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저마다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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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저마다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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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저마다의 사정
2023.07.11.
내실로 돌아온 황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이게 대체! 세이렌 후작 영애와 바슈케르의 황제가 약혼이라니!”
황비는 앤드니 백작 부인에게 따지듯 물었다.
“……저도 무척 당황스럽습니다.”
둘의 약혼 소식이 청천벽력과 같이 당황스러운 건 황비의 시녀인 앤드니 백작 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그간 바슈케르 쪽에 사람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한 번도 두 사람의 약혼에 관한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 했으니, 곧 소식이 도착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앤드니 백작 부인은 살짝 식은 차를 황비에게 내밀었다.
황비는 그녀가 건넨 차로 타는 목을 축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그간 세운 계획이 또 어찌 될는지…….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렇게 되면 공들여 진행 중이던 계획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황비는 그간 남몰래 남부 귀족 세력과 관계를 키워 왔다.
황후의 친정이 속한 북부 귀족 세력에 대항하려면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야 제 아들 루시우스를 황위에 올릴 수 있을 테니까.
현재 루시우스의 비공식적 황위 계승 서열은 3위였다.
1황자와 2황자만 제거하면 실상 황위 계승 서열 1위가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1황자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고, 괜한 의심을 피하려면 지금은 방법은 달리하는 게 옳았다.
그리고 황비가 세웠던 계획 중에는 틀어진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루시우스와 세이렌 후작의 여식 간의 혼인이었다.
아직도 눈감으면 떠올랐다.
황비라고 해 봤자 결국은 정부가 아니냐며 자신을 쳐다보던 멸시 섞인 세이렌 후작의 눈빛.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어디 한번 경멸하는 여자가 낳은 아들과 제 딸이 결혼하는 꼴을 보더라도 태연히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나아가서는 멸시하는 여자의 아들을 주인으로 모시는 수치를 겪게 해 주리라고.
그래서 황비는 루시우스를 세이렌 후작 저에 자주 드나들게 했다.
반쯤은 오기로 시작한 계획이었다.
루시우스를 황위에 올리기 위해선 세이렌 후작의 군사력이 필요하기도 했고.
한동안은 뜻대로 되었다.
루시우스는 제법 세이렌 후작의 여식을 마을에 들어 했고, 세이렌 후작의 여식은 루시우스에게 푹 빠져 버렸다.
대쪽 같은 성격은 세이렌 후작을 닮았는지 그의 여식은 루시우스를 최우선으로 두었다.
좀 호구 같을 정도로. 루시우스가 원한다면 간도 쓸개도 전부 빼다 줄 것처럼.
얼마간은 황비의 의도대로 일이 잘 돌아가는가 싶었다.
이제 둘을 결혼시킨 뒤에 세이렌 후작의 군사들만 빼앗으면 명백한 그녀의 승리였다.
그리 확신한 순간에 세이렌 후작 영애의 경솔한 행동이 모든 일을 그르쳐 버렸다.
황녀를 대신해 파라디움으로 떠나겠다고 한 것이다.
그간 나름대로 세이렌 후작의 여식이 영민하다고 생각해 왔던 황비는 즉시 그녀를 재평가했다.
아주 멍청하기 짝이 없다고.
표면상으론 양국 간의 문화 교류 및 유학이라고 했지만, 인질인 셈이었거늘.
‘지금 생각해도 멍청해, 미련하기 짝이 없어.’
그리고 곧 정신 승리 했다.
잘 생각해 보면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루시우스와 결혼하기 전에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모자란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봐도 쉽게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후우…….”
황비는 소파에 털썩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에서 교훈을 찾으려 했던 게 무색하게도 남은 게 없었다.
그저 세이렌 후작 영애가 멍청하다는 것 외에는.
“대체 또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이제는 감도 안 잡히네.”
황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세이렌 후작을 처리하고, 그의 군사력을 남부 귀족 세력에게 재분배하려던 계획 또한 의미가 없어지게 생겨 버렸으니…….
다른 귀족들과 달리 세이렌 후작은 제 손바닥 위에 두고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교계 평판과 체면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고위 귀족의 특성이 있지도 않았다.
은근히 황제의 개라며 조롱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했음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게 더욱 황비의 심기를 건드렸다.
제 통제하에 들어오지도, 그렇다고 무너지지도 않는 그가 끔찍이도 싫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의 여식, 르네브 세이렌이었다.
황비는 이마를 짚었다. 조금 전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비 전하, 약을 준비해 올까요?”
마찬가지로 곁에서 심란한 얼굴로 있던 앤드니 백작 부인이 물었다.
황비는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곧 앤드니 백작 부인이 서랍에서 꺼낸 약과 물컵을 내밀었다.
“드세요. 고통이 가라앉을 거예요.”
황비는 앤드니 백작 부인이 준 약을 입에 털어놓고는 물을 한 잔 마셨다.
바로 약효가 돌지는 않겠지만, 기분만큼은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뭐, 언제는 안 이랬나 싶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황비를 바라보며 앤드니 백작 부인이 물었다.
“뭘……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보면 언제나 그랬어.”
“…….”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지.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것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 왔잖아?”
“그렇네요. 맞는 말씀입니다. 황비 전하께서는 이번 난관도 분명 잘 헤쳐 나가실 겁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의 확신 어린 표정을 보며 황비는 눈을 빛냈다.
***
바슈케르의 젊은 황제와 세이렌 후작 영애의 약혼 소식에 골머리를 앓는 건 비단 황비만이 아니었다.
발등이 타들어 가고 있는 건 에시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시카는 그때의 상황을 반추했다.
젊고 잘생긴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우아하게 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르네브의 모습을 떠올리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르네브가 걸친 옅은 푸른색 드레스는 최근 유행 중인 비큐나 원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하늘하늘하면서도 아름다운 몸 선을 잘 드러내 주는 디자인이었다.
샹들리에 빛을 머금고 영롱하게 빛을 뿜어내던 보석들은 목걸이며 귀걸이며 전부 감히 탐내기도 어려울 정도의 고가였다.
게다가 그녀는 바슈케르에 있을 때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높게 묶은 머리와 꽤나 신경 쓴 듯한 화장도 그녀와 매우 잘 어울렸다. 왜 그동안은 저렇게 꾸미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매일 거울을 통해 세계관 최고 미녀를 보는 에시카조차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분했다.
기껏 여주인공의 몸에 빙의했는데 고작 남자 주인공에게 버림받는 악역 따위가 자신보다 주목을 받는 것이.
질투가 났다.
원작에선 진작 죽었어야 할 엑스트라가 바슈케르 제국의 황제가 되어 당당하게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것이.
그에 반해 자신은 어떤가? 그리고 남자 주인공인 루시우스는 또 어떤가?
원작에 따르면 루시우스는 지금쯤 세이렌 후작 가의 군사력을 흡수하고 황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황위 계승 서열 3위에 머물러 있었고, 에시카 그녀는 여전히 그와 약혼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루시우스가 버리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눈앞에서 치워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어…….’
평화 협정 전까지 파라디움과 바슈케르는 교류가 없었다.
두 나라가 거의 반목하다시피 했기에, 파라디움에는 에시카가 솔티의 왕녀로 바슈케르에서 지낸 전적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만큼 바슈케르와 교류가 있는 사람이 없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묘하게 바슈케르의 복식과 유사한 디자인을 입고 사교 모임에 나타나는 영애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다 제 얼굴을 아는 이가 나타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던 차에 르네브가 돌아왔다.
그것도 바슈케르 황제의 약혼녀가 되어서.
짐작한 대로, 자신이 있는 세계관은 원작이 아니라 if 외전 속인 게 분명한 것 같았다.
“진짜! if 외전을 봤어야 했는데!”
너무 분해서 빽 고함을 친 순간이었다.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에시카는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에 살짝 귀를 대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곧 문 너머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나?”
루시우스였다.
“후우…….”
에시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르네브가 냉큼 이카르에게 사라진 솔티의 왕녀가 여기 있다고 고자질했을 줄 알았는데…….
에시카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안에 누구 있나?”
“아뇨. 저 혼자예요.”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네, 들어오세요.”
그녀가 살짝 비켜서자, 루시우스가 침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에시카는 열린 문을 닫고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르네브 때문에 속상했는데.’
그와 기분을 나누면 될 것 같았다.
루시우스를 향해 몸을 돌린 에시카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침울해진 자신을 위로해 주길 바라면서.
“……루시우스 황자 전하.”
그러나 에시카의 바람과 달리 루시우스의 표정은 험악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영애는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다고 했지?”
“…….”
“그렇다면 어째서 르네브와 바슈케르의 황제가 약혼한 것인지도 잘 알 테지.”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에시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는 건 전혀 거짓은 아니었다.
자신은 원작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다만, 이 세계가 에시카가 알고 있는 원작과 세계관 일부만 같은 if 외전 속이라는 게 문제지만.
하지만 괜한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기에 에시카는 그저 입술만 꾹 깨물었다.
“바로 대답을 못 하는군.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도록 하지.”
“…….”
“그대가 아는 미래에 르네브와 바슈케르의 황제는 어떻게 되지?”
에시카는 대답할 말을 고르며 입술을 핥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루시우스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아니, 아니야. 그건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중요치 않아. 둘을 파혼시킬 방법을 내게 알려 줘. 그거면 돼.”
그간의 경험으로 루시우스가 이것저것 캐묻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걸 파악한 에시카였으나, 지금만큼은 도무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파혼시키고 나면요? 그 뒤에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에시카의 물음에 루시우스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을 에시카였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 뒤의 일을 영애가 왜 궁금해하지?”
심각한 표정을 지우고 루시우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저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어요.”
“……영애.”
“네, 황자 전하.”
“영애는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에시카는 낮게 탄식했다.
미래를 알면서 굳이 왜 제 생각을 물어보냐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