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엎친 데 덮친 격 (109/148)


#109화 엎친 데 덮친 격
2023.07.18.


“……뭐?”

조금 전부터 은근히 이쪽을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대놓고 앤드니 백작 부인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잠시 당황했으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는 얼른 말했다.

“대관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비싼 밥 먹고 웬 헛소리를…….”

그때 저택 입구로 서너 명의 귀족들이 약간의 타는 냄새를 풍기며 걸어 들어왔다.

새로 들여온 시가를 태우러 정원에 나갔다가 저택으로 되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이 저택의 주인 카일란듀 공작이 섞여 있었다.

“앤드니 백작 부인?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시는군요. 괜찮으십니까?”

카일란듀 공작이 물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카일란듀 공작의 눈에 띄다니!’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카일란듀 공작은 언제나 웃는 얼굴의 중년으로 언뜻 보기엔 인자해 보였다.

그 때문에 그를 잘 모르는 누군가는 카일란듀 공작의 인품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 그는 호색한에 남의 말을 옮기길 좋아하는 매우 저열한 자였다.

앤드니 백작이 황궁에 붙잡혀 갔다는 하녀장의 말은 분명 어떤 오해에서 비롯한 것일 테다.

그러나 이 일이 카일란듀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며칠 안으로 사교계에 소문이 쫙 퍼질 것이었다.

“친절도 하시네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일란듀 공작님.”

앤드니 백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곤 갑자기 저택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만한 변명거리를 찾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딸이 아프다고 할까.’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앤드니 백작 영애의 몸이 약하다는 것으로 오해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제 딸은 결혼 시장에서 후 순위로 밀리게 되어 있다.

사내들은 그저 가문 좋고 후계를 잘 낳아 줄 만큼 몸이 튼튼한 여자를 원할 뿐이니…….

‘아니야. 그럴 순 없어.’

앤드니 백작 부인은 서둘러 다른 변명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일에 대처할 변명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부인?”

카일란듀 공작이 대답을 채근했다.

결국, 앤드니 백작 부인은 눈물을 머금고 입을 뗐다.

“저희 딸아이가 몸이 좋지 않다고 소식을 전해 왔답니다. 그래서 황급히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기껏 초대해 주셨는데 결례를 무릅쓰고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이런, 이런……. 그거 큰일이로군요. 가족의 안위만큼 중요한 건 없지요. 제게 발이 빠른 말들이 몇 있으니, 그걸 타고 가시지요.”

“아니, 저…….”

앤드니 백작 부인에겐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카일란듀 공작이 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차를 대기 시키게.”

“예, 공작님.”

강하게 거절하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었기에 앤드니 백작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카일란듀 공작 가의 마차에 올랐다.

언뜻 그녀를 걱정한 카일란듀 공작의 따뜻한 배려같이 보일 수 있었으나, 실상은 앤드니 백작 가의 비보를 가장 먼저 알아내기 위함일 가능성이 컸다.

정보는 힘이고, 누구보다 빠른 정보를 얻는다는 건 귀족 사회에서 매우 중요했으니까.

“마거릿!”

“예? 예. 마님…….”

백작 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그녀는 당황해 눈을 껌뻑거리는 하녀장에게 빽 소리치고 싶었다.

여태까지의 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은 거냐고.

하지만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힘겹게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하녀장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표독스러웠다.

“설명해 봐.”

“가주님께서 황실 기사단에게 붙잡혀 가셨어요!”

“왜? 대체, 무슨 일로?”

“화, 황족 시, 시해 혐의라고…….”

“……뭐?!”

앤드니 백작 부인은 휘청이며 이마를 짚었다.

“마, 마님…….”

“그런데 저택을 급습한 거라면 어째서 너는 붙잡히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마님의 심부름 품목을 사러 번화가에 갔다가 저택으로 돌아가는데…….”

마침 황실 기사단이 백작 저를 점거한 상황을 보고 그 사실을 알리러 몰래 빠져나왔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저택으로 돌아가면 자신도 붙잡힐 것이다. 그럼 황비의 도움을 받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짧은 고민 끝에 빠른 결정을 내렸다.

‘이대로 저택에 돌아가는 건 너무 위험해.’

어느새 저 멀리 백작 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서둘러 마부석 쪽 마차 벽을 세게 두드렸다.

“왜 그러십니까, 귀부인?”

“마차를 좀 세워 주게.”

“예? 여기서 말입니까? 가까워 보이더라도 걸어가시려면 한참 걸릴 텐데요.”

“안까지 들어갈 필요 없네. 여기서 마차를 세워 주게.”

“저는 공작님께 귀부인을 댁까지 안전하게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고집스러운 마부의 태도에 앤드니 백작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둘러댈 변명을 떠올렸다.

“최근에 비가 많이 내렸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겠지?”

“예. 그 일로 제법 고생을 했지요.”

“아직 저택 앞 땅이 고르지 않네. 그 때문에 마차 바퀴가 흙바닥에 파묻히는 일이 벌써 몇 번이나 있었네. 카일란듀 공작님께서 빌려주신 마차를 험히 다룰 수는 없겠나?”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순순히 수긍하면서도 마부는 여전히 어딘지 석연찮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럴 시간이 없네. 어서 마차를…….”

앤드니 백작 부인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백작 저를 보며 다급하게 마부를 채근할 때였다.

“마차를 세워라!”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황실 기사들이 앤드니 백작 부인이 탄 마차를 에워쌌다.

“……!”

앤드니 백작 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택 주변에 매복이 있었구나.’

***

‘여기라고 했는데……. 왜 안 오지?’

앰버가 대장간 앞을 초조하게 서성일 때였다.

마른 장작을 수북이 쌓은 수레를 끌고 오던 스미스가 물었다.

“……앰버?”

앰버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뭐야. 스미스였잖아…….”

가슴을 쓸어내리는 앰버를 보며 스미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응? 아, 그럴 일이 있어. 난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던 길 가는 걸 추천할게. 스미스.”

차갑게 말하고 몸을 돌리는 앰버에게 스미스가 불퉁하게 내뱉었다.

“앰버. 좋은 시절 금방 지나간다. 이런 데서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대장간이든 마구간이든 가서 젊은 총각들 좀 꼬셔 봐.”

수레를 밀고 가며 스미스는 얼굴만 예쁘면 뭐 하냐며 중얼거렸다.

‘저, 저놈이!’

앰버는 멀어지는 스미스의 뒤통수에 대고 냅다 소리쳤다.

“장가를 못 가고 있는 건 스미스 너겠지!”

사실이었다.

웬디는 완강하면서도 신념이 강한 여자였다.

아가씨께서 먼저 결혼을 하시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며 차일피일 스미스와의 결혼을 미룬 게 어언 3년째였다.

“너, 너……!”

뒤를 돌아본 스미스가 앰버를 매섭게 쏘아봤다.

그러나 곧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대장간으로 들어가는 스미스의 넓고 우람한 어깨가 한없이 초라하게 처졌다.

‘좀…… 심했나.’

르네브를 따라 파라디움으로 돌아온 뒤로 앰버는 자연스럽게 예전처럼 후작 저 고용인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그래서 스미스가 많이 힘들어한다는 것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게다가 대장간에서 보고 배워 말은 저렇게 험하게 해도 스미스는 제법 좋은 녀석이었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웬디가 스미스에게 청혼받았다며 들떠 있을 때도 뜯어말리지 않을 정도로.

‘쟤가 좀, 불쌍하긴 하지.’

스미스에게 측은한 마음을 품으며 시선을 떨어뜨렸을 때였다.

등 뒤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왔나 보다!’

앰버는 스미스에 관한 생각은 싹 지우고 몸을 돌렸다. 스미스 또래의 젊은 청년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세이렌 후작 저의 고용인 중 앰버가 모르는 얼굴이란 없었으니 황궁 소식을 전하러 온 이가 맞는 것 같았다.

“…….”

앰버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청년을 빤히 바라봤다.

응?

그냥 지나치려는 건가 싶은 순간, 청년이 앰버의 손에 둘둘 말린 작은 양피지를 쥐여 줬다.

앰버는 청년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청년 또한 쓰고 있던 빵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앰버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멀어지는 청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앰버는 곧장 르네브에게 달려갔다.

“아가씨! 아가씨!”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앰버를 보며 르네브는 쓰게 웃었다.

“그러다 넘어지겠다. 앰버.”

“죄송해요. 빨리 아가씨께 전달해 드리고 싶어서 그랬어요.”

르네브는 앰버가 내민 둘둘 말린 작은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앰버.”

“뭘요.”

르네브는 서둘러 구깃구깃한 양피지를 펼쳤다.

예상대로 황후의 정보통으로부터 온 소식이었다. 황비의 시녀 앤드니 백작 부인 일가가 투옥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겨우 한 걸음 뗀 것뿐이었지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왜요? 아가씨. 혹시 뭔가 일이 잘못 된 건가요?”

르네브의 한숨을 좋지 않은 쪽으로 해석한 듯 앰버가 물었다. 르네브는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잘됐어.”

“다행이네요. 그런데 기쁘지 않으세요?”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거든.”

르네브는 깃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어디 가시게요?”

“응, 외출을 좀 해야겠어.”

트왈렛 룸으로 향하는 르네브의 뒤로 앰버가 따라붙었다.

안전하게 저택 안에서 머물며 정보를 얻는 방법도 있었다. 바슈케르에서 벌어진 일들을 문서로 전해 받을 수도 있었고.

하지만 르네브는 직접 두 눈과 귀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

가면무도회가 있는 연회 홀 안으로 들어선 에시카는 중앙으로 향하는 대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황궁에 르네브와 이카르가 등장한 뒤로 가능한 외출을 삼가고 있었으나, 최근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듯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랜만에 외출에 나섰다.

가면무도회이니만큼 얼굴이 노출될까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비단 에시카만은 아니라는 듯 홀 안은 귀족들로 북적였다.

“귀부인,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1황자 전하 암살 시도 건 말인가요?”

이처럼 한 명 이상의 사람만 모였다 하면 그 일로 떠들었다.

하지만 아직 밝혀진 게 적었기 때문에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궁금해하는 건 똑같았다.

앤드니 백작 가가 단독으로 일을 벌인 것인지, 배후가 있는지.

물론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서 그렇지 다들 내심 생각할 것이었다.

황비의 지시일 거라고.

1황자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은 황비였고, 앤드니 백작 부인이 황비의 최측근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

귀족들의 수군거림을 듣다 못 한 에시카는 그만 몸을 돌리려 했다.

그리고 마주한 시선에 화들짝 놀랐다.

‘설마…… 아니겠지?’

가면에 얼굴이 가려져 긴가민가했으나, 그녀가 맞는 것 같았다.

‘르네브가 왜 여기에……!’

그렇지 않아도 가장 기피해야 할 상대와 딱 마주치다니.

에시카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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