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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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위로
2023.06.30.
“그렇게 급하게 떠나 버려서 미안했어.”
르네브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폐하. 왜 전 그때의 일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던 걸까요?”
여러 이유가 있긴 했으나, 여전히 의문이었다.
“사람에겐 방어 기제란 게 있다고 하더군.”
“아…….”
이카르의 그 한마디에 르네브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원작의 내용을 안다고 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주요 이야기 흐름은 에시카와 루시우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 외엔 르네브 그녀 또한 무지하다는 뜻이다.
이곳 사람들의 사고방식, 사회적으로 약속된 통념, 편견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갑자기 이 세계로 뚝 떨어진 르네브가 적응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그녀를 바라봤다.
친구를 죽이려 한 악녀로.
르네브가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듯이 모든 사람이 그녀를 좋아할 수 없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어딜 가든 따라붙는 혐오와 멸시의 시선에 제법 상처를 받았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린 채로 혼자 운 적도 많았다.
몸은 아이일지라도 어른의 기억이 남아 있던 때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약한 일면을 보여 줄 수 없었던 것은.
많이 생각해 봤다.
왜 하필 악녀의 몸에 빙의한 건지, 빙의한 시점이 어째서 악행을 저지른 뒤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르네브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신경을 꺼 버렸다.
참 재미있게도 덕분에 상처가 되었던 그 일을 차츰 잊을 수 있었다.
이제는 언급이 없으면 아예 기억 저편에 묻어 버려 떠올리지 못할 만큼이나.
“……영애?”
그때의 생각에 사로잡히자 눈앞이 살짝 흐려졌다. 이카르의 잘생긴 얼굴이 조금 이지러져 보였다.
“하아…….”
순간 이카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르네브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카르의 가슴은 넓었고, 근육 때문에 부드럽기보다는 바위를 끌어안는 것처럼 딱딱했지만, 따뜻했다.
가늘게 떨리는 르네브의 등허리를 느리게 쓰다듬던 이카르의 커다란 손이 이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는 어설픈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아 주고 토닥여 줄 뿐이었지만, 위안이 되었다. 위로가 되었다.
한참 이카르에게 끌어안겨 있던 르네브는 그의 몸의 변화를 눈치채곤 뺨을 붉혔다.
“위, 위로해 주셔서 고, 고맙습니다. 덕분에 많이 진정이 됐어요. 그…… 조금 떨어져서…….”
르네브는 시선을 돌리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이카르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
“이제 영애가 내게 이야기해 줄 차례겠군.”
르네브의 동그란 어깨 위로 내려앉은 숨결이 뜨거웠다.
“……?”
“비밀. 이야기를 해 주기로 했던 것, 기억 안 나는 모양이지?”
……그때 그런 실언을 했었구나.
아마도 어렸던 그녀가 빨리 이카르가 눈을 뜨길 바라면서 조잘거렸던 모양이었다.
난감해진 르네브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런 그녀의 입술에 이카르의 뜨거운 시선이 닿았다.
“……뭐, 일단은 넘어가지. 어차피 영애는 결혼 계약서에 묶여 이제 도망도 가지 못할 테니.”
시원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카르가 르네브의 입술에 자잘한 키스를 흩뿌렸다.
그의 붉은 눈엔 미처 가시지 않은 열기가 가득했다.
***
“장인, 처남. 결혼을 축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카르가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
“…….”
세이렌 부자는 이카르의 눈을 피하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이 결혼은 절대 안 된다며 강하게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의 행동을 보자면 은근히 반대해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귀한 선물을 받은 뒤에 결혼을 허락해 주었으니, 마치 뇌물을 받아 마음을 돌린 것 같은 상황이 내심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타이밍이 그다지 좋진 않았지.’
하지만 르네브도, 이카르도 잘 알았다. 세이렌 부자가 왜 결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는지.
“그럼 저흰 이만 가 볼게요.”
르네브가 이별을 고하자 그제야 세이렌 부자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벙긋거리는 세이렌 후작 대신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또 올 거지?”
“그럼 당연하지. 여기가 내 집인데.”
르네브의 대답에 세이렌 후작은 물론이고, 패트릭의 눈도 커졌다. 그녀가 그간 살갑게 굴지 않았던 건 사실이니.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세이렌 부자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 머물도록 두었다는 걸.
그때는 두 사람이 파라디움 제국의 안위만을 생각한다고, 제게 관심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혼자만 가족과 떨어진 곳에 버려둔 것이라고.
“엄청 귀한 딸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폐하.”
세이렌 후작이 이카르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패트릭도 따라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보통은 부족한 딸이지만 잘 부탁한다고 하지 않나?’
이카르가 제법 진중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두 분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결코 없도록 한다고 약속드리죠. 제 곁에 있는 한 르네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게 지내게 될 겁니다.”
이카르의 대답이 만족스러웠을까?
그제야 패트릭의 얼굴에도 세이렌 후작의 얼굴에도 안도감이 엿보였다.
두 사람이 떠나고, 육안으로는 더 이상 마차가 보이지 않은 정도로 멀어졌음에도 세이렌 부자는 저택 앞에 계속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르네브의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했다.
“왜, 아쉬운가?”
그런 르네브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이카르가 물었다.
르네브는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폐하의 곁에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담 다시 가족을 만날 날도 머지않을 테니까요.”
르네브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카르의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그리고 어김없이 키스 세례가 퍼부어졌다. 뺨에, 콧잔등에, 이마에…….
가족에게 결혼 허락까지 받은 사이라 그런지 이제 이카르의 스킨십은 거침이 없었다.
“가, 간지러워요. 폐하.”
르네브가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렸으나, 이카르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더욱 몸을 맞붙여 오며 르네브의 약점을 공략했다.
“여기가 약한가 보군?”
***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이동 마법을 사용해 바슈케르 황궁으로 돌아온 덕에 원래라면 이동에만 한 달은 족히 걸릴 여정은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돌아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레이디. 먼 길 다녀오시느라 피곤하시죠?”
키어넨이 마치 몇 년은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자매처럼 격하게 르네브를 반겼다.
“저는 안 보이시나요?”
앰버가 새초롬한 얼굴로 끼어들자, 키어넨이 얼른 덧붙였다.
“물론 앰버도 보고 싶었죠!”
피식 웃은 앰버가 들고 있던 짐 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 안을 뒤적였다.
르네브는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키어넨, 여기요.”
“와……! 혹시 이전에 말했던 그 물건인가요?”
주고받기로 했던 물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키어넨의 목소리에선 기뻐하는 기색이 한껏 묻어났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이거 파라디움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귀한 거래요.”
조금 으스대는 앰버의 목소리에 르네브는 작게 웃으며 긴 복도를 지나 침실로 향했다.
콘솔 앞에 앉아 목걸이를 풀어 내리던 르네브는 제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바라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행복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동시에 조금 두려웠다.
이 행복이 깨질까 봐.
원작의 시작이 이제 곧이었다.
회귀 전에도 해피 엔딩을 맞을 거란 착각을 한 뒤에 불행이 찾아왔었다.
물론 이번엔 절대 당하기만 하진 않을 테지만.
***
파라디움 황궁 연회장 안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디며 에시카는 내부를 둘러봤다.
크림색 천장과 벽면의 테두리에는 화려한 금장식이 가득 들어가 있었고, 벽면마다 예술품과 벽화가 걸려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위로 수십 개의 촛대가 황궁 연회장을 환히 밝혔다.
어찌나 밝은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게 화려함의 극치라는 건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귀족들에게 황궁의 부유함과 위엄을 뽐내기 위함이었다면 대성공인 셈이었다.
오늘 이 무도회 준비를 위해 실로 어마어마한 금화가 사용됐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예상보다 훨씬 부유해 보이는 파라디움 황실 내부를 둘러보며 에시카는 안심했다.
바슈케르에서 일이 틀어지긴 했지만, 다시 추위에 떨지도, 소매가 닳아 빠진 드레스를 입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정말 다행이야.’
에시카가 파라디움 황궁의 화려함에 압도되어 있을 때였다.
황제와 황후가 연회홀 안으로 들어섰다. 귀족들은 그들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고개를 들라.”
중후한 황제의 음성이 울리고 에시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저 사람이 파라디움의 황제…….’
에시카는 눈만 슬쩍 굴려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한 여자를 응시했다.
‘그럼 저 사람은 황후일 테고…….’
두 사람의 근처에 선 다른 황족들에게로 에시카의 시선이 옮겨갔다.
황족 특유의 밝은 금발을 가진 황족들 사이에서 에시카는 금방 루시우스를 찾아낼 수 있었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인 만큼 그는 키가 훤칠하게 컸고,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확실히 한눈에 반할 만했다.
사람 눈은 다 똑같은지, 여기저기서 영애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분이 루시우스 황자 전하시겠죠?”
“맞아요.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네요.”
에시카는 그녀들의 말에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그대들의 춤 솜씨를 보도록 하지.”
황제는 제법 길고 지루한 축사가 끝나자 본격적인 무도회 시작을 알렸다.
황제와 황후가 홀 중앙에 도착하자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이내 남녀 한 쌍을 이룬 귀족들이 연회홀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직 춤을 추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바로 오늘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들이 되시겠다. 그리고 에시카는 이 그룹에 속했다.
사교계에 첫선을 보이는 자리인 만큼 영애들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가 제일 먼저 영식의 춤 신청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 영식의 가문은 어떠한가? 같은 것에 대해서.
여기서 춤 신청을 받지 못하면 큰일이었다.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선 드레스와 그에 맞는 장신구가 필요했다. 너저분한 꼴로는 황궁 입구조차 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해서 많은 귀족들이 데뷔탕트를 투자의 개념으로 여겼다. 지금보다 나은 가문과의 결합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한껏 치장에 열을 올린 영애들 사이에서 에시카만큼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꽃이 피어나듯 에시카의 미모는 최고조로 물이 오른 상태였으니까.
“와…….”
“정말 아름답네요. 대체 어느 가문의 아가씨죠?”
역시나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