭐라고 했나요? 황비 전하께서 우리를 모른 체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말했죠?”

앤드니 백작 부인은 우쭐거리며 남편을 흘겼다.

“내, 내가 황비 전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나 보오.”

흐리멍덩했던 눈을 크게 뜨고 앤드니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서둘러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그녀의 딸도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드니 백작 일가는 황비를 맞을 최대한의 준비를 끝마치고 쇠창살 너머를 응시했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해 모습은 꾀죄죄했지만, 눈빛만큼은 희망이 가득했다.

황비가 일을 잘 해결했으며 자신들을 이곳에서 꺼내 줄 거라고.

그러나 철장 앞으로 다가온 이는 황비가 아니었다. 황비의 시녀 밀레 자작 부인이었다.

“세상에나…….”

밀레 자작 부인은 앤드니 백작 일가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쇠창살을 붙잡고 그녀에게 물었다.

“밖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나요?”

밀레 자작 부인이 작은 틈 사이로 나무 트레이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먹을 것을 챙겨 왔으니, 일단 허기부터 채우도록 해요.”

나무 트레이 위에는 묽은 수프 세 그릇과 빵이 놓여 있었다.

“어서요. 시간이 없어요.”

밀레 자작 부인이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은 채 입구 쪽을 힐끔거렸다.

고소한 빵과 수프 냄새에 반응이라도 하듯 빈 위장이 요동쳤다.

“그래요. 어머니 간수의 눈을 피해 식사를 챙겨 온 밀레 자작 부인의 정성을 봐서라도 얼른 먹어요.”

“그럽시다. 먹으면서 설명을 듣도록 합시다.”

딸과 남편이 걸신들린 사람처럼 제 몫의 빵과 수프 그릇을 챙기며 말했다.

할 수 없이 앤드니 백작 부인은 제 몫의 빵을 집었다. 그리고 반을 뜯어 딸에게 내밀었다.

“뭐 하는 거요?”

허겁지겁 그릇째로 수프를 마시던 남편이 앤드니 백작 부인을 쳐다봤다.

“저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조금이라도 딸을 더 먹이려는 어미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눈치도 없이 딸의 빵을 탐냈다.

“네 몫이 조금 더 많은 듯하니 나누자꾸나.”

“……네?”

딸이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으며 앤드니 백작 부인을 쳐다봤다.

앤드니 백작 부인이 남편에게 핀잔을 건네려던 찰나 밀레 자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잠깐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겨우겨우 설득해서 들어오게 된 거라…….”

밀레 자작 부인이 제가 다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충분히 드실 만큼 넉넉하게 챙겨 오기는 힘들었어요. 너른 양해 부탁드려요.”

평소 앤드니 백작 부인은 가문이나 황비의 신임 면에서나 밀레 자작 부인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그녀 앞에서 제 가족의 옹졸한 치부를 드러낸 것이 무척이나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배부터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먹어야 힘이 나니까, 그래야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자가 누군지 찾아내서 복수도 할 게 아닌가.

앤드니 백작 부인은 숟가락은 없는지밀레 자작 부인에게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릇째 들고 볼품없이 수프를 마셨다.

건더기는 하나도 없었지만, 따뜻한 국물이 목구멍으로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평생 오늘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 순간이었다.

철제 그릇이 돌바닥을 요란하게 나뒹굴며 듣기 싫은 소음을 자아냈다.

“……?”

그녀의 딸이 제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리며 입술을 뻐금거렸다.

“왜, 왜 그러니……!”

앤드니 백작 부인은 당황하며 서둘러 딸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편이 발작적으로 기침을 토했다.

그 순간 울컥 신물이 올라왔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피를 토하며 표독스럽게 밀레 자작 부인을 쏘아봤다.

밀레 자작 부인은 눈매를 휘어 웃더니 입가에서 손수건을 거둬들이며 한마디 건넸다.

“그러니까, 평소에 마음을 곱게 썼어야지.”

1689885056425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