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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연계 (107/148)


#107화 연계
2023.07.16.


황후의 추궁 섞인 눈빛에 황비는 미간을 살짝 모은 채로 르네브를 흘겼다.

“……네.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눈으로 가만히 황비를 응시하던 황후가 이내 되었다는 투로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차차 알아보도록 하죠.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세이렌 후작 영애.”

황후가 문 쪽을 눈짓했다.

“예, 황후 폐하.”

응접실을 나가는 황후와 세이렌 후작 영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비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녀들이 응접실을 완전히 빠져나가자마자 황비는 앤드니 백작 부인 쪽으로 홱 몸을 돌렸다.

“세이렌 후작의 여식이 반나절 동안 여기 꼼짝없이 갇혀 있던 게 맞아?”

“네. 분명 여기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이 곧장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 또한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황후가 개입을…….”

황비는 거기까지 말하곤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아무래도 세이렌 후작의 여식이 황후 쪽에 붙은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알아볼까요?”

황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그럴 필요가 있겠어.”

***

응접실을 빠져나온 뒤에도 황후는 한참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황후의 침실과 인접한 복도에 접어들었을 즈음이 돼서야 그녀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르네브를 돌아봤다.

“갑자기 귀댁의 하녀 아이가 나를 찾아와 아가씨를 구해 달라며 사정을 하더군요. 게다가 그 내용이 간단히 편지로만 주고받고 끝낼 일은 아닌 것 같던데요.”

“그럼 제가 다시 찾아뵐 테니 그때 대화를 나누는 건 어떠신가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입궁 바랍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르네브를 황궁 밖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하란 말을 덧붙인 뒤에야 황후가 몸을 돌렸다.

“가시죠.”

대낮에 입궁한 게 무색하게도 황궁 밖은 이미 어두웠다.

하늘에도 별이 총총 떠 있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르네브는 이내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

마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푸훕…….

앰버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래?”

“아, 죄송해요. 아가씨. 아까 일을 떠올렸더니 웃음이 나서 그만…….”

“……?”

“황후 폐하께서 등장하자마자 꼼짝없이 꼬리를 내리던 황비 전하의 모습이 떠올라 버렸거든요.”

“아…….”

“조금 후련했어요. 물론 아가씨께서 당한 수모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요.”

“그랬어?”

“네. 그런데 아가씨도 이제 파라디움 황제 폐하의 약혼녀 신분이시니 황비 전하와 대적하실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앰버가 확신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법 타당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기에,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러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

다시 한번 삶이 주어진 뒤로 르네브는 이따금 생각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고통을 줄 방법이 무엇일지.

여러 번 고민한 결과 르네브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상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망가뜨리기. 그것이 사람이든, 감정이든, 물질이든.’

르네브 또한 그러했으니까. 그래야 공평하니까.

황비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존심이었다.

“황비 전하께서는 황후 폐하께 열등감을 느끼고 계셔. 제국법으로 황비와 정부를 구분한다고는 해도 어쨌든 정실은 아니니까.”

앰버가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황비 전하는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구가 강한 편이거든. 오늘 나를 거기 가둬 둔 이유도 같은 맥락이겠지.”

“사람들을 제 입맛에 맞게 조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란 뜻인가요?”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묻는 시선으로 앰버가 르네브를 바라봤다.

“아마도.”

앰버가 거참 성격 한번 고약하시네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람이 같은 공간 안에 자신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상대가 존재한다면 어떨 것 같아?”

“전 잘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을 것 같진 않네요. 그게 황후 폐하시라는 말씀이신 거죠?”

말을 뱉고 나서야 무언가 깨달았는지 앰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럼 아가씨께서는 일부러 황후 폐하를 끌어들이신 건가요? 황비 전하께서 가장 불편해할 만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곧 르네브를 바라보는 앰버의 눈빛에 감탄이 섞여 들었다.

“물론 황후 폐하께서 내가 보낸 편지에 반응하지 않았을 땐 황제 폐하의 약혼녀 신분을 내세울 생각이었어.”

황비가 르네브를 그곳에 계속 가둬 두었다면 그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파라디움 제국 안에서 황후 다음가는 권력을 장기간 쥐고 있던 사람인 만큼, 르네브에게 더 강경한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와, 저 지금 소름 돋았어요.”

앰버가 제 양팔을 빠르게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

“아가씨께서는 처음부터 황비 전하의 명이었다는 걸 알고 입궁하셨다는 거잖아요.”

앰버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그렇지는 않아. 만약을 위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뿐이니까.”

그래서 입궁 소식을 듣자마자 양피지에 황후의 침실로 향하는 길 안내를 해두었다.

여차할 땐 앰버가 황후를 잘 찾아갈 수 있도록.

다행히 앰버는 길눈이 밝은 편이었고, 무사히 황후에게 르네브의 편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황후가 이에 응한 건 약간의 도박이었다.

“아, 참. 아가씨 이거 돌려 드릴게요.”

앰버가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적이더니 링 모양의 장신구를 꺼내 보였다.

“이거 엄청 신통방통하던데요? 언뜻 보기에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장신구 같았는데 기사님께 보여 드렸더니 저를 황후 폐하께 척 안내해 주시지 뭐예요?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종류의 물건인 건가요?”

앰버 편에 들려 주었던 장신구는 르네브가 황녀 대신 바슈케르로 떠나기로 약속했을 때 황후에게 받은 것이었다.

“맞아. 여기 황후 폐하의 이니셜이 들어가 있거든.”

“아…….”

르네브가 설명을 덧붙이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 앰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후작 저로 들어서는 르네브에게 집사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어진 집사의 말에 르네브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예상보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그다. 잠깐 짬을 내서 온 것일 텐데 오래 자신을 기다렸을 거라 생각하자 걱정부터 앞섰다.

“……얼마나 기다리셨어?”

그렇게 말하며 르네브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이카르가 있었다. 그는 나선형 계단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이제 막 후작 저에 도착한 참이니, 신경 쓸 것 없어. 그보다…….”

미끄러지듯이 계단을 내려온 이카르가 르네브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영애를 보지 못해 업무에 지장에 생길 바엔 잠깐이라도 그대를 보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찾아왔으니, 부디 돌아가란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르네브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도 뵙고 싶었는걸요.”

이카르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그의 잇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 정말 미치겠군.”

이카르의 커다란 손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을 보며 르네브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그런 르네브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카르가 손가락 틈 사이로 르네브를 힐끔 내려다봤다.

르네브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으려던 순간 이카르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르네브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영애가 이렇게 귀엽게 굴면 내가 바슈케르로 돌아가기가 힘들 것 같거든.”

“…….”

“오늘 밤에는.”

이어진 이카르의 속삭임에 르네브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금세 사과처럼 뺨을 붉히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 이카르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어 내며 덧붙였다.

“일단 올라가서 마저 이야기할까?”

르네브는 이카르와 시선을 맞춘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보고 싶으셨나 봐요. 일이 손에 안 잡힐 만큼이요.”

주어가 빠져 있었으나, 이카르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을 내놓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영애는 지금 내가 얼마나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가 보군.”

르네브는 화들짝 놀라며 이카르를 쳐다봤다.

“바슈케르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그럼. 영애가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없으니 많이 곤란한 참이야. 일이 손에 잘 잡히질 않는다고.”

“…….”

“영애가 바슈케르 황궁에 있을 땐 그날의 피로를 바로바로 풀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그런 말을 들으니, 마치 자신이 인간 비타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르네브는 조용히 뺨을 붉히며 괜히 더 바쁘게 계단을 올랐다.

“황궁에 다녀왔다던데?”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이카르가 물었다.

집사를 통해 르네브가 어디에 갔는지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사실대로 말해야겠지?’

그녀는 이제 전처럼 혼자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이카르와 상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부부니까.

그렇기에 어떤 말부터 꺼내는 게 좋을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 차를 가져왔어요.”

앰버의 목소리였다.

“들어와.”

앰버가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올려 두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이카르가 물었다.

“무슨 일로 황궁에 다녀온 건지 이야기해줄 수 있나?”

그의 시선은 르네브를 향해 있었으나, 질문을 건넨 대상은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이전까지 그는 르네브를 채근한 적이 없었으니까.

“황비 전하께서 아가씨를 괴롭혔어요!”

이제 막 응접실에 들어온 터라 이카르의 의도를 알 리 없는 앰버가 보기 좋게 넘어갔다.

“…….”

르네브는 조금 당황하며 이카르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카르의 턱에 까득 힘이 들어갔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

이카르가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한순간에 험악해진 그의 분위기에 겁을 먹었는지 앰버가 흠칫 어깨를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르네브를 쳐다봤다.

이카르의 질문에 대답해도 되는지 묻는 시선이었다.

앰버는 오늘 르네브가 황궁에서 겪은 일이 부당하다며 꽤나 분해했다.

그러니 이카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할 때, 정제되지 못한 사실에 조금 과장을 더해 설명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르네브는 앰버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입구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폐하, 제가 말씀드릴게요.”

이카르가 앰버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제야 얼어붙어 있던 앰버가 응접실을 나갔다.

“그래. 오늘 황궁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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