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원래의 자리로 (110/148)


#110화 원래의 자리로
2023.07.19.


에시카는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봤다.

잿빛이 살짝 감도는 은발에 바슈케르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디자인의 드레스.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있었으나, 가면 사이로 드러난 자색 눈은 똑바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다가와 사라진 솔티의 왕녀가 여기 있다며 소리칠 것만 같았다.

에시카는 눈만 살짝 굴려 입구를 바라봤다.

‘이 인파를 헤치고 입구까지 가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손끝이 살짝 떨려 오기 시작했지만, 에시카는 입구까지의 동선을 눈으로 훑으며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혹여나 달리다가 드레스 자락에 다리가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잠깐 실례할게요.”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하에 에시카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고지가 코앞이었을 때였다.

누군가 에시카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

에시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헉, 숨을 들이켰다.

“영애, 여기 잊으신 물건이요.”

이내 조금 낮지만, 차분한 목소리가 귀 언저리에서 들려왔다.

‘잊은 물건이라니?’

에시카는 차마 뒤돌아볼 생각은 못 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재차 말했다.

“영애의 장신구 같은데……. 아닌가요?”

‘장신구라니?’

에시카는 재빨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상대의 말과 달리 반지와 팔찌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그쪽에서 착각하신 것 같네요. 그건 제 것이 아닌…….”

대충 대꾸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시야 끝에 긴 은발이 들어왔다. 에시카는 불안한 심정을 억누르고 슬쩍 눈을 굴려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말을 걸어온 사람은 르네브가 맞았다.

“제가 쭉 보고 있었는데 이걸 흘린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시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에시카의 눈앞에 진주 귀걸이 한 알을 흔들어 보였다.

에시카는 대충 둘러대고 서둘러 자리를 뜨고자 했다.

“무언가 착각하신 것 모양이네요. 그건 제 것이…….”

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르네브가 제 손목을 거머쥐었다. 에시카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내렸다.

친절하게도 르네브가 에시카의 손바닥에 진주 귀걸이 한 알을 놓아 주고는 싱긋 웃었다.

에시카는 그제야 서둘러 귀를 만져 보았다.

정말로 진주 귀걸이가 한쪽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뭐지 설마……? 지금 날 못 알아보고 이러나?’

가면에 얼굴이 가려졌다고는 하나 서로의 얼굴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걸음걸이나 자세, 평소 자주 하고 다니는 옷차림 등으로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르네브의 반응으로 보아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다.

에시카는 비죽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참 친절한 분이시네요.”

“뭘요. 잃어버린 걸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려는 것뿐인데요.”

“……?”

분실물을 찾아주며 건넨 말치곤 좀 의미심장했으나, 에시카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에시카는 그녀에게 눈인사를 살짝 건네고는 몸을 돌렸다.

놀라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쫙 펴고 총총 홀을 빠져나왔다.

‘이다지도 눈썰미가 없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에시카는 여전히 가면무도회가 한창인 홀을 살짝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

최근 파라디움 귀족들 사이에서는 루시우스가 웬 남작 영애 한 명을 끼고 돈다는 소문이 한창이었다. 황궁에 그 남작 영애를 위해 침실을 내어 주기까지 했다고.

르네브는 곧바로 그 영애의 정체를 알아봤다.

그 결과 루시우스가 곁에 두는 영애가 크로프트 남작 가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회귀 전처럼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건가.’

그때는 다들 에시카를 가문 이름으로 부르는 대신 레이디 에시카 혹은 귀부인이라고만 불렀다.

가문도 작위도 드러나지 않는 호칭이었기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에시카만큼은 그 호칭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다들 저분만 작위도 가문도 없이 레이디 에시카라고 부르는 거죠?’

어머니를 따라 티 파티에 참석한 어린 영애가 순수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사교계에 막 입문한 영애가 할 법한 질문이긴 했다.

‘……그런 게 있어요. 언젠간 영애도 알게 되겠죠. 계속 모르는 게 더 좋겠지만.’

연륜 있는 한 귀부인이 그렇게 일축했다.

보통 파라디움 귀족 여성의 신분은 아버지나 남편의 작위를 따랐다.

이카르의 주치의 멜리타처럼 직접 자신이 작위를 승계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해서 황제의 정부가 미혼일 경우 적당한 가문의 남성을 남편으로 붙여 주고는 했다.

눈속임용으로.

물론 르네브도 처음 그러한 사실을 접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법적으로 남편이 있는 유부녀가 황제의 정부가 되다니.

하지만 루시우스는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

에시카를 다른 남자의 가문에 입적시키지 않은 것이다.

훗날 르네브를 밀어내고 에시카에게 황후의 관을 주기 위함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심지어 레이디 에시카라는 호칭을 선망하는 영애들도 적잖이 있었다.

파라디움 제국 내 유일무이한 권력을 지닌 젊고 잘생긴 황제의 연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칭호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뿐이 아니었다.

가끔 에시카는 강아지처럼 순진한 얼굴로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폐하, 어째서 저는 안되나요? 황후 폐하께서 초대되신 자리라면 저도 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에시카의 그 한마디에 만찬장에 있던 귀족들은 기함했다. 각국의 황제와 왕이 모이는 자리에 정부가 동참하겠다고 하다니…….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에시카가 제기한 의문을 바로 잡으려 들지는 않았다.

루시우스가 에시카를 아주 많이 귀애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과 똑같이 흘러가는 상황 때문인가?

불현듯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르네브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나는 잃어버린 걸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뿐이야.”

르네브는 급히 홀을 빠져나가는 에시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있지만…….

과거에 휩싸여 있던 것도 잠시 르네브는 이내 연회 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우연히 에시카를 만난 것은 덤이었고, 오늘 르네브가 가면무도회를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회귀하기 전, 황녀가 바슈케르로 떠나고 얼마 뒤의 일이었다.

나이 있는 귀부인들만 상대하기 지루하다는 이유로 황비는 미혼의 영애 하나를 시녀로 들였다.

그녀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예술적 조예가 깊었다.

명화에 대해서도 잘 알았고, 특히 시 낭송을 잘했다.

처음에는 황비도 재능 많은 그녀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까다로운 황비의 눈에 찰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 영애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비쳤을까?

역시 황제가 그녀에게 은근한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황비는 이를 눈치채자마자 일을 꾸몄고, 곧 그녀는 황궁에서 쫓겨났다.

탐욕스러운데다 손버릇이 나쁘다는 이유로.

황비는 제 물건에 손을 댔으니 사형에 처해도 지나치지 않으나, 그간의 정을 봐서 너그러이 용서해 준다고 했다.

하지만 파라디움 황궁에서 쫓겨난 뒤로 영애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그녀의 가족들은 호소했다.

황궁에서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노라고.

그러나 그녀 가족들의 하소연에 귀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황비는 모르쇠로 일관했고, 황제 또한 눈에서 멀어지자 금방 그녀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러 미심쩍은 정황이 있긴 했으나 회귀 전의 르네브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때는 제 살기에 바빴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을 그 영애의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헨리케 자작 영애. 잠깐 말씀 나눌 수 있을까요?”

르네브는 사람들 틈에서 붉은 머리를 높게 묶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절 아세요?”

헨리케 자작 영애가 경계 어린 눈을 하고 되물었다.

“영애의 언니에 관해 제보하고 싶은데…….”

르네브가 그렇게 말문을 열자 헨리케 자작 영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

에시카는 씩씩거리며 제 침실로 돌아왔다.

르네브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긴 했지만, 그곳에 계속 머무르기에는 불안했기 때문이다.

원작에선 3년 후 황궁으로 돌아온 황녀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따라다녔다.

바슈케르 황제의 후궁들의 거처인 화원에서 지냈다는 이유로.

르네브 또한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으니 평화 협정 후에는 황제의 노리개였다는 비난을 들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황제의 약혼녀가 되어 버렸으니…….

게다가 달라진 건 또 있었다.

바로 바슈케르 제국의 위상이었다.

전부터 파라디움 제국민들은 야만스러운 문화와 풍습을 가졌다며 바슈케르 제국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파라디움의 젊은 귀족들을 통해 바슈케르 문화가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그 분위기가 달라졌다.

오히려 바슈케르의 문화가 선진하다며 떠받드는 이마저 생겨났다.

‘그나저나, 루시우스에게 쓸 만한 정보를 뭐라도 하나는 알려 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오늘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것이었지만, 허탕을 친 셈이었다.

“레이디, 일찍 돌아오셨네요?”

침실로 돌아온 에시카를 보며 하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르네브가 파라디움으로 돌아온 뒤부터는 침실에서만 지냈지만, 그전에는 여러 사교 모임에 활발히 참석했다.

그리고 에시카는 그때마다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황궁으로 돌아왔다.

한참만의 외출치고는 다소 이른 귀가였으니, 하녀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됐어.”

그러나 일일이 설명하기는 귀찮았기에 에시카는 대충 대답하고는 소파 앞으로 비적비적 걸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황자 전하께서 레이디를 찾으셨는데 잘됐네요. 귀가하시는 대로 뵙자고 그러셨어요.”

“……그래?”

루시우스를 보는 건 좋았다.

그러나 동시에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이전에 루시우스가 제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방법을 찾아볼 약간의 시간을 주도록 하지.’

전보다 확연히 서늘해진 루시우스의 목소리에 이어 제게서 차갑게 등을 돌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르네브에게 가 봐야 한다고.

그날 이후로 에시카는 한 번도 루시우스와 만나지 못했다.

일부러 피하려 하기도 했으나, 실상 루시우스가 에시카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르네브와 이카르를 파혼시킬 만한 묘안을 요구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고민해 봤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작에 나오지 않는 전개이기도 하고.

“별로 기뻐 보이지 않으신데…… 혹시 이전에 황자 전하와 다투기라도 하셨나요?”

미적거리는 에시카에게 하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전까지 에시카는 루시우스가 보자는 소리에 곧장 몸을 일으키곤 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나…… 참 쉬운 여자였네.’

에시카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바보 같은 자신을 자조했다.

“기쁘지. 기쁘지 않을 리가…….”

에시카는 힘없이 말하곤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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