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두 사람의 첫 합작 (98/148)


#98화 두 사람의 첫 합작
2023.07.07.


르네브는 긴 복도를 지나쳐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 자리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르네브를 알아보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르네브와 패트릭은 기사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아 안을 둘러봤다.

벽면이 펠트로 둘러싸여 있는 걸 보아 방음에 특히 신경을 써 만든 회의장인 듯했다.

베니스탄의 대표인 벨케인 소공작과 라이나의 대표 레이첼 왕녀 외에도 각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젊은 귀족들이 회의장으로 하나둘씩 들어왔다.

그들이 모두 착석하자 드한이 회의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빈 좌석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 뒤에야 드한이 말했다.

“다들 참석해 주셨군요.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습니다.”

드한이 눈짓을 보내자 시종이 외쳤다.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 드십니다.”

회의장에 모여 있던 베니스탄, 라이나, 파라디움 등 각국의 귀족들이 모두 기립했다.

고요한 회의장 안으로 웃음기를 싹 뺀 얼굴의 이카르가 들어섰다.

“…….”

이카르는 주름 한 점 없이 각 잡힌 제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려 놓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 철저하게 정돈되어 꾸민 듯 안 꾸민 것 같은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약속한 대로 그의 검은 제복은 비큐나 원단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제복 재킷의 어깨와 커프스에는 적당한 크기의 에레메이파이트 보석이 장식되어 있었다.

앞으로 대륙 전역에 유행시키기로 계획한 물건들을 광고라도 하듯이.

“앉지.”

회의장 안을 한번 쓱 둘러본 이카르가 무심하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숨이 멎을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회의장 안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와…….”

“냉혈한이란 소문이 돌기에 상당히 우락부락하시고 거친 외모를 지닌 분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압도를 넘어서 압살하는 수준의 분위기를 흩뿌리며 등장한 이카르에게 매료된 건 비단 미혼의 영애들뿐이 아니었다.

영식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귀감이 되실 만한 분이시군요.”

“카리스마가…….”

르네브조차 넋을 잃고 이카르만 바라볼 정도였으니 다른 귀족들의 반응이 이상할 건 없었다.

“르네브?”

패트릭이 홀린 듯 이카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르네브를 일깨웠다.

“응? 응, 왜?”

여전히 연신 감탄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패트릭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이카르는 한눈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고, 패트릭도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

잠시 패트릭에게 눈길을 주었던 르네브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이카르와 딱, 시선이 마주쳤다.

고집스럽게 꾹 다물려 있던 이카르의 입꼬리가 살짝 호선을 그렸다.

“……!”

주변에서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보셨어요? 황제 폐하께서 이쪽을 보고 미소 지으셨는데……. 혹시 저를 보고 그러신 걸까요?”

르네브 근처에 앉아 있던 영애가 말했다. 곧장 원성이 쏟아졌다.

“착각은 자유라더니. 분명 저였어요. 방금 제 쪽을 보고 미소 지으셨다고요.”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황제 폐하의 시선은 약간, 15도쯤 더 앞쪽을 향해 있었거든요.”

이카르의 시선 처리를 분석하는 이도 있었다.

르네브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죄 많은 남자구나…….’

반면 패트릭의 표정은 제법 심각해졌다. 르네브가 못생긴 남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카르의 너무 잘난 얼굴 때문에 르네브가 고생하는 건 아닌지…….

“먼저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군.”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이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쯤 이카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 그대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앞으로 증명해 보이지.”

이카르는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을 향해 진중하게 말했다.

가장 먼저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연합국의 모습과 비전을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했다.

그에 따라 여기 모인 귀족들이 취하게 될 이득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이후에는 각국의 문화, 예술을 통한 교류를 강조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문화가 녹아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카르의 미래 계획에는 르네브의 의견이 제법 반영되어 있었다.

르네브는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 베니스탄과 라이나의 젊은 귀족들을 선별해서 신년제에 초대했다.

초대객들은 앞으로 베니스탄과 라이나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할 영애들과 미래에 각국의 정상에 오를 영식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 바슈케르의 문화와 예술, 복식들을 전파하게 될 예정이었다.

“……이상. 추가적인 문의나, 의견이 있다면 언제든 날 찾아오도록.”

낮고도 울림이 좋은 그의 목소리에는 충분히 좌중을 압도할 만한 힘이 있었다.

그 덕분에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은 이카르에게 완벽히 매료된 것 같았다.

짝, 짝, 짝짝짝.

한 영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르네브는 조금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

곧 다른 귀족들도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카르에게는 사람을 고취시키는 힘이 있었다.

르네브는 이러한 힘이 황제에게 꼭 필요한 덕목과 같다고 줄곧 생각해 왔었다.

지금의 이카르처럼.

***

이카르의 일방적인 의견을 귀족들의 머리에 심는 것이었던 연설이 끝나고, 회의장에 모여 있던 귀족들은 서로가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에 관계없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것 또한 이카르의 지시였다.

이카르가 말하는 연합국 체제에선 그간 각국이 취해 왔던 단일 민족주의적 성향을 다소 덜어 내는 작업이 필요했으니까.

서로의 국가는 달라도 관심사가 비슷한 또래의 귀족들을 모아 두어서 그런지 홀 안의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길면 꽤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이카르는 함께 자리한 이로 하여금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여러모로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건 르네브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많은 청중 앞에서 말까지 잘한다는 건 또 새로운 일면이었다.

“저…… 소후작님께서는 쉬는 날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내시나요?”

취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패트릭이 슬쩍 르네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의가 끝난 이후로 몇몇 영애들이 패트릭의 옆에서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적당히 대꾸해 주던 패트릭이었으나, 이내 완전히 질려 버렸다는 표정으로 르네브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남동생인가, 오빠인가…….’

르네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떨어뜨렸을 때였다.

이카르가 다가와 패트릭에게 말을 걸었다.

“소후작. 오랜만이군.”

세이렌 후작령에서와 달리 이카르는 패트릭에게 공대하지 않았다.

이는 당연했다.

패트릭은 파라디움 서부의 수호자 세이렌 후작의 아들이자 그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였으나, 황제의 앞에서는 일개 귀족에 불과했으니.

“세이렌의 패트릭.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패트릭도 아무렇지 않게 이카르에게 예를 올렸다.

줄곧 패트릭의 주변을 맴돌던 영애들이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숨을 죽였다.

그녀들의 눈빛은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여길 봐도 미남! 저길 봐도 미남……. 이곳은 진정 천국인가!’

딱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한 생각이 우스웠다.

르네브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입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때마침 이카르가 영애들에게 물러나라는 듯 눈짓을 해 보였다.

이카르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영애들은 멀리 가지 않고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폐하,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오늘 멋있었어요.”

르네브는 짧게 소감을 전했다.

이카르의 붉은 눈이 커졌다. 마치, 그런 칭찬을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것처럼.

그리고 이내 그의 눈빛이 온화하게 변했다.

조금 전까지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처럼 냉랭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돌더니 곧 날카롭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큼큼.”

그 사이에 서 있던 패트릭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이카르의 미간에 옅은 실금이 드리웠다.

그러나 이카르는 상대가 처남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꾸며 놓으니 귀공자처럼 보이는군.”

***

신년제 이후로 베니스탄과 라이나의 젊은 귀족들은 얼마간 바슈케르에서 머물다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슈케르에서 유행하는 복식을 자국에 선보였다.

반응은 즉각 돌아왔다.

라이나의 귀족들은 베니스탄에서 소량 생산되는 비큐나 원단을 대량 수입하길 원했다.

이는 베니스탄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이나에서 주로 채굴되는 에레메이파이트 수입량이 확 증가한 것이 그 예였다.

이러한 영향은 주변국들로 서서히 퍼져 나갔고, 베니스탄과 라이나는 그 이익을 충분히 취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르네브가 입었던 바슈케르의 복식도 유행을 타고 번져 나갔다.

‘요즘 저런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은 영애들이 꽤 보이네.’

살롱 안으로 들어서며 에시카는 영애들의 머리 모양과 드레스, 장신구 등을 눈여겨봤다.

유행이란 쉽게 바뀌기 마련이었다.

관심을 두고 지켜보지 않으면 어느새 혼자만 구식 드레스를 입은 채로 비웃음을 살 수 있었다.

해서 에시카는 눈에 불을 켜고 요즘 어떤 것들이 유행하는지 지켜봤다.

‘그나저나, 바슈케르의 복식과 닮은 것 같은데…… 착각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에시카가 찻잔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애의 드레스 디자인이 제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어느 의상실인지 살짝 귀띔해 주실 수 있나요?”

비단 에시카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일부러 유명한 의상실에서 산 드레스라며 자랑하는 경우도 있긴 하나, 주로 이용하는 의상실을 공개하는 건 제 패를 보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연유로 어느 의상실을 이용하지는 먼저 묻는 건 다소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영애는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

“아…… 이건 바슈케르에서 인기 있는 드레스의 디자인을 조금 흉내 내 본 거예요.”

조금 전까지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던 영애들이 동작을 딱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바슈케르요?”

“네. 얼마 전에 제 사촌이 바슈케르 신년제에 초청을 받아 다녀왔거든요.”

“영애의 사촌이라면, 하르트 백작 가의?”

“맞아요.”

에시카는 별 관심 없는 척 눈앞의 영식들에게 시선을 둔 채로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형태의 디자인이 요즘 라이나와 베니스탄 사교계에서 인기라고 하더라고요.”

“아하…….”

에시카는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생각했다.

‘원작에선 바슈케르의 복식이 유행한 적이 없었는데. 이것도 if 외전의 영향인가?’

바슈케르에서 파라디움으로 온 뒤부터 일이 나름 순조롭게 풀려서 잠시 잊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if 외전의 영향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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