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사랑받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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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사랑받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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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사랑받는 남자
2023.07.13.
“게다가 대장간 일을 해서 체격이 아주 다부지고 성격도 자상하죠.”
“또.”
무감하게 딱 한마디만 내뱉는 이카르를 보며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또요?”
“그래. 남성미가 넘치고, 잘생기고, 체격이 좋고. 그것 말고 스미스의 매력이 또 뭐가 있지?”
이카르가 한쪽 입매를 삐뚜름히 들어 올린 채로 반문했다.
미소를 짓고 있어 언뜻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으나, 그 속에서 위화감이 전해졌다.
결정적으로 입은 웃고 있으나,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눈빛은 어디 해 볼 테면 더 해 보라는 듯했고, 목소리 또한 땅굴을 파고들어 갈 것처럼 한껏 낮아져 있었다.
다른 남자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발끈하는 이카르가 귀여워서 조금 놀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르네브는 과감히 장난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스미스는 세이렌 후작 저의 고용인이에요.”
“그자는 언제부터 세이렌 후작 저에서 일했지?”
“그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웬디라고 어릴 때부터 세이렌 후작 저에서 저를 도운 고용인이 있는데요.”
스미스에 대한 전부를 물고 뜯을 기세였기에 르네브는 얼른 대화 방향을 바꿨다.
“웬디……?”
웬디. 뜬금없이 등장한 이름에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다소 중성적인 이름이군.”
르네브는 고개를 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이대로 이카르가 오해하도록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웬디와 스미스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3년 전에 이미 결혼을 약혼했어요.”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던 이카르가 좀처럼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영애가 이 저택에 머물러야 할 이유라는 건가?”
“물론 그것만은 아니지만…… 웬디는 신의가 깊은 성격이라 저보다 먼저 결혼할 수 없다면서 3년이나 스미스와의 결혼을 미루고 있어요.”
“……그거 큰일이군.”
“폐하가 생각하시기에도 그렇죠? 아무리 빨리 준비해도 저와 폐하의 결혼식은 몇 개월 후가 될 텐데, 그럼 스미스가 너무 가엽잖아요.”
그제야 이카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렌 후작 저를 정리하는 동안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다는 거로군.”
“맞아요.”
이카르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르네브를 빤히 응시했다. 르네브는 그 뜨거운 시선에 뺨을 살짝 붉혔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내가 황후를 잘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한 걸음 다가온 이카르가 그녀의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진한 스킨십이 아니었다.
그저 이카르가 가까이 다가온 것만으로도 바짝 긴장되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르네브는 서둘러 입을 뗐다.
“폐하께서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작은 저택을 잘 관리하는 걸 보면 큰 저택 또한 잘 관리할 거라는 일종의 믿음이 들거든.”
세이렌 후작 저의 규모는 작은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이카르가 빗대어 말한 큰 저택이란 바슈케르의 황궁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바로 알아들었으나,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다.
“저기 폐하. 세이렌 후작 저와 바슈케르 황궁을 작은 저택과 큰 저택이라 칭하기엔 너무 큰 차이가 있지 않나요?”
르네브의 물음에 이카르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근본은 같으니 크게 다를 것은 없지. 그 안에 속한 이들을 챙기는 영애의 마음씨 또한 같을 테고.”
웬디는 르네브에게 잘 대해 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르네브는 그저 그런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그 여파가 제법 크게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럼 이제부터는 바슈케르 황궁 고용인들의 대소사를 전부 챙겨야 하는 건가?’
르네브는 조금 생각이 많아졌다.
‘바슈케르 황궁 고용인들이 전부 몇 명이었지?’
대충 셈해 봐도 최소 수백 명 이상이었다.
“…….”
르네브의 고개가 숙어지며 그녀는 절로 숙연해졌다.
***
“……?”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마차로 걸어오는 이카르를 보며 드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 어째서 혼자 오십니까?”
드한의 물음에 이카르의 미간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데?’
드한은 이카르의 급격한 기분 변화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영애는 이곳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 그녀는 당분간 파라디움에서 머물게 될 거야.”
드한은 곧바로 이카르의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를 눈치챘다. 그와 동시에 이카르의 기분이 좋았던 이유 또한 궁금해졌다.
세이렌 후작 영애를 혼자 두고 바슈케르로 돌아가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세이렌 후작 영애와 좋은 일도 있으셨나 봅니다?”
드한은 재빨리 이카르의 기분을 좋게 만들 만한 말을 꺼냈다.
무얼 떠올린 건지 이카르의 입가에 다시 잔잔한 미소가 돌아왔다.
드한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에 오른 이카르가 기분 좋은 한숨을 작게 내쉬곤 중얼거렸다.
“하여간 보통이 아니라니까.”
이카르의 맞은편에 앉은 드한은 서류를 집어 들며 물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 말입니까?”
“내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더군. 귀엽게.”
“질투…… 말씀이십니까?”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세이렌 후작 영애와의 조금 전 일을 떠올린 건지 그의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영애의 입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이 나온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었던 건 사실이지만…….”
“…….”
“하지만 금방 눈치채 버렸지. 영애의 입가가 미묘하게 씰룩였거든. 아, 참고로 영애는 거짓말을 잘 못 해.”
“예…….”
“드한, 질투심 유발이란 게 어떤 심리에서 기인한 것인지 생각해 본 적 있나?”
“아뇨, 없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은 주군을 본격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드한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확인받고 싶은 거야.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아…… 그렇군요.”
드한은 기계적으로 감탄하며 맞장구쳤다.
“왜 확인받고 싶어 하는지도 알고 있나?”
“아뇨, 모릅니다.”
드한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영애가 날 무척 사랑하기 때문이지.”
드한은 이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수다스럽지 않은 주군께서 오늘 이토록 말이 많으신지를.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자랑하고 싶었구나.’
***
세이렌 후작 저의 고용인들은 3년 만에 적국에서 무사히 돌아온 르네브를 반겼다.
누군가는 기뻐했고, 누군가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르네브는 고용인들의 환대를 받은 뒤에야 침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놓은 앰버가 르네브를 보며 말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아가씨. 필요한 것 있으면 부르시고요.”
“그럴게.”
오롯이 혼자가 된 르네브는 침실 안을 둘러봤다.
‘3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네.’
르네브는 앰버가 내 온 찻잔을 들고 책상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양피지에 차근차근 적었다.
세이렌 후작 저의 정리.
그녀가 바슈케르로 떠나고 나면 이 대저택 또한 필요가 없었다.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은 아직 바슈케르로 망명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긴 하지만.
만약 망명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들은 서부에서 지낼 테다.
그러니 이곳은 결혼 전에 정리해 두는 게 맞았다.
르네브는 저택 고용인들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근처에 가족이 있는 고용인들은 이곳을 떠나기 어려울 테니, 다른 가문에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 주면 되겠지.’
세이렌 후작령으로, 혹은 바슈케르로 떠나길 원하는 고용인이 있다면 기꺼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될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이제 가엾은 스미스를 위해 웬디를 설득하면 되었다.
‘저택을 정리하고 난 다음엔…….’
르네브는 다소 서늘한 표정으로 양피지 위에 한 자 한 자 꾹꾹 글자를 적어 넣었다.
황비, 에시카, 루시우스…….
그때 복도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
“아, 아가씨!”
곧 문 너머에서 다급한 앰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앰버, 무슨 일이야?”
르네브가 대답하기 무섭게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화, 황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어요!”
“……3황자 전하께서?”
앰버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또 하나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르네브.”
루시우스!
르네브는 절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차분하게 내뱉었다.
“……이 늦은 시간에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너와 할 이야기가 있어.”
앰버가 어쩌면 좋으냐는 표정으로 르네브를 바라봤다.
“앰버, 차를 준비해 줄래?”
불안한 눈으로 루시우스를 힐끔거리며 입술을 달싹이던 앰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로 모실게요.”
르네브는 침실을 나서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우스도 별다른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센스 있게도 앰버가 끓인 차에는 심신 안정 작용이 있었다. 마시면 기분이 차분해지는 종류의.
흥분해서 찾아온 루시우스를 위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덕을 보고 있는 건 루시우스만이 아니었다.
꼴도 보기 싫은 저 얼굴을 또 봐야 하는 르네브의 심기 또한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으니.
“오시는 길에 저택 고용인을 다치게 하시진 않았겠죠?”
르네브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야.”
3년 전의 저택 고용인들은 르네브가 막 회귀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루시우스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도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르네브가 바슈케르로 떠나기 직전, 루시우스가 후작 저를 찾아왔던 날에도 이전과 다름없이 그를 후작 저에 들였었다.
그 때문에 르네브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었고.
3년 전 루시우스가 르네브에게 강압적으로 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저택 고용인들이 오늘 루시우스의 방문을 쉽게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
르네브는 속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물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요?”
그녀는 그가 보나 마나 이카르와의 약혼 소식에 관한 것을 물을 것이라 생각했다.
루시우스가 황제가 되려면 군사력이 필요했고, 세이렌 후작을 얻기 위해서는 르네브와의 결혼이 빠른 길이니까.
르네브와 이카르의 약혼은 그런 루시우스의 계획을 틀어 버린 셈이었다.
‘그러니 따지고 싶겠지.’
어째서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거냐고.
그러나 루시우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르네브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르네브,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오해? 글쎄요. 저와 황자 전하 사이에 오해 같은 게 있을 수 있나요?”
“내가 그간 둔했다는 건…… 인정하지.”
르네브의 미간이 모였다.
루시우스가 제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스스로를 둔하다며 깎아내리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자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도통 모르겠네요.”
“전부 설명하긴 어렵지만, 최근 겪은 여러 변화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이 있어.”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루시우스가 말을 이었다.
“황비 전하께서 그간 너를 힘들게 한 모양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