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참 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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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참 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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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참 쉽구나
2023.06.17.
잠시 얼떨떨해하며 얼어있던 이카르의 눈매가 이내 곱게 휘어졌다.
“황후가 되어 달라고 한 그 제안 말이군.”
이카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카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좋아 죽겠는데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몸집은 르네브의 배가 넘는 커다란 남자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또 사랑스러웠다.
르네브는 이카르를 덥석 끌어안았다. 물론 끌어안았다는 표현보다는 커다란 고목에 매달린 꼴에 가까웠지만.
한동안 꼭 끌어안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다 몸을 떨어뜨리자, 이카르의 얼굴이 서서히 기울었다.
열망이 가득한 이카르의 붉은 눈을 바라보다 르네브는 눈을 감았다.
***
벨케인 소공작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르네브가 사라진 방향 쪽으로 몸을 틀었다.
기사들이 인근 사냥터를 점검했다고는 하나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건 위험했다.
조금 전만해도 상태가 이상한 멧돼지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나.
벨케인 소공작은 르네브를 뒤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건 진한 입맞춤을 나누고 있는 르네브와 이카르의 모습이었다.
“하아…….”
벨케인 소공작의 잇새로 허탈한 한숨이 흘렀다.
르네브와는 친구로라도 남고 싶었다. 이제 그것도 다 틀려 버린 모양이지만.
이카르가 솔티와의 전쟁으로 황궁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친구로 남자고.
제 마음을 눈치채고 경계하는 르네브에게 최대한 사심 없이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르네브가 제게 다시 마음을 여는 것 같자 욕심이 났다.
르네브를 사교 모임에 초대해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렸고, 멧돼지의 피가 튄 것을 상처 입은 것이라 오해하고 자신을 걱정하게 그대로 두었다.
심지어는 충동적인 선택을 해 버렸다.
활 쏘는 자세를 교정해 준다는 명목으로 르네브와 닿으려 했던 것 말이다.
결국, 좋지 못한 선택이 돼 버렸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깊게 발전했다는 것도 모르고…….
벨케인 소공작은 한참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비참하고 참담한 기분으로.
***
에시카는 커피 하우스 야외 테라스에 앉아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이 오가는 사람을 관찰했다.
그간 파라디움에서의 생활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물론 바슈케르 황궁에서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는 가짜 왕녀라는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에시카가 묵고 있는 고급 여관에선 때가 되면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나왔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객실 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으로 에시카는 파라디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상점가에서 발견한 신상품들을 사 모았다.
처음에는 그 재미가 꽤 쏠쏠했다.
하지만 호화롭고 평화로운 나날도 오래가지 않았다. 슬슬 금화가 바닥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어쩌지.’
옅게 한숨을 내쉬며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조곤조곤한 귀부인들의 대화 소리가 귀에 콕 박혔다.
“……그래서 이제 포기할까 해요. 저도 남편도 많이 지쳤거든요.”
“귀부인, 그간 마음고생 너무 많이 하셨어요.”
“전생에 무슨 죄를 짓기라도 한 건지, 그래서 신께서 저희 부부에게 아이를 점 지어 주지 않으시는 건지…….”
“아휴, 그런 말씀 마세요. 분명 신께서는 귀부인을 위한 계획이 다 있으실 거예요.”
“……그럴까요?”
“그럼요, 그럼요. 인연이란 건 언제 어디서 닿을지 모르는 거니까요. 저희만 해도 그랬거든요.”
“……?”
“아, 귀부인께선 모르고 계셨나 보네요. 사실 저희도 셋째는 입양했답니다.”
“……그러셨군요.”
“오히려 좋은 점도 있어요. 사실 부모도 아이도 서로를 선택할 수 없잖아요? 저희 첫째 보면 말 다 했죠. 뭐.”
에시카는 귀부인들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곤 생각했다.
‘입양?’
정확한 건 아니었지만, 원작의 에시카도 파라디움 귀족의 양녀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하급 귀족 가였지.’
한미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르네브는 종종 에시카를 무시하곤 했었다.
‘파라디움 제국민의 존경을 받는 아버지를 잘 둔 것일 뿐 자신의 능력 따위는 보잘 것도 없었으면서.’
물론 이번 생에는 솔티의 왕녀와 후작 가의 영애로 마주했음에도, 그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지만.
“그럼 다 자란 평민 아이를 입양하셨다는 건가요?”
“네, 분명한 이점이 있거든요. 외모가 좋고, 머리가 명석한 사람을 골라서 가문에 들일 수 있잖아요.”
귀부인이 고민하는 듯 시선을 살짝 떨어뜨렸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귀부인이 덧붙였다.
“귀부인께서 이미 마음을 정하셨다고 하니, 권해 드려요. 가능한 남녀 각각 한 명씩 입양하세요.”
“……둘이나요?”
“남자는 가문을 이을 수 있도록 하시고, 여자의 경우는 좋은 가문에 시집보낼 수 있게요.”
귀부인들의 대화를 계속 엿듣고 있던 에시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아! 이제 알겠네.’
원작은 에시카가 파라디움의 황궁 무도회에서 데뷔탕트를 치르면서 시작되었다.
여자 주인공에 빙의해서 기뻤던 것도 잠시, 어째서 자신이 바슈케르 귀족의 하녀 따위가 되어 있는지 에시카는 줄곧 의문을 가졌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원작의 시작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
이카르는 한참이나 르네브를 품에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입술은 물론이고, 몸 이곳저곳에 입맞춤을 퍼부어 댔다. 꼭 멀리 여행 갔다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대형견처럼 말이다.
물론 멀리 떠나갔다 돌아온 쪽은 르네브가 아니라 이카르였지만.
결국, 르네브는 사냥 대회의 우승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못한 채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폐하 혼자서만 돌아오신 거예요?”
급히 혼자서만이라도 황궁에 돌아올 만큼 중요한 일이 있었던 걸까?
“전쟁이 끝났으니까.”
르네브의 손을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깍지 껴 잡은 채로 이카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전쟁이, 벌써 끝났다고요?”
르네브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이카르가 심술 맞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영애는 솔티와의 전쟁을 더 질질 끌었으면 했던 모양이지?”
르네브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회귀 전에 그랬듯 솔티와의 전쟁에서 이카르가 승리할 거란 걸 의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확하게 날짜까지 꼬집기는 어렵지만, 그 시일이 회귀 전보다 한참 앞당겨진 건 확실했다.
“그럼? 내가 빨리 돌아온 게 마음에 안 드는가 보군.”
순식간에 싸늘해진 이카르의 표정에 르네브는 얼른 덧붙였다.
“폐하께서 건강히 돌아오신 건 정말로 기뻐요.”
이카르가 진심인지 확인이라도 하듯 르네브를 빤히 바라봤다. 르네브도 지지 않고, 이카르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르네브를 바라보는 이카르의 눈빛이 그윽하게 변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이카르에게 끌어안겨 한참이나 입맞춤을 당했던 터라 그런가?
괜히 목이 탔다.
르네브는 얼른 마른침을 삼켰다.
“표정을 보아하니 기쁜 건 사실인가 보군.”
그제야 이카르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옅게 미소 지었다. 걱정과 달리 마차 안에서까지 르네브를 물고 빨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전에도 이카르와 단둘이 마차에 탄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마차 안의 정적이 신경 쓰인 적은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르네브가 입을 뗀 순간이었다.
“폐하…….”
“영애…….”
애석하게도 동시에 이카르도 입을 열었다.
“…….”
르네브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이카르에게 눈짓을 보냈다.
‘먼저 말씀하세요.’
그러자 이카르가 말했다.
“영애 먼저.”
“……부상 소식을 들었어요.”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기울었다.
“부상?”
“네. 폐하께서 전투 중에 크게 다치셨다고 드한 경께 전해 들었거든요.”
르네브는 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회귀 전에도 이번 생에도 이카르의 부상 소식은 외부로 전혀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건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기에, 조심했다는 방증이었다.
혹여나 이카르가 부상 소식을 숨기려 한 게 맞는다면 묻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아야 했다.
이제 그는 그저 적국의 황제가 아닌, 르네브의 남편이 될 사람이니까.
“……이제 완쾌하신 건가요?”
이카르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르네브는 조금 초조해졌다.
‘역시 묻지 말았어야 했나.’
사냥대회에서 입은 상처를 수치로 여겼던 루시우스처럼 이카르도 부상 소식을 숨기고 싶을 수도 있었다.
르네브가 막 입을 떼려는 찰나 이번에는 이카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잊어버리고 있었군.”
잊고 싶을 만큼이나 이카르에겐 끔찍한 기억이었던 걸까?
르네브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을 때였다.
“살짝 베인 정도였으니, 부상이라는 표현조차 상당히 거창하게 느껴지고 말이지.”
“살짝 베인 정도였다고요? 듣기론 크게 다치셨다고…….”
“드한이 영애에게 그렇게 말하던가?”
르네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카르의 잇새로 헛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카르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정말로 부상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
상황 설명을 전부 듣고 난 르네브는 저도 모르게 이카르의 손을 꽉 쥐었다.
조용히 분노하는 르네브를 바라보며 이카르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러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도, 드한 경과 베인 경이 그대에게 사실을 왜곡해 전달한 모양이야. 내 측근의 실수였으니 그들을 대신해서 사과하지.”
이카르의 진정성 있는 사과에 언제 분노했냐는 듯 기분이 풀어졌다.
‘참 쉽구나.’
르네브는 속으로만 자조했다.
자신이 한 번 마음을 준 상대의 말 한마디에도 크게 영향받는 경향이 있다는 걸 전남편 루시우스를 통해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리고 그 성격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카르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나빴다가 좋았다가 날뛰는 것을 보면.
“기분은 좀 풀렸나?”
이카르가 르네브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생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아도 되는 황제 폐하께서 제 기분을 살뜰히 살피는 모습에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네, 이제 다 풀렸어요. 폐하를 걱정하며 지냈던 걸 생각하면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요.”
르네브의 말에 이카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이카르의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내 걱정을 하느라 밤잠을 설쳤단 말이지?”
“그럼요.”
르네브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르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영애에게 들은 말 중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