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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좋아 죽겠다 (81/148)


#81화 좋아 죽겠다
2023.06.20.


드한이 떠나고 르네브는 결혼 계약서를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봤다.

드한의 반응으로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이카르가 제안한 계약 조건이 너무 좋았다.

황후만이 아닌, 황제도 정부를 들이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황위 계승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카르와의 결혼 후에 황후에게 매년 배정되는 내정금은 어마어마했고, 상당량의 황실 재산이 르네브의 소유가 되었다.

“조건이 좋아도 너무 좋은데?”

르네브는 계약서에 함정은 없는지 꼼꼼히 조항들을 읽어 봤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이카르에게 불공정한 계약이라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물론 이혼은 천재지변이 있어도 절대 불가능하다는 조항이 내심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 계약서는 반드시 신전의 공증을 받게 될 것이며…….」

르네브는 마지막 줄을 읽고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무리 봐도 르네브에겐 흠잡을 데 없는 계약서였다.

‘그나저나, 아버지와 패트릭을 어떻게 설득하지?’

이 부분에 대해선 이카르와 한번 대화를 나눠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르네브는 바슈케르 황궁 정원을 걸으며 저 멀리 자리한 푸르른 산맥을 한참 바라봤다.

한동안은 보지 못할 풍경이었다.

곧 세이렌 부자를 설득하러 잠시 이곳을 떠나 있어야 하니까.

“산책하고 있었나 보군.”

등 뒤에서 들려온 감미로운 저음에 르네브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고개를 돌리자, 르네브의 예상대로 나른한 미소를 띤 채 이카르가 서 있었다.

“폐하, 일은 어쩌시고 나오셨어요?”

“때로는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실감했거든. 동행해도 되겠나?”

그렇게 말하며 이카르가 자연스럽게 르네브의 옆에 와 섰다.

푸스스 웃으며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후 르네브가 황궁 정원을 거닐 때면 어김없이 이카르가 나타났다.

동쪽의 정원이든, 서쪽의 정원이든 가리지 않고, 마치 금속이 자석에 이끌리듯이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점심을 먹고, 이카르와 황궁 정원에서 대화를 나누는 일상이 르네브에겐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이카르는 매우 바빴기에, 르네브의 점심 산책에 동행하지 못한 날엔 늦은 저녁이라도 황후의 침실로 방문하곤 했다.

이카르는 르네브의 예상보다 훨씬 더 자상했다. 그리고 사랑꾼이었다.

하루라도 르네브를 보지 않으면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구니 말이다.

르네브로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예쁘니까.’

르네브는 눈만 힐끔 굴려 이카르의 옆얼굴을 훔쳐봤다. 마찬가지로 눈만 힐끔 굴려 이카르가 르네브를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군.”

“네, 좋아요.”

르네브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내뱉은 말에 이카르가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는 듯 심장께를 움켜쥐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는 데다 그의 입매가 파르르 떨리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르네브의 대답이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정작 내 얼굴 볼 때마다 좋아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이카르 본인이면서.’

***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레이디.”

키어넨의 배웅을 받으며 르네브는 침실을 나섰다. 그 옆에는 르네브의 짐 가방을 든 앰버가 함께였다.

“파라디움에서 선물 꼭 사 올게요.”

앰버가 손을 흔들자, 키어넨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르네브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르네브와 함께 복도를 걸으며 앰버가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가주님과 패트릭 님께서 허락하실까요?”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허락을 구해 봐야지.”

앰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하긴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분이라면 결국,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두시겠지만요.”

앰버의 말대로였다.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은 회귀 전에도 그렇게 했다.

처음에는 루시우스와의 갑작스러운 약혼 선언에 절대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중에 가선 허락했다.

르네브가 루시우스를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물론 결혼 후에도 세이렌 부자는 루시우스를 별로 탐탁지 않아 하긴 했으나, 르네브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 주었다.

이번엔 그때보다 훨씬 더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지만…….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했다.

마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베인이 르네브를 발견하고는 냉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제게 주십시오.”

르네브는 작은 손가방 하나만 들고 있었다.

그리고 앰버는 제법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있었다.

르네브는 힐끗 앰버가 들고 있는 가방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가방을 들어 줄 거라면 앰버의 것부터 챙겨 주라는 의미였다.

베인과 르네브 사이에서 빠르게 눈을 굴리던 앰버가 베인에게 짐 가방을 내밀었다.

고장 난 기계처럼 잠시 앰버가 내민 가방을 바라보던 베인이 이내 짐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것도 주십시오.”

솔로 말 갈기를 빗어 내리던 마부가 그 모습을 보고는 냉큼 달려와 베인이 들고 있는 가방을 받아 들었다.

르네브는 마부가 짐마차에 제 짐 가방을 싣는 모습을 지켜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나 보네요?”

르네브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등 뒤에서 익숙한 저음이 울렸다.

“바로 출발해도 되겠나?”

르네브는 곧바로 이카르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쉼표 스타일로 깔끔하게 정돈한 흑발.

태양을 등지고 있음에도 빛을 발하는 수려한 외모.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흰색 제복은 이카르와 정말이지 찰떡이었다.

르네브는 잠시 넋을 잃고 제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이전부터 이카르가 엄청난 외모의 소유자라는 건 르네브도 잘 알고 있었다.

반하고 나면 답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해 왔었을 뿐.

그리고 이카르를 향한 마음의 제약을 풀자마자 자꾸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볼 때마다 그렇게 좋은가?”

그런 르네브의 심리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걸까?

눈매를 유려하게 휘어 웃으며 이카르가 물었다. 자연히 르네브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네. 좋아요.”

르네브는 솔직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카르가 옅게 한숨을 내쉬며 끙끙거렸다.

“하…… 정말 미치겠군.”

“왜 그러세요, 폐하?”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카르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이카르의 남성적인 목울대가 일렁였다. 르네브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진득해졌다.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약간 긴장이 되었다.

르네브도 덩달아 침을 꿀꺽 삼켰을 때였다.

“큼큼…….”

베인이 돌연 크게 헛기침을 하더니, 르네브와 이카르에게 동의를 구했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앰버는 입술을 말아 물고 발치에 시선을 둔 채로 르네브와 이카르를 번갈아 힐끔대고 있었다.

“……!”

르네브는 곧 자신들이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르네브는 얼른 입을 열었다.

“이제, 출발할까요?”

“그러지.”

반면, 이카르는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르네브를 에스코트했다.

***

바슈케르 황궁을 벗어난 마차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멈췄다.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는 건가요?”

“그래.”

르네브의 물음에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 내리려던 이카르가 돌연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앰버라고 했던가? 그대와 친밀하다던 하녀의 이름이.”

“네. 그건 왜 물으세요?”

“눈 깜짝할 새에 세이렌 후작령에 도착했다는 걸 알면 조금 놀랄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거라면, 제가 나중에 잘 설명해 둘게요.”

처음 파라디움에서 바슈케르로 올 때도 이동 마법을 사용해 이동 시간을 단축했었다.

마차로 보름 거리를 단번에 뛰어넘는 것을 보고 르네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건 파라디움에는 없는 방식이었다.

이번에도 이동 마법으로 눈 깜짝할 새에 바슈케르 황궁에서 세이렌 후작령까지 이동한다면 다시 한번 놀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폐하, 이번에는 눈가리개를 하지 않아도 괜찮나요?”

마차에서 내린 이카르가 르네브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왜 그 방식이 영애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

“설마요. 그때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느냐고, 그 말을 하려다 르네브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이카르가 르네브 쪽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되물었다.

“얼마나?”

채근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르네브는 결국 속내를 털어놓았다.

“무, 무서웠다고요.”

이카르의 붉은 눈이 조금 커졌다.

“너무나 담담해 보여서, 무서워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군.”

이카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곤 이내 르네브의 뺨을 그러쥐고 부드럽게 말했다.

“배려가 부족했군. 앞으로는 영애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금세 반성하고 뉘우치는 데다가 다음번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해 준다.

그런 이카르의 태도는 르네브의 가슴 한편을 뭉클하게 했다. 제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루시우스와는 너무나 판이한 대응이었다. 굳이 지나간 과거와 비교하려 하는 것이 아님에도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뿐이더라도, 자신을 소중히 대해 주는 이카르가 정말 고마웠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죠.”

르네브의 뺨을 만지작거리던 이카르가 곧 몸을 돌렸다.

‘이동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을 볼 수 있으려나?’

르네브는 마차 창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두려우면서도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이카르가 무어라 지시를 내렸고, 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이카르가 다시 마차에 올랐다.

‘이동 마법은 어떻게 된 거지?’

르네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보는데 이카르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맞은편 자리 대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이카르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르네브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폐하?”

“마음 같아서는 더한 방법으로 영애를 안심시켜 주고 싶지만, 아직 혼전이니 이것으로 참도록 하지.”

이카르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르네브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데 마차 밖에서 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도착했습니다.”

벌써, 도착했다고?

이카르가 가늘어진 눈으로 르네브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도 무서웠나?”

사실 지난번에는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곳에 가야 한다는 두려움에 더불어 시야까지 차단당하는 바람에 무서웠던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함께 있는 사람은 믿음직스러운 이카르였고, 그가 제게 해를 끼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르네브는 굳게 믿고 있었다.

무서웠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던 건 일종의 투정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에는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르네브는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마차 창틀에 턱을 괸 채로 이카르는 느긋하게 바뀐 풍경을 바라봤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오는군.”

마찬가지로 조금 전부터 마차 창 너머로 시선을 둔 채로 르네브가 물었다.

“여기가 세이렌 후작령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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