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혼자만의 몸이 아니니까 (95/148)


#95화 혼자만의 몸이 아니니까
2023.07.04.



「그새 날이 많이 차가워졌구나, 항상 감기 조심하거라.」

세이렌 후작의 답장은 언제나 간결했다.

그럼에도 다 읽고 나면 옅게 웃음이 지어졌다.

대체로 단순한 몇 문장에 그쳤지만, 르네브는 세이렌 후작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가씨.”

“……?”

앰버의 목소리에 르네브는 벌써 몇 번이나 읽은 세이렌 후작의 편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가주님께서는 아가씨의 몸이 아주 크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아가씨께서 이불을 세 겹씩 덮고 주무신다고 생각하신 걸까요…….”

앰버가 바닥에 쌓여 있는 이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이렌 후작의 안부 편지는 아주 짧고 간결했으나, 보내온 선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게요. 평생을 덮고 자도 다 덮지 못할 정도의 양인데요.”

다소 과장이 있었으나, 키어넨의 말이 전혀 틀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패트릭 도련님께서는 바슈케르에 산도 나무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에요.”

앰버가 장작이 잔뜩 담긴 짐수레를 창고 쪽으로 밀고 가며 말했다.

르네브는 머쓱하게 웃었다.

제 가족이 보내온 선물로 조금 난감한 건 르네브도 마찬가지였다.

유난인 건 세이렌 후작만이 아니었다.

「르네브, 넌 몸이 약하니까 특히 이런 날씨에는 벽난로 속의 장작이 꺼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아.」

패트릭은 어마어마한 양의 마른 장작을 보내왔다.

세이렌 후작령의 나무를 죄다 베어 버린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 결과 침실 창고 안은 마른 장작이, 손님용 객실은 이불이 차지하게 돼 버렸다.

연신 마른 장작과 이불을 침실 안으로 옮기는 앰버와 키어넨을 보며 르네브는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좀…… 남다른 면이 있긴 하지.”

그러고 보면 회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르네브는 원하는 것을 먼저 세이렌 부자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뭔가 가지고 싶다거나, 어딜 가고 싶다거나, 뭐가 먹고 싶다거나.

그러다 한 번은 인형 놀이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대충 둘러대기 위함이었는데, 세이렌 후작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후작령에서 수도에 있는 세이렌 후작 저로 돌아오는 길에 세이렌 후작은 짐마차 한가득 인형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세이렌 후작이 자신을 괴롭히려는 줄만 알았다.

각기 다른 인형 중에는 제법 취향이 고약한 것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이렌 후작의 서툰 애정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의 애정 표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중,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키어넨이 멈칫하는 모습이 보였다.

“응? 밖에 누가 왔나 봐요. 제가 나가서 확인해 보고 올게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키어넨이 정리 중이던 이불을 내려놓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때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르네브는 그쪽에 관심을 두지 않고 테이블 앞에 앉아 세이렌 부자에게 보낼 답장을 뭐라고 적을지 고민했다.

키어넨에게 무슨 일인지 말을 전해 듣고 온 앰버가 말했다.

“아가씨, 세이렌 후작령에서 편지가 왔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조금 전에 세이렌 후작령에서 도착한 편지와 선물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편지가 또 오다니?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하며 앰버가 건넨 편지를 받아들었다.

「당분간은 빠른 편지 회신이 어려울 것 같구나. 급하게 결정된 일인지라…….」

파라디움 황제의 명으로 출정을 나가게 됐다는 간단한 내용뿐이었지만, 르네브는 확신했다.

세이렌 후작이 남부 해적 토벌을 나서게 되었음을.

“아가씨? 왜 그러세요?”

앰버의 물음에 르네브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황명으로 출정하시게 되었다네.”

“아…….”

앰버가 탄식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회귀 전엔 르네브도 세이렌 후작의 이번 출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남부의 해적들은 잊을 만하면 출몰해서 상선이나 어부들을 공격하는 귀찮은 존재였다.

하지만 크게 위험하다는 인식은 없었다.

오히려 해적 소탕 따위에 나서라는 건 세이렌 후작 가의 전력을 우습게 여긴 게 아니냐며 봉신 가문의 기사들은 분통을 터뜨렸었다.

하지만 세이렌 후작은 황명이라며 투덜거리는 봉신 기사들을 일축했다.

조금 귀찮은 일이긴 했지만, 세이렌 후작의 입장에서 완전히 손해는 아니었다.

예전부터 파라디움의 남부 귀족 연합 세력은 세이렌 후작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남부 귀족들의 골칫거리인 해적을 토벌해 준다면 그들과의 관계도 개선이 될 거라며.

도움을 받고도 모른 체하는 후안무치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르네브조차도. 위험도가 낮다고 생각했던 출정에서 세이렌 후작이 전사할 거라고는.

“잠깐 외출을 해야겠어.”

르네브는 황급히 트왈렛 룸으로 가 외출 준비를 했다.

***

“폐하, 조금 쉬시면서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베인이 이카르의 테이블 위에 정신이 번쩍 들 만큼이나 진하게 탄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카르는 그제야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조금 쉬면서 하시죠. 몸 망가집니다.”

드한이 거들었다.

이카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그래야겠군.”

“……!”

이카르의 여상한 대답에 베인과 드한의 눈이 커졌다.

이카르의 행동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늘 하던 잔소리였다.

조금만 쉬십시오. 잠을 좀 더 주무십시오. 시간 맞춰 식사하십시오.

하지만 이카르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일 중독.

역대 황제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이카르는 일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물론 그 덕에 황위에 오른 기간에 비해 빠른 성과를 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그가 일찍 건강을 잃으면 바슈케르 제국에는 엄청난 손해였다.

“폐하께서 웬일이십니까? 저희 잔소리에 응하시다니요?”

베인이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이카르가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는 나 혼자만의 몸이 아니니까.”

“…….”

드한과 베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는 걸을 또 한 번 깨달으면서.

“5분. 휴식은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렇게 말한 이카르는 뜨거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베인은 흥미로운 눈을 하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바슈케르의 음식은 대체로 뜨뜻미지근한 온도로 조리되어 나온다.

그래서 차의 경우도 마시기 딱 좋은 온도로 내오고는 했다.

하지만 이카르는 입천장을 델 만큼 뜨거운 음식도 곧잘 먹었다.

그게 베인은 매우 신기했다.

“폐하. 어릴 적부터 궁금하긴 했습니다만, 황가의 핏줄에는 뭔가 특별한 비밀이라도 있는 겁니까? 선조가 피닉스였다거나…….”

베인의 엉뚱함에 이카르는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그런 건 없어.”

사실 베인의 궁금증에 대해선 이카르도 대답할 길이 없었다.

어린 날 영문도 모르고 황궁 밖으로 내쫓긴 뒤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이카르는 황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 공간에서 고서를 찾아봤다.

그 속에는 감춰진 역사 및 많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이카르는 흥미를 느끼고 한동안 고서를 싹 뒤져 봤다.

베인과 드한의 의심대로 남들보다 배 이상으로 좋은 체력과 회복력 등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을까 해서.

하지만 고서들엔 먼 선대 황제가 엘프라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카르는 그저 자신이 조금 독특하게 태어난 것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짧은 휴식을 취하던 중, 시종이 찾아와 알현을 청한 이가 있음을 고했다.

“폐하,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카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여나 업무에 방해가 될까 봐 르네브가 조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자신을 보러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기대하던 그날이 오늘인 모양이었다.

“오늘은 운이 아주 좋군.”

이카르는 빠른 걸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제 모습을 점검했다.

머리는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고, 의복도 크게 구겨진 부분 없이 말끔했다.

제 모습을 확인한 이카르는 복도를 향해 몸을 틀었다.

“폐하, 잠깐! 목 단추를 조금만 풀어 보시죠.”

베인이 훈수를 두었다. 베인은 저 나름대로 르네브와 이카르의 마음이 통하게 된 데 제 역할이 크다고 믿는 것 같았다.

이카르가 개의치 않고 걸음을 옮기자, 베인이 이카르의 목 부근으로 손을 뻗었다. 이카르는 재빨리 베인을 피해 복도로 걸어갔다.

“그럴 시간 없어.”

“좋은 시간 되십시오, 폐하.”

아쉬워하는 베인과 달리 드한은 멀어지는 이카르의 뒤통수에 대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베인. 될 인연은 된다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베인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되물었지만, 드한은 남은 커피를 쭉 들이켜고는 책상에 앉았다.

“그런 게 있어. 5분 쉬었으니, 일이나 마저 하자고.”

드한은 애초에 맺어질 인연은 주변에서 아무리 뜯어말려도 이어진다고 믿는 편이었다.

베인의 여러 노력이 아예 무용하다 할 수 없겠지만, 드한은 세이렌 후작 영애와 폐하가 애초에 맺어질 인연이었다고 생각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시계를 확인한 베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세이렌 후작 영애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동안 최대한 폐하 몫의 일을 해둘 작정으로.

***

“폐하, 여쭤볼 것이 있어요.”

르네브가 자신을 보러 왔다는 사실만으로 미소를 한껏 머금고 응접실로 들어섰던 이카르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르네브의 표정이 제법 심각했기 때문이다.

“아…… 바쁘신데 찾아와서 죄송해요.”

굳어진 이카르의 표정에 르네브가 빠르게 사과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이카르의 속을 더욱 심란하게 했다.

이카르는 손으로 제 얼굴을 살짝 쓸어내렸다. 무표정이 되면 화난 것 같다던 드한의 충고를 떠올리면서.

사과를 듣고자 한 건 아니었는데…….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지.”

지난번처럼 르네브 쪽에서 먼저 입을 맞춰 주거나, 달려와 품에 안기거나 하는 거창한 걸 바란 건 아니었다.

아니, 정말 아닌가?

그래. 어젯밤 이후로 한참 만의 재회이니 그러길 바란 것도 같다.

하지만 심각한 르네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이카르는 자리에 앉아 무뚝뚝하게 내뱉고야 말았다.

“무슨 일이지?”

“파라디움의 황제 쪽에서 아버지께 출정 명령을 내리셨어요.”

“출정?”

르네브를 따라 이카르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파라디움의 황제가 눈치를 챈 건가?’

평화 협정 기간이 몇 달 남지 않은 시점이긴 했지만, 파라디움의 황제가 이렇게 빠르게 전쟁 준비에 돌입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이카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르네브가 완전히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파라디움의 남부에 이따금 해적이 출몰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파라디움의 황제 쪽에서 장인에게 남부 해적 소탕을 맡겼다는 건가?”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라디움 남부 귀족들의 영향력이 강한 만큼 파라디움의 황제도 어느 정도 그들의 눈치를 보는 척은 했다.

해적들을 소탕하려거든 진즉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게다가 세이렌 후작과 같은 인물을 해적 소탕 건으로 남부에 보내다니, 어딘지 석연찮았다.

물론 한 번에 소탕해 버리려는 계획일 수도 있었다.

평화 협정이 시작된 뒤로 바슈케르와의 분쟁도 잠잠해진 참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해 보는 게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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