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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귀환 (101/148)


#101화 귀환
2023.07.10.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르네브와 이카르가 파라디움 황궁의 그레이트 홀로 접어드는 계단에 올라서자 시종이 정중하게 물었다.

이카르가 시종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초대장을 확인한 시종의 눈이 커졌다.

적국 황제의 등장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초대장을 든 시종의 손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바, 바슈케르의 화, 황제 폐하가 맞으십니까?”

이카르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옆에 계신 레이디께서는…….”

“내 약혼녀일세.”

이카르는 그렇게 말하곤 르네브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냈다.

시종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곤 말했다.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르네브와 이카르가 그레이트 홀 입구로 들어서자 시종이 외쳤다.

“바슈케르 제국의 황제 폐하와 약혼녀 드십니다!”

그레이트 홀의 입구 근처에 있던 귀족들은 대화를 멈추고 르네브와 이카르를 쳐다봤다.

“제가 잘 못 들은 건 아니죠? 방금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시라고…….”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그분께서 왜…….”

귀족들이 작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와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따라붙는 시선들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귀족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천천히 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족들의 시선에는 낯선 이를 향한 호기심과 경계심, 불안과 기대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3년 전에도 바슈케르의 황제 이카르는 파라디움의 황실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학이라 보심이 적절하겠군요.’

혈혈단신으로 찾아온 그는 파라디움의 황제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유학이라는 명목하에 황녀를 바슈케르로 보내라고.

‘기간은 3년입니다.’

그리고 그때 세이렌 후작의 딸인 르네브는 황녀 대신 자신이 바슈케르에 가겠노라고 자원했다.

“그런데 옆에 계신 저 여성분은 누구시죠? 묘하게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저도요. 어디서 뵌 적이 있는 분 같은데.”

“바슈케르의 귀족이시겠죠. 바슈케르 황제 폐하의 약혼녀인데 저희가 뵌 적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귀족들 틈에 있던 한 영애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저분은……!”

“영애, 왜 그러세요?”

“3년 전에 황녀 전하를 대신해서 바슈케르로 떠났던! 그 세이렌 후작 영애잖아요!”

“……!”

파라디움의 황제에게 당당하게 인질을 요구한 바슈케르의 황제.

그리고 황녀 대신 인질이 되어 바슈케르로 떠났던 세이렌 후작 영애.

두 사람의 너무나 다정한 모습에 귀족들은 적잖이 놀라는 중이었다.

“아는 얼굴인가?”

르네브를 언급한 영애를 눈짓하며 이카르가 물었다. 르네브는 그제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확실히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회귀 전에는 황후인 르네브의 덕을 보려고 살살 비위를 맞추며 이런저런 청탁을 해 왔고, 회귀 후에는 세이렌 후작 가의 티 파티 초대에 응했던 영애였다.

앞에서는 친근하고 예의 있게 굴었지만, 뒤에선 르네브의 험담을 하던.

‘어느 가문이었더라?’

르네브는 그녀의 가문 이름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회귀 전 그녀가 속한 가문의 이름이었고, 지금 그녀는 아직 혼전일 테니, 회귀 전과는 다른 가문에 속해 있을 것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영애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알은척을 해 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세이렌 후작 영애. 그간 평안하셨나요?”

그녀 곁에 있던 다른 영애들도 다가와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정말로 오랜만에 봬요.”

“얼굴이 더 좋아지셨네요.”

이들도 아는 얼굴이었다.

회귀 직후 세이렌 후작 가의 티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

르네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친한 척 말을 걸었던 것이 무색하게 무반응이 돌아오면 민망할 법도 하다.

그러나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제일 먼저 르네브를 알아본 영애가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르네브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조금 전에 시종이 말하길 영애의 옆에 계신 분이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시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 좀 해 주세요.”

영애의 시선은 연신 이카르를 힐끔거리느라 바빴다.

다른 영애들 또한 이카르의 얼굴과 몸을 훑는 시선이 꽤나 살뜰했다.

르네브는 그녀들을 무심한 눈으로 쓱 훑고는 이카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폐하께서 이분들과 아는 사이인지 물으셨죠? 오늘 처음 뵙는 분들이에요.”

르네브는 눈앞의 영애들이 모르는 사람이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

영애들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리고 곧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그대의 친구라면 이참에 인사라도 해 둘 생각이었는데, 아니라면 그럴 필요는 없겠군.”

이카르가 그렇게 말하곤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르네브와 이카르가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등 뒤에서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찾은 격이군.”

여기저기서 비아냥 섞인 말들이 들려왔다.

“그러게요. 뵙기 어려운 타국의 황제 폐하와 대화라도 한 번 나눠 보려 한 거겠죠. 그걸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 말이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데, 저 상황에서 누가 상대를 하려 하겠어요? 염치도 없어라.”

한순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한 영애들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르네브는 그러거나 말거나 괘념치 않고 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분들은 누구신가요?”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와 약혼녀시래요.”

여기저기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슈케르의 황제 옆에 있는 여자가 그의 약혼녀이며, 파라디움의 세이렌 후작 가의 르네브라는 사실이 삽시간에 퍼진 모양이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라면 떠도는 소문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 소문 저도 들어 본 기억이 있네요. 친구를 살해하려 했다죠?”

주변에서 뭐라고 떠들든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고고하게 턱을 살짝 든 채로 정면만 보고 걷던 이카르가 돌연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르네브 쪽에선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 무슨 표정일지 상상이 되었다.

이카르의 시선을 받은 귀부인의 안색이 퍼렇게 질려 버렸기 때문이다.

귀부인은 입을 꾹 다물고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근처에 서 있던 다른 귀족들도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홀 안의 웅성거림도 현저히 잦아들었다.

“시끄러운 잡음이 사라지니 한결 낫군.”

그렇게 말하곤 이카르가 르네브를 힐끔 쳐다봤다. 혹여나 르네브가 상처받지는 않았을지 탐색하는 눈으로.

‘저딴 말들 신경 쓸 것 없어.’

이카르의 눈빛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무릇 사람이란 긍정적인 이야기보다는 부정적인 가십에 쉽게 이끌리기 마련이다.

특히나 황후처럼 눈에 띄는 자리에 있다 보면 원치 않아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황후가 된다는 건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저를 향한 평가나 비난에 의연해야 했다. 휘둘려서는 안 되었다.

르네브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전 괜찮아요.’

르네브는 이카르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르네브?”

르네브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시우스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가문의 영식들과 함께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잠시 이카르와 르네브를 번갈아 쳐다보던 루시우스의 시선이 팔짱 낀 두 사람의 팔에서 멎었다.

곧 루시우스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굳어 있는 루시우스의 뒤로 걸어오는 황비의 모습이 보였다.

“……세이렌 후작 영애?”

그녀는 르네브와 이카르, 그리고 루시우스 세 사람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곧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황비가 르네브를 쳐다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 전하, 황비 전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르네브는 옅게 미소 지으며 이카르의 팔을 살살 쓰다듬었다.

“르네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루시우스가 험악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고, 그 사이로 황비가 끼어들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설명이라…….”

그렇게 말하며 무심코 돌린 르네브의 시선 끝에 익숙한 얼굴이 걸렸다.

‘에시카?’

그녀는 귀족들 틈에 섞여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르네브와 눈이 마주치자, 에시카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귀찮게 되었다는 듯 미간을 모은 그녀는 이내 귀족들 틈 사이로 바퀴벌레처럼 사사삭 몸을 숨겼다.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르네브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지려던 순간이었다.

“바슈케르 제국의 황후가 되실 분이니, 부디 그에 맞는 예우를 갖추길 권하지. 황비 그리고 황자.”

이카르가 두 사람을 향해 싸늘하게 경고했다.

그러곤 르네브의 머리에 살며시 입술을 내리눌렀다.

“마, 말도 안 돼! 그게 무슨……!”

황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고,

“지난 3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래……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지 르네브?”

루시우스는 꽉 쥔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저와 폐하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니까요.”

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르네브는 경악하는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성공적으로 다시 파라디움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린 르네브는 후련하게 그레이트 홀을 나왔다.

그리고 막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잠깐 만요. 세이렌 후작 영애.”

고개를 돌린 르네브는 조금 놀랐다.

황후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황후 폐하.”

“이렇게 또 뵙네요.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 그간 강녕하셨지요?”

황후가 이카르에게 적절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보시다시피.”

“축하드려요. 무사히 돌아오시게 된 것도, 두 분 결혼도.”

황후가 르네브와 이카르, 두 사람과 각각 눈을 맞추며 말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르네브가 예를 갖춰 인사하려 하자 되었다는 듯 황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곧 바슈케르의 황후가 되실 분이잖아요? 피차 같은 입장인데 과한 예는 이쪽에서 사양하겠어요.”

“…….”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직접 만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싶었어요. 용건은 이게 전부예요. 한창 뜨거울 때의 두 분을 오래 방해할 순 없죠. 게다가 급한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라 저는 이만. 기회가 된다면 또 뵙죠.”

황후가 이카르와 르네브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르네브는 그대로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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