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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결혼 계약서 (79/148)


#79화 결혼 계약서
2023.06.18.


두 번째?

그럼 첫 번째는 무엇이냐고 물으려는 찰나였다.

“……!”

돌연 자리에서 일어난 이카르가 마차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르네브를 올려다봤다.

“폐, 폐하!”

자연히 르네브의 동공이 화등잔만 하게 부풀었다. 제국의 황제가 무릎을 꿇는 일은 있어선 안 되었다.

“이, 일어나세요.”

갑작스러운 이카르의 돌발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르네브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나와 결혼해 주겠나, 세이렌 르네브?”

“……!”

르네브는 앉지도 서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르네브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이카르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그새를 못 참고 르네브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 것처럼.

“그 대답은 이미 돌려 드렸잖아요…….”

“제대로, 다시.”

“……세이렌의 르네브. 황제 폐하의 청혼을 수락하겠습니다.”

기어코 르네브의 입에서 허락의 말을 듣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카르가 몸을 일으켰다.

***

오랜만에 바슈케르 황궁에 돌아온 이카르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이 이카르를 발견하고 절도 있게 허리를 숙였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 무사 귀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카르는 그들의 어깨를 자상하게 두드려 주었다.

“그대들이 언제나 수고가 많군.”

항상 보여 주던 무감한 표정과 무뚝뚝한 태도 대신 이카르는 기사들을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카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사들은 놀란 눈을 하고 서로를 쳐다봤다.

“폐하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이는데, 내 착각인가?”

“솔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게 기쁘신 게 아니겠어?”

바로 떠오르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라고 하기엔 석연찮았다.

솔티와의 전쟁 이전에도 바슈케르 제국은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황제 이카르는 작은 승리에 쉽게 도취 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방안을 내고, 성취한다.

이것이 그들의 주군 이카르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이번 승전은 그의 대업에 한걸음 가까워진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토록 기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기사들은 이카르의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은 이유가 무엇일지 저마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카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드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폐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드한 경. 그간 혼자 고생이 많았겠군.”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이카르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오늘처럼 인생이 아름다웠던 적은 없다는 양.

“……?”

드한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 이카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집무실에 들어와 업무를 시작하는 데까지 수초면 충분하던 이카르였다.

그런 그가 바로 책상에 앉지 않고, 책장 앞에 섰다. 드한은 냉큼 이카르의 옆에 서며 물었다.

“폐하, 찾으시는 서류가 있으십니까?”

“여기 있군.”

필요한 서류를 금방 찾은 모양이었다.

“그건 무슨 서류입니까?”

“하루라도 빨리 계약서를 써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시가 급한 계약이라…….

“아! 솔티와의 종전 계약을 서두르시려는 거군요.”

드한은 이카르의 현명하고 신속한 판단에 깊이 공감하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쟁은 바슈케르의 승리로 끝났고, 이제 양국 간의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는 일만 남았다.

“아니, 그거 말고.”

이카르가 고개를 저으며 책상에 앉았다. 자연히 드한의 고개도 갸웃 기울었다.

“그럼 어떤…… 계약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후와 결혼 계약서를 작성해 둬야겠어.”

이카르는 씨익 웃었고, 드한의 눈은 흡사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세이렌 후작 영애를 만나러 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었다.

“여, 영애께서! 결혼에 동의하신 겁니까……?”

“물론이지. 아주 흔쾌히 승낙하더군.”

이카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의 벽화에서 볼 법한 자애롭고도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드디어…… 폐하! 진심으로 결혼 축하드립니다.”

큰소리로 외치던 드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눈물이 다 찔끔 날 것 같았다. 아니, 조금만 방심하면 울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드디어! 이 살벌한 업무에서 해방이라니!’

울다가 웃으면 신체에 변화가 있을 거라는 외국의 속담조차 잊을 정도로 기뻤다.

어느 정도냐면, 당장 채신머리없이 훌라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곧 이카르가 작성한 계약서를 보고 드한은 미간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반려 외엔 평생 정부를 둘 수 없다.」

계약서의 내용은 첫 줄부터 심상치 않더니.

「황제와 황후 사이의 자식만이 황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다.」

아랫줄로 내려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

세이렌 후작 영애를 향한 집착이 뚝뚝 묻어나는 계약서를 읽어 내리며 드한은 심란한 마음이 되었다.

드한의 눈에 이건 불공정 계약이 틀림없었다.

‘이혼은 천재지변이 있어도 절대 안 된다니?’

앞으로 절대 이카르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강력한 구속 수단으로서 이 계약서는 요긴하게 쓰일 것이 분명했다.

드한은 속으로만 르네브를 가여워했다.

‘그러니까,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시라고 말씀드렸는데…….’

하지만 제 조언을 흘려들은 쪽은 르네브였다. 드한은 계약서를 두고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이대로 계약을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드한은 계약서를 챙기며 물었고, 이카르가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대단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알겠습니다, 폐하…….”

결국, 드한은 불공정 계약서를 챙겨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파라디움 수도 변방에 있는 크로프트 남작 저택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곧 마차 안에서 갈색 머리의 귀부인이 내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구불구불하고 풍성한 분홍 머리를 가진 영애가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가 크로프트 남작 저구나.’

에시카는 잠시 저택 외관을 쓱 훑어봤다.

커피 하우스에서 본 크로프트 남작 부인의 행색은 나름 봐 줄 만했었다.

그래서 조금 기대를 품었으나, 남루한 저택 외관을 보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려 했다.

하지만 에시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차피 황궁 무도회 전까지만 이곳에서 지내면 될 테니까…….’

도망치듯 바슈케르 황궁을 빠져나올 때 챙겨온 장신구들을 팔아 한동안은 파라디움에서 호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수입이 제로인 상황에서 금화는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어쩌나 하고 걱정할 즈음 우연히 크로프트 남작 부인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후계를 갖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 크로프트 남작 부인에게는 불행이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에시카에게는 행운이었다. 이제는 성인을 입양하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귀부인들의 대화를 듣자마자 에시카는 입양 시설로 향했다.

처음엔 에시카를 보고 조금 당황하던 원장도 곧 흔쾌히 승낙했다.

‘이 정도 외모면 부유한 자산가의 후처로 들어갈 수 있겠어. 잘하면 성인 입양을 원하는 귀족 가도 노려 볼 수 있고 말이야.’

에시카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크로프트 남작 부인이 입양 시설을 찾아왔다.

‘이런 걸 묻는 게 실례라는 건 알지만, 가족이 되기 전에 미리 알아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크로프트 남작 부인은 에시카의 과거에 관해 물었다.

짧은 고민 끝에 에시카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저는 바슈케르의 몰락 귀족이에요.’

‘아…….’

헛숨을 들이켠 크로프트 남작 부인은 에시카의 다사다난하고 고된 과거를 제멋대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에시카는 그녀의 추측에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엷은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그 결과는 에시카가 크로프트 남작의 양녀가 되는 일로 이어졌다.

“어서 오세요. 마님.”

크로프트 남작 저 안으로 들어가자 하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힐다. 이분은 오늘부터 우리 크로프트 가문에서 함께 지내실 에시카 양이란다.”

크로프트 남작 부인이 하녀에게 에시카를 소개했다. 에시카는 특유의 천진난만하고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힐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에시카 아가씨.”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크로프트 남작 부인이 말했다.

“그래. 에시카. 이제는 이 크로프트 남작 저를 네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지내렴.”

에시카는 감격에 찬 눈망울로 양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런 에시카에게 크로프트 남작 부인이 미소로 화답했다.

“힐다, 에시카에게 지낼 곳을 안내해 주렴.”

“예, 마님. 이쪽으로 오시죠. 아가씨.”

힐다를 따라 복도를 걸으며 저택 안을 둘러보던 에시카는 시선을 느끼고 힐끔 뒤를 돌아봤다.

크로프트 남작 부인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시카는 그녀에게 꾸벅 묵례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외관도 허름하더니, 내부는 더 하네…….’

제 예상보다 크로프트 남작 가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바슈케르 제국의 황궁에서 왕녀 신분으로 지냈던 에시카였다.

파라디움에 온 뒤로 쭉 머물던 고급 여관과 비교해도 확실히 크로프트 남작 저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입술을 삐죽이던 에시카는 속으로만 한숨을 삼켰다.

‘뭐, 그래도 더글릭 자작 가에서처럼 하녀로 지내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낫겠지.’

상황이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에시카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여기가 오늘부터 아가씨께서 사용하실 침실입니다.”

와우.

앞으로 제가 사용할 방을 보자마자 든 감상이었다.

곧 정략혼으로 크로프트 남작 가를 떠날 거라곤 해도 명색이 귀족 영애의 침실이 소박해도 너무 소박했다.

“힐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가씨.”

“음…… 오늘은 첫날이니까요. 힐다와 조금 더 친해지면 말을 편하게 할게요.”

“네. 아가씨 마음 편하실 때 편히 말씀해 주세요.”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게요.”

“네. 편히 쉬세요, 아가씨.”

에시카는 하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제 침실 안을 둘러봤다.

“와…… 이걸 어쩌지?”

고급 커피 하우스를 드나드는 귀부인이라 조금 더 부유하리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오산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와 후회해도 늦었다는 현실감이 밀려들었으나,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돌아오는 황궁 무도회에서 성공적인 데뷔탕트를 치를 것. 그리고 루시우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것.

원작대로라면 바슈케르에 있을 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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