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때 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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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그때 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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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그때 그 아이
2023.06.27.
르네브는 세이렌 후작의 침실을 나서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안쓰러움에 옆에서 손수건을 건네려던 스튜어드는 르네브의 표정을 보고는 내심 화들짝 놀랐다.
눈가가 붉어 처연하게 보였으나, 입꼬리는 살짝 휘어져 있었다.
혹시 조금 전의 모습은 연기였을까?
그리 생각하자 더더욱 아가씨가 두려워졌다.
“고마워요. 스튜어드.”
스튜어드가 내민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은 르네브가 옅게 미소 지었다.
스튜어드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제가 잘못 봤노라고.
아가씨께서 주인님들을 속여 넘기기 위해 연기를 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순진한 아가씨를 의심했다는 자체가 불손했다.
스튜어드는 속으로 자신을 비난하며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런 스튜어드를 바라보는 르네브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스튜어드?”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찮은 거죠?”
르네브의 걱정 어린 표정에 스튜어드는 몸을 바로 했다.
“물론입니다.”
르네브는 서둘러 이카르에게 결혼 허락을 받았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폐하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오늘은 일찍 외출하셨습니다.”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제 침실로 돌아왔다.
‘드디어 허락을 받아 냈어……!’
세이렌 후작을 찾아가기 전 르네브는 패트릭 먼저 설득했다.
완고한 세이렌 후작보다는 패트릭을 설득하는 것이 조금 더 쉬울 거란 판단에서였다.
패트릭과의 대련에서 이긴 시점에서 이미 세이렌 부자는 이카르를 인정하고 있었을 터다.
‘하지만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히 태도를 바꿀 수는 없었겠지.’
그래서 르네브는 증거를 보여 주기로 했다. 두 사람이 마음을 바꿀 명분 또한 만들어 주고.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거냐고 묻는 대목에서는 진심으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회귀 전이 떠올랐으니까. 홀로 외로웠던 그때의 기억을 반추하자 쉽게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르네브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적당히 그쳤다.
이토록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덕분에 자신에게 이용 가치가 있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가족이란 단어를 떠올리자 다시금 카엘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르네브는 인내했다.
‘아직 떠나보낸 아이를 애도하기에는 일러.’
제게서 카엘을 빼앗아 간 두 사람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고민하는 편이 훨씬 더 생산적이었다.
***
“폐하께서 돌아오셨어요.”
하녀가 이카르의 귀가 소식을 알리자마자 르네브는 침실을 나와 저택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이카르와 베인의 모습이 보였다.
“폐하,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르네브 곁으로 성큼 다가온 이카르가 대답했다.
“그리운 곳에.”
“그리운 곳이라뇨?”
되묻는 르네브에게 베인이 대답했다.
“국경 근처에 별장이 하나 있습니다. 폐하께서 예전에 그곳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런 곳이 있다면 함께 가 보고 싶은데…….
르네브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카르가 툭 내뱉었다.
“오랜만에 구겔호프가 먹고 싶군.”
“……?”
갑작스러운 이카르의 발언에 르네브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카르는 평소 단 걸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홍차에도 꿀 한 숟가락 넣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구겔호프라니?
“폐하? 설탕이 잔뜩 뿌려진 그 달콤한 디저트를 말씀하시는 게 맞나요?”
르네브의 물음에 이카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실로 의아했지만, 이카르 쪽에서 무언가를 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게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요리장에게 얼른 만들어 달라고 할게요.”
르네브는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카르가 르네브의 어깨를 쥐고 제 쪽을 보도록 몸을 빙글 돌려세웠다.
“어딜 가려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인이 끼어들었다.
“주방에는 제가 말하고 오겠습니다.”
말을 끝마치자마자 베인이 저벅저벅 큰 걸음으로 멀어졌다. 베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르네브에게 이카르가 귀엣말을 건넸다.
“영애, 내게 잠깐 시간 내줄 수 있나?”
“……?”
“차나 한잔했으면 하는데.”
“물론이죠. 좋아요.”
르네브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세이렌 부자와의 일로 상의할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난 뒤부터는 이카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바슈케르 황궁에서는 하루에 한 번, 얼굴만 잠깐 보는 게 다였다. 지나치게 바쁜 이카르의 업무 때문에.
파라디움에 오는 일로 이카르는 며칠간 휴가를 낸 상태였고, 이번처럼 오래 이카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애는 정말이지…….”
이카르가 거기까지 말하곤 마른 입술을 핥았다. 르네브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금세 진득해졌고, 목이 타는지 툭 불거진 목울대 또한 크게 일렁였다.
이카르는 르네브가 ‘좋다’고 할 때마다 이런 반응을 보여 왔다. 너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그런 반응.
그리고 르네브는 은근히 그걸 즐겼다.
자신이 이카르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고 마는 것이다.
과거엔 결코 경험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것 말이다.
이게 심적으로 얼마나 르네브를 충족시켜 주는지 과연 이카르는 알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느새 돌아온 베인이 두 사람 사이로 쓱 끼어들었다.
“저…… 여기 현관입니다.”
확실히 오가는 고용인마다 르네브와 이카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제 할 일을 하러 떠나는 발걸음이 상당히 무거웠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이카르가 태연한 얼굴로 말하곤 르네브 앞에 팔을 내밀었다.
“그게 좋겠네요.”
르네브는 단단한 이카르의 팔에 살포시 손을 얹고는 걸음을 옮겼다.
***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고 르네브는 세이렌 부자에게 결혼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을 이카르에게 알렸다.
“그게, 정말인가……?”
믿기지 않는지 이카르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네. 두 분 모두 허락하셨어요.”
르네브에게서 다시 한번 대답을 듣고 나서야 이카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실 또 어떤 방법으로 날 시험하려 들지 조금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이카르의 표정이 제법 자신만만해 보였다.
세이렌 부자의 허락을 받아 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방법도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는 듯이.
그러한 이카르의 발언은 르네브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토록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잘 믿기지 않았다.
“그랬나요?”
르네브가 푸스스 웃자, 이카르가 물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두 사람을 설득했는지 궁금하군.”
르네브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입술을 벙긋거리다 이내 얼버무렸다.
자존감 바닥이었던 자신의 일면을 낱낱이 이카르의 앞에 드러내는 게 과연 옳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행히 이카르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아 참! 이 근처 별장에 가 보셨다고 하셨죠?”
“음…… 별장 주인이 바뀌면서 외관도 제법 바뀌어 있더군.”
이카르의 얼굴에 약간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려는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베인의 말에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주문하신 구겔호프입니다.”
곧 베인이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베인을 바라보며 르네브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먼저 디저트를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신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폐하껜 이 디저트에 추억이 있으신 모양이더군요.”
르네브와 이카르의 앞에 각각 접시와 포크를 놓아 주는 베인을 바라보며 르네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카르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알고 싶었다.
“……?”
그런데 내오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카르는 구겔호프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르네브가 먹는 모습만 구경했다.
“영애도 이걸 제법 좋아한다고 들었어.”
구겔호프를 조금 떠먹은 르네브는 홍차로 입안을 헹구고는 대답했다.
“웨버링 백작님 덕분에 폐하의 직속 요리장이 만든 걸 몇 번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입에 꽤 잘 맞더라고요. 폐하께서는요?”
“단 건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디저트만은 특별하거든.”
과거를 떠올리는 건지 시선을 내리깐 채로 이카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동시에 르네브의 호기심도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추억이 있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르네브를 보며 이카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즉답했다.
“아주 좋은 질문이군.”
***
타닥타닥.
장작 타오르는 소리.
포근하게 몸을 감싸는 침구의 보드라운 느낌. 은은하게 코끝을 맴도는 알싸한 페퍼민트의 냄새.
이카르는 주변을 느끼며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있었다.
‘……죽은 건가?’
그렇지 않고선 이 모든 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13세의 이카르는 용병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황제가 보낸 황실 기사들에게 쫓기다 크게 다쳤고, 피를 철철 흘렸다.
곧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니까 사후 세계가 아니고선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신이 들어?”
그때 작게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카르는 어렵게 눈을 뜨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눈을 굴렸다.
뚜렷하고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아이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놀란 건지 큰 눈을 토끼처럼 뜨고, 자그마한 입도 살짝 벌어져 있었다.
‘아…….’
잠시 눈앞의 여자아이를 바라보기만 하던 이카르는 곧 깨달았다.
죽기 직전에 보았던 사람의 모습과 그녀의 모습이 닮아 있음을. 동화책이나 볼 나이는 지났음에도 유치하게 요정이라고 생각했던.
‘천사였나……?’
번뜩 든 제 생각이 우스웠지만, 그 외에는 별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던 자신을 치료해 주고, 안전한 곳에 옮겨다 놓았다는 선택지도 있긴 했지만.
“읏…….”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복부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왜 그래? 상처가 아파서 그래?”
여자아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미간과 콧잔등이 잔뜩 찡그려진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괜찮다고 여자아이에게 대답을 해 주고 싶었으나, 바싹 마른 입술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 어쩌지……! 밖에 누구 있어?”
여자아이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러자 밖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이 오빠, 깨어났어. 그런데 많이 아픈가 봐. 어떡하지?”
“네? 깨어나셨다고요? 제가 보기엔 아직 주무시는 것 같은데요.”
기력이 없는 그는 어느새 눈을 다시 감은 채였다.
“어…… 다시 자는 건가?”
“통증이 엄청날 거라서 강한 약을 써 두었거든요. 금방은 못 일어나실…….”
대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카르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