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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루시우스의 분노 (80/148)


#80화 루시우스의 분노
2023.06.19.


“황자 전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사단장이 다가와 루시우스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이내 루시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정말인가?”

“예…….”

희게 질리도록 아랫입술을 짓씹은 루시우스는 짧게 지시를 내렸다.

“바로 파라디움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

고개를 끄덕인 기사단장이 서둘러 귀빈실을 나갔다.

“후우…….”

한숨을 내쉰 루시우스는 짤막하게 적은 쪽지를 시종에게 건넸다.

“세이렌 후작 영애께 전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래.”

“답변은 어떻게 할까요?”

건국제 이후 바슈케르 황궁에 머물면서 루시우스는 수차례 르네브와 만나길 희망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 왔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의 희망을 품었다.

이제 자신은 바슈케르를 떠나야 했고, 르네브를 파라디움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잠깐 기다려 보고 답변을 주지 않거든 곧장 돌아오도록.”

“예. 황자 전하.”

시종이 귀빈실을 떠나고 난 뒤 루시우스는 르네브의 답변을 기다리며 귀빈실을 서성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온 시종이 고개를 저었다.

“황자 전하, 파라디움으로 돌아가실 거라면 서두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급박한 와중에 시간을 허비했다는 걸 루시우스도 모르지 않았다.

“가지.”

곧장 귀빈실을 나온 루시우스는 황급히 마차에 올랐다.

“황자 전하, 바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마차 창 너머에서 기사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두르도록.”

“예!”

지체 없이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루시우스는 마차 창 너머로 빠르게 멀어지는 바슈케르 황궁을 바라보며 미간을 모았다.

‘솔티와의 전쟁이 이렇게 빨리 끝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전쟁이 길어지면서 빠르게 황폐해져 가던 솔티 내부에선 급기야 반란이 일어났다.

바슈케르와의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지탄의 대상이 된 왕을 숙청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을 주동한 건 솔티 귀족들의 구심점이었던 마벨 공작과 리젠시 백작이었다.

그들은 솔티 왕을 처형한 뒤 왕성 입구에 효수했다.

이는 가짜 왕녀를 보내 바슈케르를 기만한 죄를 바슈케르에 사죄하기 위함이었다.

기실 솔티가 취할 마땅한 방법 또한 없었다.

바슈케르 군이 왕성 코앞까지 와 진을 치고 있었고, 성이 함락되는 것도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벨 공작은 차후 반역을 일으킨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솔티인을 위한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왕성이 함락되면 바슈케르군은 농경지를 불태우고 삶의 터전을 흙발로 짓밟을 테니까.

루시우스는 그 모든 정황을 솔티에 잠입해 있던 수하를 통해 빠르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루시우스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루시우스가 건국제를 맞아 바슈케르에 온 데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황제가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솔티로 출정했으니, 바슈케르 황궁은 빈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시우스는 이 기회를 틈타 빈집을 털기로 했다.

처음 파라디움의 황제는 루시우스의 계획에 반대했다. 하지만 계속된 설득으로 많지는 않으나, 군사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준비는 철저했고, 자신이 있었다.

루시우스는 먼저 황궁 깊숙이 군사들을 배치해 두고 요직에 있는 인물부터 처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예상대로 작전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거사를 치를 날을 목전에 두었을 때 바슈케르의 승전 소식이 들려왔다.

으레 승전 후엔 제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자국으로 귀환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바슈케르의 황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홀로 황궁으로 돌아올 줄이야.’

루시우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는 루시우스에게 악수로 작용했다.

처음에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군사 없이 혼자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를 신속히 처리한다면 일이 더욱 쉬울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되레 함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바슈케르의 황제는 인질을 내놓으라며 파라디움의 황궁에 홀로 찾아왔다.

하지만 과연 그가 정말 혈혈단신으로 적국에 왔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때 바슈케르의 황제는 파라디움의 북부와 남부에 은밀히 군사들을 배치해 둔 상태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란 추측이 가능했다.

만약 계속 르네브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테고, 역습을 당하는 쪽은 오히려 루시우스였을 지도 몰랐다.

“하…….”

길게 한숨을 내쉰 루시우스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데다, 아무런 수확 없이 파라디움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참으로 암담했다.

올라오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루시우스는 주먹으로 마차 벽을 내리쳤다.

단단한 목재로 만들진 마차 벽이었지만, 루시우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움푹 팼다.

***

르네브는 사냥 대회 중간에 갑작스럽게 귀환한 이카르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왔다.

막 전쟁이 끝난 터라 할 일이 많아서 그런지 이카르는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르네브도 제 침실로 돌아와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키어넨이 내려 준 따끈한 꽃차를 음미했다.

“향이 좋네요.”

“마음에 드세요? 새로 들어온 찻잎인데 맛도 좋지만, 향이 유독 좋더라고요.”

“그러네요.”

심신을 편안하게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아까 레이디께서 귀가하시기 직전에 파라디움 황자 전하의 시종이 다녀갔어요.”

키어넨이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를 내밀었다. 르네브는 키어넨에게 건네받은 루시우스의 쪽지를 펼쳐 보았다.

급하게 파라디움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다는 내용으로 자신과 함께 파라디움으로 가길 원한다면 오늘이 마지막이라 적혀 있었다.

‘루시우스가 원래 이렇게 질척거리는 성격이었나?’

르네브는 잠시 회귀 전의 루시우스에 대해 곱씹었다. 그러나 이런들 저런들 이제 와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르네브는 다 읽은 루시우스의 쪽지를 벽난로 속에 던져 넣었다.

루시우스는 건국제 이후 곧장 파라디움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슈케르 황궁 귀빈실에서 머물렀다.

표면상으로는 바슈케르 귀족들과 친목을 다지고, 타국의 문화를 경험하기 위함이라 둘러댔다.

하지만 르네브는 루시우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을 파라디움으로 데려가는 것 말고도 다른 속셈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감도 오지 않았다.

그때 마침 내실에만 머물기 답답해하던 앰버가 황궁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들을 르네브에게 전했다.

‘아가씨. 요즘 황궁에 새로 사람을 들였나요?’

그에 관해 드한에게 따로 들은 바가 없었다.

‘어쩌면 건국제 때 바로 돌아가지 않고, 황궁에 남은 분들일지도 모르겠네요.’

앰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어딘지 석연찮았던 르네브는 이 사실을 드한에게 알렸다.

‘그렇습니까?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황궁 내에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조사에 들어간 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이카르가 돌아왔다.

단지 회귀 전보다 전쟁이 빠르게 끝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일에 상관관계가 있을 거란 추측도 가능했다.

르네브가 바슈케르에 오지 않았다면 루시우스 또한 건국제 참여를 위해 바슈케르에 오지 않았을 테니까.

실제로 회귀 전 루시우스는 이 시기에 바슈케르 건국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황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었지.

“…….”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키어넨의 목소리가 르네브의 상념을 끊었다.

“레이디. 드한 경께서 찾아오셨어요.”

드한 경이?

조금 의아했지만, 곧 급한 용건이겠거니 하며 르네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렸나요?”

“네, 레이디. 차를 준비할까요?”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는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급한 일인가 보네요.”

“그런 셈입니다.”

르네브는 드한 앞에 놓인 서류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건 뭔가요?”

“계약서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계약서라니?

르네브는 의아한 얼굴로 드한에게서 받아 든 계약서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 떡 벌어지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드한 경? 계약서라는 게…… 결혼 계약서였네요?”

드한이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아무래도 폐하께선 이 결혼을 절대 무를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영애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카르와의 결혼을 르네브가 동의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드한이 곧 작게 덧붙였다.

“영애, 언제든지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당근을 흔들어 주십시오.”

“……당근을 흔들면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영애를 도울 것입니다.”

“황후의 존재가 누구보다 필요한 분은 드한 경이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강압에 못 이겨 결혼하신다면 제 마음이 내내 불편한 것 같아서 그럽니다.”

르네브는 드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드한이 찻물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덧붙였다.

“물론 굳이 폐하와 결혼하지 않으시더라도 영애께서 제 일을 도와주신다면 감사하겠지만 말이죠.”

르네브는 푸스스 웃었다.

“폐하의 강압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폐하와 결혼하기로 한 건 온전히 제 의지에요.”

“정말입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르네브에게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안도한 듯 드한이 명치를 쓸어내렸다.

“그럼 긴말할 필요 없겠군요. 계약서를 확인해 보시죠. 추가하거나 수정하고 싶은 사항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천천히 보고 싶은데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바로 서명하지 않으셔도 되니 충분히 검토해 보시죠.”

이만 자리를 뜨려는 듯 드한이 찻잔에 남은 찻물을 들이켰다.

“드한 경.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영애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 조항이 이상하죠? 이것도, 이것도요.”

드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계약서를 툭툭 짚었다.

“계약서에 관련된 질문이 아니었어요.”

“……그렇습니까?”

머쓱했는지 드한이 뺨을 긁적였다.

“파라디움의 황자 전하와 관련된 일이에요.”

“역시 눈치채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

“파라디움의 황자 쪽에서 앙큼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나 봅니다.”

드한이 그간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했다. 전부 듣고 나자 르네브는 한층 심란해졌다.

회귀 전에도 바슈케르와 파라디움의 관계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바슈케르 황궁에 잡입해 황제가 없는 틈을 노릴 만큼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결국, 미수에 그쳤지만, 이카르가 이를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이대로 바슈케르와 파라디움 사이에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불안한 심리가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드한이 르네브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을 보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애께서 우려하시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안심이 되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은 한층 시끄러워졌다.

바슈케르에서 전쟁을 원한다면 파라디움 서부에 있는 제 가족과 이카르의 충돌은 피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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