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르네브의 마음이 변한 이유 (103/148)


#103화 르네브의 마음이 변한 이유
2023.07.12.


“그건…….”

에시카는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원작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럼 루시우스가 어떻게 나올지 알 것 같아서.

‘If 외전이면서…….’

어째서 제 마음은 원작과 똑같이 루시우스에게 가는지 그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기적이고, 지독히도 자기중심적인 이런 남자를 어쩌자고 사랑하게 되어 버렸는지…….

그리고 하필이면, 사랑하게 되어 버린 남자가 자신이 이토록 증오하는 여자를 원하는지.

그래. 굳이 하지 않던 말대답까지 해 가면서 바슈케르 황제와 르네브의 파혼을 원하는 이유가 뭔지 루시우스에게 물어본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루시우스, 너는 르네브를 사랑하니?’

그리고 루시우스는 두루뭉술하게 질문을 회피했다.

아직 그녀는 루시우스에게 쓸모 있는 존재니까. 그는 아직 에시카가 미래를 보는 힘이 있다고 믿으니까.

그러나 앞이 깜깜하다고, 이제 한 치 앞도 모르겠다고…… 루시우스에게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영애……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를 못 참고 루시우스가 대답을 종용했다.

“무시했다고 느끼게 했다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에시카는 꾸벅 루시우스에게 절을 올린 뒤 틀에 박힌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말씀드리는 미래는 그간의 사례들을 취합하고 그 속에서 가장 확실한 방향을 찾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루시우스의 목소리가 유독 서늘하게 들렸다. 그간은 적어도 에시카에게 예의를 갖추려 들었건만.

에시카는 그만큼 지금 그의 심리 상태가 궁지에 몰렸다는 뜻임을 눈치챘다.

“……제게 시간을 조금 주실 수 있으십니까, 황자 전하?”

루시우스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대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둘의 약혼 소식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지.”

루시우스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해해. 방법을 찾아볼 약간의 시간을 주도록 하지.”

그 말만 내뱉곤 그는 몸을 돌렸다.

“황자 전하. 어디…… 가시려고요?”

에시카는 루시우스의 너른 등을 향해 물었다. 어느새 문손잡이를 잡은 루시우스가 그녀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음…… 일단은 세이렌 후작 저에 찾아가 보려고. 르네브와 대화를 나눠 보는 게 좋겠더군.”

‘가지 마.’

목 끝까지 그 말이 치밀었다.

그러나 복도 저편 너머로 루시우스의 뒷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에시카는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리고 완전히 시야에서 루시우스가 사라졌을 즈음에야 나지막이 읊조렸다.

“가지 말라고…….”

에시카는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퍽 내리치곤 세게 문질렀다.

‘진짜 미쳤나 봐. 대체 어쩌자고…….’

르네브와 이카르의 파혼을 요구하는 루시우스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건 분명히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그게 더욱더 에시카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

에시카 앞에서는 애써 의연한 척했지만, 루시우스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바슈케르인을 흔히 전투 민족이라 포장해 부르고는 있으나, 그들은 결국 야만인에 지나지 않았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뼈와 살을 불리하고 도륙하는 걸 즐기는 짐승에 지나지 않는, 그런 짐승들의 우두머리였다. 르네브와 약혼했다는 황제라는 작자는.

“감히…….”

루시우스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게서 르네브를 빼앗아 가려 하다니.’

무릎에 올린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루시우스는 한동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혼자 감내했다.

당장이라도 이카르의 멱살을 쥐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저…… 황자 전하,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마차에 오르고도 한참 지시가 없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마부가 물었다.

“세이렌 후작 저로.”

“알겠습니다.”

마차는 파라디움 황궁을 빠져나와 번화가를 지나쳐 대저택이 모여 있는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마차 창 너머로 익숙한 세이렌 후작 저의 거대한 철문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루시우스의 심장이 쿵쾅쿵쾅 세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원래도 르네브는 눈에 띄는 미인이었으나, 이전 바슈케르 황궁에서 보았을 때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꽃봉오리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다.

이번 파라디움의 건국제에 참석했을 때는 정말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의 르네브를 반추하며 루시우스는 엄지로 느리게 제 입술을 쓸었다.

그때 마차가 멈췄다.

‘도착한 모양이군.’

마차에서 내리려던 루시우스는 마차 밖 풍경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마차가 세이렌 후작 저의 정원으로 향하는 길에 멈춰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세이렌 후작 저의 높고 거대한 철문뿐이었다.

“어째서 마차를 여기 세운 거지?”

“그, 그것이…….”

마부가 곤란한 듯 머뭇거릴 때였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송구합니다. 황자 전하.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말란 명이 있었습니다.”

루시우스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싸늘한 시선으로 문지기를 응시했다.

“저, 정말로 송구합니다. 황자 전하.”

문지기가 거듭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세이렌 후작이 직접 그대에게 지시를 내린 것인가?”

루시우스의 질문에 문지기가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송구합니다. 황자 전하…….”

루시우스는 연신 같은 말을 반복해 대는 문지기를 향해 짧게 명령했다.

“열어.”

그리고 마차 창문을 닫아 버렸다.

더는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표현임과 동시에 알아서 해결하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곧 마차 밖에서 황실 기사의 고함이 울렸다.

“황자 전하의 명령이다. 문을 열어라!”

스릉.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드는 소리에 이어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제발 이, 이러지 마십시오…….”

루시우스는 마차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밖의 소음에서 신경을 꺼 버렸다.

그리고 얼마 전 황비와의 점심 식사 때의 일을 떠올렸다.

‘최근 황자 궁에 하급 귀족 가의 여식을 하나 들이셨다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일상 대화를 늘어놓던 황비가 본론을 꺼냈다.

‘이제 전하께서도 여인에게 흥미를 두실 만한 나이가 되신 모양입니다……. 어미 된 자로서 그간 잘 살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

‘그래서 황자 궁에 침방 시녀를 들일까 하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나요?’

황비의 의중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루시우스는 어리지 않았다.

혼인 전의 귀족 영식이 침방 시녀를 두는 것은 딱히 특별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황비의 질문이 에시카와 자신의 사이를 가늠해 보기 위한 유도신문이란 걸 눈치챘다.

‘그리하십시오.’

루시우스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황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습니다. 그럼 그 하급 귀족의 여식은 이 어미가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로 루시우스를 노려보던 황비는 이내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황자 전하도 이제 성인이시니, 그 정도 일쯤은 혼자 처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제가 조금 더 잘 안답니다. 그러니 저에게 맡겨 주시면…….’

‘크로프트 남작 영애와는 황비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루시우스는 선을 그었다.

‘그럼 어째서 여태껏 한 번도 하지 않던 행동을 하시는 건지? 이 어미는 너무나 걱정이 됩니다. 혹여나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 황자 전하의 명예가 실추되지는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루시우스는 황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이닝 룸을 나서기 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괜히 건드리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크로프트 남작 영애는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렇다.

크로프트 남작 영애는 자신의 능력을 방대한 지식 속에서 나오는 통찰이라 에둘러 표현했지만, 그 능력은 확실히 남다른 것이었다.

미래를 보는 능력.

그녀의 능력은 루시우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었다.

특히 계승 서열 3위인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반드시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르네브를 바슈케르의 황제에게서 빼앗아 오기 위해서도, 나아가서는 제국을 통치하는 데에도.

르네브가 파라디움을 떠난 3년간 루시우스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다.

르네브와의 결혼이 미뤄진 데다 황비까지 세이렌 후작 가문과의 혼사에 미련을 버린 뒤로 루시우스는 그 자신만의 정보망을 구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당장은 세이렌 후작 가의 힘을 빌릴 수 없게 되었으니, 황제가 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덕에 갑자기 돌변한 르네브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황비의 지나친 간섭과 은근한 기죽이기 및 이간질.

그 때문에 르네브의 마음이 변한 것이라고 루시우스는 결론지었다.

‘원인을 찾았으니,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어.’

***

건국제가 끝나고 르네브는 곧장 바슈케르 황궁으로 돌아가는 대신 수도에 있는 세이렌 후작 저로 향했다.

“폐하, 저는 당분간만 여기서 지냈으면 해요.”

르네브의 말에 이카르의 잘생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꼭 그래야겠나?”

르네브가 세이렌 후작 저에서 지낸다면 전보다 더 얼굴 보기가 힘들어진다는 소리였다.

“저는 이전까지 여기서 혼자 살았어요. 전쟁의 위협이 적은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내길 바라는 가족들의 배려였겠죠.”

“…….”

르네브가 차분히 말을 하는 내내 이카르의 찌푸려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제 저는 폐하의 곁에서 안전할 거예요. 가족들도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죠.”

그제야 이카르의 미간이 살짝 평온을 되찾았다.

“알긴 아는 모양이군.”

“제가 폐하와 결혼하면 이제 이 저택에서 지낼 사람도 딱히 없으니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제 결혼이 늦어지는 바람에 아직도 장가를 못 가고 있는 스미스도 챙겨야 하거든요.”

르네브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카르의 고개가 딱 멈췄다.

“……스미스? 그게 누구지?”

파라디움에서 스미스는 발에 챌 정도로 많이 쓰이는 남자 이름이었고, 르네브의 입에서 거론된 남자 이름에 언제 평온했냐는 듯 그의 미간에 선명한 짜증이 드리웠다.

“스미스라는 자는, 나보다 잘생겼나?”

질투심을 드러내는 이카르가 너무 귀여웠다.

르네브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네, 남성미가 넘치고…… 제법 잘생긴 편이죠.”

“……!”

그 순간 이카르가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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