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미래를 위한 준비 (97/148)


#97화 미래를 위한 준비
2023.07.06.


만약 이카르의 생각대로 된다면 앞으로 흐름은 틀림없이 달라질 것이다.

가령, 베니스탄에서만 소량 생산되는 비큐나 원단, 라이나에서 채굴되는 에레메이파이트 보석, 혹은 바슈케르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

이런 걸 바슈케르, 라이나, 베니스탄이 합심하고 독점 무역권을 행사한다면?

그 외에도 이미 이카르가 장악하고 있는 주변 소국들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사치품들의 유통을 연합국이 아닌 나라들을 대상으로 끊어 버린다면?

생필품이 아니므로 당장은 큰 불편을 겪지 않을 테다.

하지만 사치품을 제한당한 귀족들의 원성이 커질 거란 건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리고 지금 르네브가 패트릭의 외관을 공작새처럼 꾸미는 데에 열을 올리는 건 그러한 일을 한층 조장하는 격이었다.

“르네브. 음…… 내가 조금 생각해 봤는데, 이건 조금 과하지 않을까? 그, 뭐냐…… 약간 이제 막 큰 부자가 된 상인의 아들 같지 않냐는 뜻이야.”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패트릭이 호소했다.

검푸른 비큐나 원단으로 된 재킷은 금실로 크게 수가 놓여 있었고, 크라바트는 5단 프릴로 되어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재킷의 단추, 커프스는 전부 에레메이파이트 보석으로 세공한 것이었고, 포인트로 귀를 뚫지 않아도 착용할 수 있는 귀걸이까지 달아 주었다.

확실히 패트릭에겐 생소할 만했다.

‘좀 과한가?’

르네브는 커다란 공작새의 깃털로 장식된 모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패트릭의 말대로 부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졸부 집 아들 같은 분위기가 살짝 풍기는 것도 같았다.

잠시 패트릭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그의 모자를 벗겨 냈다.

“좋아, 이건 빼도록 하자.”

패트릭의 찌푸려진 미간이 조금 온화해졌을 즈음 앰버가 트왈렛 룸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말씀하신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알려 드리러 왔어요.”

르네브는 흘끔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호스트가 늦어서는 안 되는 법이니, 이만 연회 홀로 가자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변화한 패트릭의 모습을 보며 앰버가 숨을 헉, 들이켰다.

“……세상에! 지금 제 눈앞에 계신 분이 저희 패트릭 도련님 맞나요? 밖에서 마주쳤다면 몰라볼 뻔했지 뭐예요!”

앰버가 호들갑을 떨었고, 패트릭이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쨌든 멋있다는 이야기였고, 르네브의 눈에도 잘 꾸며 놓으니 패트릭이 귀공자처럼 보였다.

조금 과한 감은 있지만.

그러나 패트릭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알 만했다.

회귀 전 세이렌 후작이 죽고 가주가 된 뒤에도 패트릭은 사교계에는 두문불출했다.

오로지 서부 변경을 수호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처럼 매달렸다.

자연히 패트릭은 멋이라는 걸 몰랐고, 자신을 꾸미는 데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정말 아까운 일이고,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패트릭은 세이렌 후작을 쏙 빼닮아 과하지 않게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거기다 타고나길 큰 키와 꾸준한 검술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질의 몸을 가졌다.

하지만 패트릭은 제 외모의 가치가 꽤나 높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번듯하게 꾸며 놓은 제 모습이 마냥 어색한 거겠지.

“르네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

신년제 행사가 있는 연회 홀을 향해 복도를 걸으며 패트릭이 말했다.

“뭔데.”

“내 꼴이…… 우스꽝스럽진 않아?”

그러고 보니 패트릭의 걸음걸이가 여느 때보다 조금 어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르네브는 그런 패트릭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전혀! 진짜 멋있어. 영애들이 깜짝 놀랄 만큼!”

“그…… 그래?”

패트릭이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로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르네브는 엄지를 척 추켜세우며 패트릭의 단단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

신년제를 맞이한 바슈케르 황궁의 연회 홀은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가득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은은하게 깔린 가운데 초대된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르네브는 그중에서도 이번 신년제를 함께 준비한 레이첼 왕녀와 벨케인 소공작이 있는 방향으로 패트릭을 이끌었다.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벨케인 소공작이 르네브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이분이 세이렌 소후작님이시겠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패트릭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패트릭이 벨케인 소공작의 손을 마주 잡은 채로 힐끔 르네브를 쳐다봤다. 누구인지 묻는 시선에 르네브는 얼른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쪽은 베니스탄에서 오신 벨케인 소공작님. 그리고 이쪽은…….”

그때 밝고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접 뵙진 못했지만, 세이렌 후작 부부의 외모가 상당한 모양이네요. 영애도 그렇고, 소후작께서도 준수하신데요?”

레이첼 왕녀가 다가와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솔직한 성격으로 흔히들 하는 칭찬에 조금 인색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레이첼 왕녀의 성격을 알 리 없는 패트릭은 그저 의례적인 칭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제 동생의 미모가 어머니를 닮아 출중한 편이긴 하죠.”

제 칭찬도 포함이라는 걸 모르고 패트릭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그 때문에 르네브의 뺨만 붉어졌다.

“아…….”

르네브는 속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르네브와 패트릭을 번갈아 쳐다보며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레이첼 왕녀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말끔한 겉모습은 합격! 하지만 대외 사교술은 아직 한참 먼 것 같네요. 애 좀 먹으시겠어요.”

르네브는 머쓱하게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가 봬요. 저는 라이나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할 테니.”

빠르게 덧붙인 레이첼 왕녀가 서둘러 연회 홀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저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따가 천천히 말씀 나누시죠.”

벨케인 소공작도 눈인사를 건네곤 연회 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쁜 패트릭에게 르네브는 짧게 조언했다.

“편하게 해. 편하게.”

“어……. 그럴게.”

회귀 전 황후의 삶을 살았던 르네브와 달리 서부 변경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 온 패트릭에게 이곳은 무척 낯설 것이었다.

“르네브, 저것 좀 봐.”

패트릭이 입술을 앙다문 채로 복화술을 시도했다.

발음이 다소 뭉개져 있었으나, 패트릭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르네브는 금방 알아들었다.

패트릭의 시선은 풍성한 흰색 가발을 쓴 중년의 귀족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런 먼지떨이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있는 거야?’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패트릭의 표정을 보고 르네브는 피식 웃어 버렸다.

꼭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중년의 귀족은 패트릭의 무례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환하게 웃으며 곁에 있는 귀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는 걸 보면.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금방 흥미를 잃은 패트릭이 물었다.

“그런데 르네브, 신년제 준비는 다 네가 한 거야? 하나하나 신경 쓰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겠는데.”

큼지막한 샹들리에와 곳곳에 놓인 꽃 장식을 두리번거리며 패트릭이 물었다.

“이번엔 혼자서 애쓰지 않았어.”

“그럼?”

“레이첼 왕녀님과 벨케인 소공작께서 도와주셨어.”

연회 홀 내부 장식에서부터 식기 하나까지, 세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덕분에 좋은 점이 여럿 있었다.

르네브 혼자서 계속 바슈케르 황궁 행사를 담당하게 되거든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바슈케르의 황제가 파라디움에서 온 세이렌 후작 영애를 황후로 낙점 지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결혼 전에 미리 그녀가 황후의 능력을 갖추었는지 검증을 해 보는 거라고.

결혼 사실을 아직 숨기고 싶은 르네브의 입장에선 레이첼 왕녀, 벨케인 소공작과 함께 황궁 행사를 준비하면서 그런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슈케르 내에 귀빈들의 입지가 나쁘지 않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내기에도 안성맞춤이었고.

“……그래도 이걸 다 준비하려면 고생 좀 했겠네.”

패트릭이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그러나 르네브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따뜻했다.

“그렇지 뭐……. 그나저나, 패트릭. 언제쯤 이쪽을 힐끔거리는 영애들에게 말을 걸어 줄 거야?”

르네브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 연신 패트릭을 힐끔거리는 영애들을 눈짓해 보였다.

패트릭과 말을 섞고 싶은데 차마 용기를 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르네브,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패트릭이 물었다.

‘어쩔까…….’

패트릭과 영애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망설이던 르네브는 영애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산뜻하게 말을 걸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지요?”

르네브가 먼저 말을 걸어올 거라곤 예상 못 했는지 영애들이 흠칫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르네브는 대외적인 미소를 머금고 그녀들을 따뜻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자 무리 중에서 한 영애가 나섰다.

“오케스트라의 선곡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음식은 입에들 맞으시나요?”

르네브의 물음에 몇몇 영애가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영애들과 잠깐의 대화 후에 르네브는 본론을 꺼냈다.

“아, 참. 이분은 파라디움에서 오신 세이렌 소후작님이세요.”

“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애들이 차례로 패트릭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은 평소 패트릭이 아주 질색하는 귀족 예법이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씰룩이는 입매를 애써 단속하며 그녀들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호오…….’

르네브는 속으로만 감탄했다.

이대로 영애들의 틈에 패트릭을 혼자 두고 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벤더펠트 공작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르네브는 영애들 무리에 패트릭을 혼자 두고 벤더펠트 공작 부인 쪽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패트릭은 눈치채지 못하고 영애들을 한 명 한 명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저분이시겠네요. 차기 세이렌 후작 가를 짊어지실 분이.”

“네.”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게 딸이 있었다면 꼭 만남을 주선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분이시네요.”

……칭찬인가? 칭찬, 이겠지?

르네브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말을 살짝 곱씹어 봤다. 그녀에겐 아들만 둘 있었다.

있지도 않은 딸을 두고 가정을 하는 게 과연…….

르네브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패트릭이 원래부터 본판은 좋았으니까.’

영애들의 반응으로 보아 오늘 패트릭의 단장은 성공인 셈이었다.

“귀부인.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시종이 다가와 벤더펠트 공작 부인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알겠어요.”

시종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벤터펠트 공작 부인이 르네브에게 말했다.

“이것으로 특별 초대 목록에 계신 분들 전원 참석 확인했어요.”

“그럼 그분들을 회의장으로 불러 모아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사람들 틈 사이로 사라지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낸 르네브는 패트릭 쪽으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패트릭, 한창 즐거운 때에 미안하지만, 이제 자리를 옮겨야겠어.”

패트릭이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그러나 곧 그의 눈빛이 원망으로 변했다.

자신을 영애들 틈에 혼자 남겨 두고 자리를 떠났던 게 밉다는 듯이.

르네브는 패트릭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영애들을 향해 말했다.

“아름다운 영애들 틈에 둘러싸여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계신 소후작님께는 죄송하지만, 같이 좀 가 주셔야겠어요.”

영애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지만, 르네브는 이어 말했다.

“잠깐이면 되어요. 금방 소후작님을 돌려 드릴게요.”

싱긋 웃는 르네브와 달리 패트릭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패트릭이 진짜로 그럴 거냐는 듯 따지는 눈빛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르네브는 그 시선을 못 본 척하곤 연회 홀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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