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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후작의 깨달음 (87/148)


#87화 후작의 깨달음
2023.06.26.


한편, 이카르는 의자에 느른하게 앉아 베인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폐하, 바나나 외에도 코코넛 워터와 최고급 아트바시 꿀을 가져왔습니다.”

베인의 말대로 침실 한 공간을 차지한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여러 가지 물품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카르는 물품들을 쓱 둘러보며 물었다.

“그 외에는 뭐가 있지?”

“알아보니 소후작께서 류트에 취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류트를 가져왔습니다.”

이카르의 시선이 벽면에 세워진 류트로 옮겨 갔다.

전혀 예술 방면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던 처남이 음유 시인처럼 류트를 튕기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의외로군.”

“한번 보시겠습니까? 류트 장인이 매해 12개만 소량 생산하는 것으로, 파라디움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거랍니다.”

베인이 조심스럽게 류트를 들어 이카르에게 건네려 했다. 하지만 이카르는 되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장인께 드릴 건 뭐가 있지?”

이카르의 물음에 베인이 하나씩 물건을 소개했다.

“이건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갑옷이고, 이건 오레이칼코스로 만든 검입니다. 그리고 또 이건…….”

세이렌 후작령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뇌물을 줘서 르네브 가족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가족이 되는 것에 축하의 의미로 선물을 건네려 했지.

하지만 격하게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세이렌 부자를 보자 이카르는 내심 조바심이 일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렇게 이어졌다.

파라디움에서는 좀처럼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물건들을 선보이는 것으로.

발단은 독주의 여파로 힘들어하는 세이렌 후작 때문이었다. 가족들의 반대에 마음 쓰는 르네브의 모습에 이카르는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이카르는 곧장 베인에게 바슈케르에 다녀올 것을 명했다.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당도가 높은 개량종 토마토와 바나나를 가져오라고 말이다.

이동 마법은 바슈케르의 극비나 마찬가지라 쉽게 사용할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물론 르네브의 마음은 얻었으니, 가족의 동의 없이 이대로 그녀를 바슈케르에 붙잡아 두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세이렌의 부자는 르네브에겐 둘뿐인 가족이었다.

그들의 진심 어린 축하 속에서 행복해하는 르네브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이 모든 걸 준비한 것이고.

“지시하신 대로 후작 가의 고용인들에게 줄 선물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고용인들에게 먼저 선물을 나눠 줄까요?”

세이렌 후작은 정이 깊은 인물이었다.

곁에 두기로 결정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편이었지만, 한 번 내 사람이라고 결정한 순간부터는 쉽게 내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지금 세이렌 후작 가에 있는 고용인들은 최소 5년 이상 장기 근무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얻어 두어서 나쁜 결과가 돌아오지는 않을 터.

“그렇게 해.”

이카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폐하.”

***

외출을 마치고 후작 저로 돌아온 세이렌 후작은 말고삐를 마부에게 넘겼다.

“이제 오십니까? 가주님, 어서 오십시오.”

마부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가주의 귀가를 반겼다.

“이 녀석을 부탁하네.”

“배부르게 먹이고 잘 쉴 수 있게 하겠습니다.”

마부가 말 허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말을 데리고 마구간으로 향하는 마부의 기분이 오늘따라 좋아 보였다.

‘기분이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세이렌 후작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마침 빨래 바구니를 들고 저택으로 향하던 하녀들과 마주쳤다.

“어서 오세요. 가주님.”

그녀들은 재빨리 세이렌 후작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수고가 많군.”

세이렌 후작은 그대로 그녀들을 지나쳐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등 뒤에서 꺄르르르 하녀들이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이렌 후작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세탁실 하녀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재미난 일이라도 있었나 보군.’

세이렌 후작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돌아오셨습니까, 가주님.”

스튜어드가 깊이 허리를 숙이곤 손을 뻗었다.

세이렌 후작은 재킷을 벗어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

“오늘따라 저택 분위기가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군.”

“아, 그렇습니까? 가주님께서 신경 쓰지 않으시도록 제가 잘 주의시키겠습니다.”

좋은 일이라도 있냐는 물음이었으나, 스튜어드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세이렌 후작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저택 안 분위기가 좋은 것 같아서 물어본 것이네.”

“아, 그것이…….”

세이렌 후작의 뒤를 따라 걸으며 스튜어드가 말끝을 흐렸다. 자연히 세이렌 후작의 고개가 스튜어드 쪽으로 돌아갔다.

대답을 요구하는 그의 눈빛에 스튜어드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값진 선물을 받아서 사기가 증진된 모양입니다.”

값진 선물이라…….

세이렌 후작 저의 고용인들은 서로 사이가 좋은 편에 속했고, 누군가의 생일이라거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함께 기뻐하는 편이었다.

“생일을 맞이한 이가 있나?”

“아, 아닙니다.”

후작 또한 작은 선물이라도 건넬 요량으로 물었으나, 스튜어드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군가 집안에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지?”

그러나 세이렌 후작이 긴 복도를 지나 침실 앞에 다다를 때까지 스튜어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얼른 대답하지 않고 뭐 하냐며 다그칠 수도 있겠으나, 세이렌 후작은 고용인들에게 제법 관대한 주인이었다.

그리고 스튜어드가 아무 이유 없이 대답하지 않을 리도 없고…….

방 안으로 들어선 세이렌 후작은 침실 안을 차지한 물건들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스튜어드, 이게 다 뭔가?”

“차례로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이것은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갑옷이라고 합니다.”

세이렌 후작은 별 감흥 없는 눈빛으로 스튜어드가 가리킨 갑옷을 내려다봤다.

드래곤의 비늘은 워낙 가짜가 많았다.

누군가 자신을 핫바지로 본 게 아닌가 싶어 기분이 조금 상했다.

그러나 스튜어드가 다음 물품을 가리켰을 땐 세이렌 후작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오레이칼코스로 만든 검…….”

“……!”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었다는 갑옷과 달리 오레이칼로스 검은 가품도 돌아다니지 않는 물건이었다.

실제로 파라디움의 선선대 황제에게 선물이 들어온 적이 있다고 했고.

“호오…….”

세이렌 후작은 유심히 검을 바라봤다. 손잡이 장식은 정교했고, 검날은 잘 벼려져 있었다.

대장장이에게 진품인지 확인하는 편이 확실하겠으나, 언뜻 보기에도 좋은 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대체 누가 이걸 선물했다는 겐가?”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십니다.”

조금 전까지 놀라움과 기쁨으로 물들어 있던 세이렌 후작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꾹 다물렸다.

“그러니까, 내 딸을 빼앗아 가기 위한 뇌물이라는 말이로군.”

심기 불편해진 세이렌 후작을 보며 스튜어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똑똑.

곧 문 너머에서 세상 단 하나뿐인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귀가하셨다고 들었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세이렌 후작은 불쾌함으로 가득하던 표정을 싹 지웠다.

그러고는 냉큼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 앞에는 딸과 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들어들 오거라.”

침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르네브와 패트릭을 바라보며 스튜어트가 물었다.

“차를 준비해 올까요?”

“부탁할게요.”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앉자꾸나.”

세이렌 후작이 상석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르네브와 패트릭은 각각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웬일로 둘이 함께 자신을 찾아왔는지 조금 의아했지만, 세이렌 후작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자 패트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희 르네브의 입장도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패트릭의 지지에 힘입어 르네브는 테이블 위에 양피지를 펼쳤다.

“……이게 무어냐?”

“폐하께서 제게 제시한 결혼 계약서예요.”

결혼 계약서라니! 허락을 받기도 전에 벌써 그런 것을 작성했다니!

역시나, 의심했던 대로 바슈케르의 황제가 제 순진한 딸을 살살 꼬여 낸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세이렌 후작은 미간을 와락 구긴 채로 딸이 내놓은 결혼 계약서를 훑어봤다.

“……?”

그런데 계약 조건이 너무나 좋았다.

황실과의 혼담에서 보통 꿈도 꿀 수 없을 만한 조건으로, 일반 귀족 남성도 이런 조건을 달고 결혼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분께서 감언이설로 단단히 너를 꾀어낸 모양이구나.”

세이렌 후작이 애써 코웃음을 치자, 패트릭이 계약서 하단을 가리켰다.

“아버지, 신전의 공증도 이미 받아 두었더군요.”

세이렌 후작의 눈이 커졌다.

이깟 결혼 계약서가 있다고 한들 황제가 지킬 마음이 없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신전의 공증이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계약을 위반할 시 황제는 신의 뜻을 저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이 되었으니까.

국가별로 신전의 힘이 강하고 큰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현명한 군주라면 비단 신전과 굳이 척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 말이다.

“흠…….”

세이렌 후작은 팔짱을 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달콤한 제안일수록 사기일 확률이 높다는 걸 세이렌 후작은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르네브. 대체 그분께서 어째서 네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이 드는구나.”

세이렌 후작은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놨다. 그러자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 큰 눈망울을 촉촉하게 적셨다.

“아버지, 그 말씀은…… 제가 폐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인가요?”

“……!”

순간 세이렌 후작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크게 당황한 세이렌 후작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르네브! 네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니……!”

“그렇잖아요? 어째서 이렇게까지 황제 폐하와의 결혼을 반대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

“제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서…… 그래서 황제 폐하의 사랑을 의심하시고 결혼을 반대하시는 거잖아요?”

큰 눈망울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달고 처연하게 말하는 딸의 모습에 세이렌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듣고 보니, 르네브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아버지.”

마찬가지로 르네브의 눈물 바람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며 패트릭이 덧붙였다.

“르네브는 제게 과분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동생입니다. 그런 르네브를 사랑한다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

세이렌 후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큰 깨달음이 찾아왔다.

제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딸이었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그런 아이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딸을 향한 황제의 사랑을 계속 부정하고 의심한다면 그건, 르네브가 사랑받아 마땅하지 않다는 말과 같았다.

“그, 그런 게 아니다, 르네브. 나는 그저 네가 행복하길 바랐을 뿐이란다.”

“그렇다는 말씀은, 폐하와의 결혼을 허락하시겠다는 뜻인가요?”

르네브가 눈물을 쓱 닦으며 물었다.

더는 바슈케르 황제와의 결혼을 반대할 마땅한 명분이 없었던 세이렌 후작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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