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세대교체 (96/148)


#96화 세대교체
2023.07.05.


집무실로 돌아온 이카르는 곧장 믿음직한 수하 두 명에게 세이렌 후작령으로 잠입 명령을 내렸다.

“지금 바로 세이렌 후작령으로 떠나도록.”

“예, 폐하.”

허리를 꾸벅 숙인 두 사람이 집무실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드한이 물었다.

“폐하, 무슨 일입니까?”

베인 또한 심각한 표정으로 이카르를 쳐다봤다.

방금 집무실을 나간 두 사람은 드한과 베인 모두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은신, 잠입 및 암살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줬다. 그런 그들이 이카르의 곁을 떠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웬만큼 급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야.

“파라디움의 황제 쪽에서 장인에게 남부 해적 소탕 임무를 맡겼더군.”

“남부 해적 소탕을 굳이 서부에 있는 세이렌 후작에게 맡겼단 말입니까?”

드한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참에 해적들의 씨를 말리기라도 할 작정인 걸까요?”

베인이 물었다.

“글쎄. 일단 정확한 건 알아봐야겠지.”

이카르의 말을 끝으로 집무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 사람 다 각자 예상 가능한 경우의 수를 셈해 보기 시작했다.

머리를 맞댄 채 여러모로 생각하다 보면 정답과 근사치에 가까운 의견이 나오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렇다 할 정보 없이 상황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카르는 우선시해야 할 일부터 일깨웠다.

“라이나와 베니스탄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던가?”

“다행히 양국 모두 이번 신년제에 참석하겠다고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드한의 대답에 이카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국의 대표나 마찬가지인 레이첼 왕녀와 벨케인 소공작이 본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는 서로의 입장을 공고히 할 때였다.

이카르는 이번 신년제를 통해 라이나와 베니스탄부터 연합국에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한 평화 협정이었다.

솔티라는 변수로 인해 약간의 차질이 빚어지기는 했으나, 예상 못 한 부분은 아니었다.

애초에 전쟁 없이 연합국을 만들겠다는 취지 자체가 이카르에게도 큰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으니.

***

파라디움 황궁에서의 데뷔탕트로부터 여러 날이 흐른 어느 화창한 날.

에시카는 파라디움 황궁에 제 몫으로 배정된 침실을 둘러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내부는 화사하고 밝은 색감으로 꾸며져 있고, 창밖으로 조금만 눈을 돌려도 초록이 무성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침실이었다.

크로프트 남작 저택에서의 침실보다 백배는 더 나은 환경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거지.’

에시카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하며 이곳까지 자신을 안내한 시종을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런데 황자 전하는 언제쯤 뵐 수 있죠?”

에시카의 물음에 시종이 무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자 전하께서는 최근 황제 폐하께서 맡긴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몹시 바쁘십니다.”

“그럼 그 일이 끝나는 대로 저를 보러 오시겠네요, 그렇죠?”

에시카는 부러 깐깐한 표정과 말투를 고수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얕보는 상대 앞에서 빈틈을 쉽게 드러낸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상대를 파고들기 위한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상대에 따라 자신의 태도 또한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령, 자신을 얕잡아 보는 상대 앞에서까지 유순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시종이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에시카는 부러 천천히 목을 돌리며 엄살을 떨었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목이 조금 불편하네요.”

에시카의 말뜻을 금방 알아듣지 못했는지 시종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셨습니까? 아! 그럼, 하녀들을 불러 몸을 푸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내 에시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채고는 말했다. 에시카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느리게 덧붙였다.

“그래 주면 좋겠네요. 제가 어젯밤에 황자 전하의 안위와 관련된 꿈을 꿨는데…… 조금 신경이 쓰이거든요.”

“어떤 꿈인지 제게 말씀해 주시면 황자 전하께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종의 말에 에시카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조금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이라, 황자 전하께 제가 직접 말을 전해 드리는 편이 좋을 듯하네요.”

“……알겠습니다. 황자 전하께 그렇게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종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 낸 에시카는 그제야 그에게 나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에시카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시종이 침실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들이 찾아왔다.

에시카는 하녀들에게 마사지를 받으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잘한다, 잘해.’

조물조물 허리를 주무르는 손길이 제법 야무졌다. 에시카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나저나, 이따 루시우스가 찾아오면 무슨 이야기를 한담…….’

마사지로 인해 뇌에 혈액 공급이 잘되어서 그런가?

고민이 무색하게도, 금세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오늘은 세이렌 후작의 출정 이야기로 관심을 끌면 되겠다.’

데뷔탕트 날, 에시카는 자신이 확실히 루시우스의 관심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원작에서처럼 그와 첫 춤을 추며 주변 영애들의 부러움도 잔뜩 받았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원작대로라면 루시우스가 크로프트 남작 저에 방문해 에시카를 파라디움 황궁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러나 루시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에시카를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해서 에시카는 머리를 굴렸다.

루시우스와 다시 접점을 만들려면 그가 자주 가는 사교 모임에 초대를 받아야 했고, 그곳에 참석하기 위해 드레스와 장신구 등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루시우스와 교류가 있는 영식들과 친분을 쌓았다.

다행히 그들은 에시카의 미모에 반해 이런저런 선물들을 보내왔다. 그 덕에 드레스와 장신구를 마련하고 사교 모임에 초대받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어떻게 루시우스의 마음을 사로잡는가!

데뷔탕트가 있던 황궁 무도회에서 루시우스는 에시카에게 춤을 권했다.

그래서 에시카는 곤란에 처한 다른 영애를 돌본 착한 마음씨와 아름다운 미모에 루시우스가 반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원작과 달랐고, 에시카는 어떻게든 루시우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에시카는 원작을 알고 있는 이점을 살려 다시 루시우스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행보와 관련해 몇 가지 조언을 건넸다.

곧 있을 미래를 알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그 일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슬슬 에시카를 믿기 시작했는지 루시우스가 크로프트 남작 저를 찾아왔다.

‘영애는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날 걸 알고 있었지? 마치, 미래를 내다본 것처럼 말이야.’

루시우스의 물음에 에시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게는 미래를 예측하는 재주가 있답니다.’

‘허튼소리. 내가 그런 허무맹랑한 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았나?’

신비주의적인 면모를 풍기려 했지만, 루시우스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과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시카는 조금 더 현실성 있게 말을 꾸며 냈다.

‘황자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저는 방대한 지식을 쌓아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거든요.’

루시우스가 에시카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거둔 것 같지는 않았으나, 미래 예지 능력이 있다는 말보다는 현실성이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에시카는 쐐기를 박았다.

‘부디 제 보잘것없는 작은 능력을 황자 전하의 대업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영애가 말하는 대업이 무엇이지?’

루시우스의 물음에 에시카는 저물기 시작하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제국의 태양이 저물기 시작했네요.’

제국의 태양, 은유적으로 황제를 가리키는 너무나도 대표적인 표현이었다.

그 후로도 루시우스는 몇 번의 검증을 통해 에시카의 능력을 확인했다.

미래를 보는 특별한 능력.

‘분명 원작은 로맨스 소설이었는데 어째서……?’

에시카는 자신이 루시우스의 수하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랑해서가 아닌, 쓸모에 의해 곁에 둔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르네브가 파라디움이 아닌 바슈케르에 머무는 것부터 원작과는 대단히 전개가 달라지긴 했지만…….’

왜인지 모를 기시감에 사로잡혀 생각을 거듭하던 에시카는 몸을 시원하게 주무르는 하녀들의 손길에 나른해졌다.

‘뭐, 결과만 좋으면 된 거지. 단순하게 생각하자.’

에시카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르네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패트릭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모은 채로 툴툴거렸다.

“응. 꼭 이렇게 해야만 해.”

르네브는 개의치 않고, 패트릭과 어울릴 의복을 고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응접실의 한쪽 벽면은 남성용 의복과 구두, 모자 등이 가득했다.

“이게 나을까?”

르네브는 층층이 프릴이 들어간 크라바트를 응시했다. 르네브의 시선을 쫓던 패트릭의 자색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레이디, 이건 어떠세요?”

키어넨이 오색 빛깔의 공작새 깃털이 달린 모자를 가리키자, 패트릭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패트릭,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언제든 의견을 수용할 의지가 있으니까.”

르네브의 말에 패트릭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떨궜다.

그는 이미 자신이 어떠한 의견을 내놓든 르네브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걸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르네브는 곧 있을 신년제 참석을 이유로 바슈케르 황궁에 패트릭을 초대했다.

세이렌 후작이 남부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패트릭은 이에 응했다.

원래라면 패트릭에겐 세이렌 후작의 대리로서 파라디움 서부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바슈케르에서 선공하지 않을 것을 아는 마당에 바짝 경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르네브는 이카르에게 세이렌 후작과 관련된 계획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에 관해 드한은 이렇게 답했다.

‘폐하께서는 평화 협정이 종료되기 전에 라이나, 베니스탄과 동맹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카르가 말하는 동맹이란 이전에 통용하던 개념과는 조금 달랐다.

동맹이라 칭했지만, 이카르는 사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세이렌 후작께서 소후작께 작위를 승계하려 하시는 것처럼 베니스탄과 라이나의 유력 귀족들도 곧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겁니다.’

드한의 그 말에는 르네브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비단 두 국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르네브는 회귀 전 이 일로 제법 고생을 했었다.

루시우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유력 귀족들과 친분을 쌓는 와중에 가문의 주인이 바뀌어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체로는 선대 가주의 뜻을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가령, 새로운 가주가 기존에 친분을 유지하던 가문 대신 다른 가문과 교류를 시작한다든지 하는 일 말이다.

‘다행히 라이나와 베니스탄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번 신년제를 계기로 ‘연합국’이란 개념을 새로 도입하려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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