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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머리를 맞대고 (108/148)


#108화 머리를 맞대고
2023.07.17.


이카르가 여전히 정제되지 않은 눈빛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그게 저를 향한 것이 아님을 잘 알았다. 하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그렇다고 매번 겁을 먹고 떨 수는 없었기에 르네브는 이카르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한껏 힘이 들어가 있던 이카르의 눈매가 조금 유해졌다.

“내 약혼녀께서는 제법 노련한 조련사가 다 됐군.”

이카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르네브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르네브의 어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흥분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 볼 테니까. 이제 오늘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겠나?”

한결 나아진 분위기 속에서 르네브는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다소 순화했음에도 황비의 만행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적절히 이카르를 달래야만 했다.

“……그래서 영애는 어떻게 했으면 하지?”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파라디움 황궁에 쳐들어가 황비의 목을 내놓으라 할 것처럼 험악했으나, 목소리만큼은 자상했다.

르네브가 또 겁을 먹지 않게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제게 생각이 있어요. 폐하, 이 일을 처리하는 건 제게 맡겨 주실 수 있을까요?”

이카르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르네브가 내놓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저 가만히 양손 놓고 영애가 하는 양을 지켜만 봐라, 이런 뜻인가?”

르네브는 고개를 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움직이신다면 제국 간의 불화로 번질 가능성이 크겠죠.”

이카르의 미간이 실시간으로 깊어지는 걸 보며 르네브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되면 폐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에요.”

그럼에도 이카르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좀 더 설득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르네브는 곧장 이카르에게 그간 계획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군.”

르네브는 이카르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너무…… 악독하다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전혀.”

이카르가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영애의 계획을 듣다 보니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영애의 계획에 내 의견을 추가하는 건 괜찮나?”

“물론이죠. 얼마든지요.”

르네브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카르가 한쪽 입매를 삐뚜름히 끌어 올렸다.

밤늦도록 두 사람은 앞으로의 계획을 나눴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질수록 복수 계획은 한층 진화했으며 그 방법 또한 악랄해졌다.

***

다음 날 르네브는 약속 시각에 맞춰 황궁으로 향했다.

어제와 달리 그녀가 오늘 만나려는 사람은 황후였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응접실에는 황후가 먼저 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르네브는 황궁 예법에 맞게 황후에게 인사했다.

이전에 그랬듯,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직 혼전이라고는 하지만, 영애 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해야겠네요. 그 격식에 맞춘 인사.”

르네브가 난감해하자 황후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점심은 아직이시죠?”

“네, 아직입니다.”

이 시간에 보자고 시간 약속을 잡는 건 오찬을 같이 하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도 아직이니 함께 들죠.”

황후가 응접실을 나서며 말했다.

르네브는 복도를 눈으로 쓱 훑었다.

불과 3년 전까지 자신이 살던 곳이었으나, 회귀 전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이어졌다.

확실히 르네브가 황후로 있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르네브는 제게 주어진 업무를 소화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해서 주변을 가꾸는 데 다소 무신경했었다.

반면 눈앞에 보이는 황후의 거처는 그때보다 조금 더 안락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젊은 아가씨가 보기에는 다소 취향이 고루하고 진부하죠?”

주변을 둘러보는 르네브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황후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뇨. 따뜻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네요.”

“그리 말해 주어 고맙네요.”

황후가 살며시 뺨을 감싸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저 입에 발린 칭찬이라고 여기는 것 같으면서도 내심 기쁜 기색이었다.

황후의 걸음이 멈춘 곳은 정원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 앞이었다.

르네브와 황후가 자리에 앉자 시종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식사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귀한 손님이시니.”

시종이 떠나고 오래지 않아 테이블 위에 음식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황후일 적 르네브가 먹던 음식들이 주를 이뤘지만, 그렇지 않은 종류도 몇 가지 있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황후의 의례적인 인사말에 르네브는 미소로 화답했다.

“전부 맛있어 보이는데요.”

식사 내내 오가는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제법 편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황후 폐하, 주변을 물리도록 할까요?”

식사가 끝나자 황후의 시녀 크산테 후작 부인이 물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식사 시중을 들던 고용인들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너른 황궁 정원 안이 조금 전보다 고요해졌다.

황후가 크산테 후작 부인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지 뭔가요?”

크산테 후작 부인이 텅 빈 테이블 위에 편지 봉투를 내려놓았다.

르네브가 어제 앰버를 통해 황후에게 전달한 편지였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송구합니다.”

“사과를 받고자 한 건 아니었어요. 갑작스럽게 영애의 입궁을 명한 어떤 분 때문에 영애도 당황스러웠겠죠.”

“…….”

“내용을 검토해 보니 내게도 좋은 제안은 맞더군요. 해서 영애와 한번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

“그럼 이제 구체적인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내게 알려 주겠어요?”

황후가 조금 전까지 보여 주던 대외적 미소를 싹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일단 전부 다 말씀드릴 수 없다는 점부터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황후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그러나 아직 르네브의 제안을 거절할 마음이 든 것까지는 아닌 듯했다.

르네브는 황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그 수족을 자를 생각입니다.”

거침없는 르네브의 언사에 당황했는지 황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곧 그녀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드리웠다.

누구의 수족을 자르겠다고 분명히 말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러고 난 다음에는요?”

“그다음에는…….”

패를 전부 내보일 수는 없었기에, 르네브는 황후의 도움이 필요한 종류의 일만 거론했다.

“……아마도 황후 폐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일 겁니다.”

크산테 후작 부인과 짧은 눈빛을 교환 후 황후가 여상히 말했다.

“좋습니다. 그로 인해 내가 취하게 될 이득이 무엇일지는 굳이 영애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

르네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비의 수족을 자르고, 황비까지 제거하고 나면 실질적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볼 사람은 황후였다.

“그럼 내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뭔지도 들어 봐야겠군요.”

“가능한 한 많이, 질 좋은 정보를 얻길 원합니다.”

황후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되겠어요?”

“황후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영향력은 제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시겠지요.”

이는 사실이었다.

르네브는 황후일 적 매일 온갖 고급 정보들을 보고 들었다. 지금의 황후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그에 따른 정보력이 있다고 추측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던 황후가 이내 르네브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죠. 그로 인해 영애가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요? 이번 일로 가장 큰 득을 얻는 건 분명 영애는 아닐 것 같거든요.”

르네브는 옅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심리적 만족…… 이라고 해야 할까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눈만 깜빡이던 황후가 곧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놀란 건 르네브도 마찬가지였다.

회귀 전후를 통틀어 그녀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얼마만큼 깊은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애에게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산테 후작 부인을 돌아봤다. 크산테 후작 부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르네브에게 말했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앤드니 백작 부인은 공작 저 내부를 슬쩍 둘러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유서 깊은 가문임을 뒷받침하듯 카일란듀 공작 가의 내부는 고딕 양식을 따라 기품 있으면서도 고전적인 멋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앤드니 백작 부인은 충족감을 느꼈다.

카일란듀 공작은 자신의 살롱에 아무나 초대하지 않았다.

파라디움의 신분 체계 안에서도 최상단에 자리한 이들만 그의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 또한 황비의 시녀가 되지 못했다면 절대 발 들이지 못할 그런 곳이었다.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내부를 살뜰히 훑어보고 있을 때 시종이 말을 걸어왔다.

“귀부인, 백작 저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

앤드니 백작 부인은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황비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며 연신 이쪽을 힐끔거렸다.

“백작 저에서 말인가요?”

“예, 앤드니 백작 부인이 아니십니까?”

이곳까지 백작 저의 사람이 찾아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앤드니 백작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비에게 다가갔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황비 전하.”

황비는 잠시 앤드니 백작 부인에게 시선을 주었을 뿐 곧 근처의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라는 허락임을 알아들은 앤드니 백작 부인은 시종을 따라갔다.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으나, 현관 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사람은 제 가문의 하녀장이 맞았다.

그리고 그녀의 옷차림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게 수수하고, 또 초라했다.

“마님!”

앤드니 백작 부인을 보자마자 하녀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동시에 앤드니 백작 부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만한 곳이 아니었다.

격조 높은 귀족들이 모여 문화, 예술을 논하고, 나아가서는 제국의 미래를 점하는 그런 자리였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하녀장 또한 모르지 않았다.

황비와 함께 이곳에 초대되는 날이면 앤드니 백작 부인은 평소보다 훨씬 외모에 신경을 썼으니.

“이리 나와 보게.”

앤드니 백작 부인은 언성을 높이는 대신 하녀장에게 조용히 다가가 엄하게 말했다.

나가서, 사람들 없는 곳에서 철저히 따질 생각이었다.

제게 창피를 주려고 이러는 거냐고.

하지만 저택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하녀장이 외쳤다.

“마님! 이럴 시간이 없어요.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가 보셔야 해요!”

앤드니 백작 부인은 남몰래 쯧, 혀를 찼다. 그러고는 하녀장의 손목을 꽉 쥐고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조용히 따라 나오라고. 나가서 이야기하자니까?”

하지만 손목을 세게 붙잡힌 상태에서도 하녀장의 목소리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높아졌다.

“이, 이러고 있으실 시간이 없어요, 가주님께서 지금 황궁에! 황궁에 붙잡혀 가셨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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