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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좋아요 (77/148)


#77화 좋아요
2023.06.16.


날아간 화살이 멧돼지의 한쪽 눈을 맞췄다.

꾸에에엑!

멧돼지가 고통을 호소하며 비틀거렸고, 벨케인 소공작이 달려가 놈의 숨통을 끊었다.

짐승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적막한 산을 크게 울렸다. 이내 사위가 잠잠해졌다.

“죽었나요?”

“네.”

검을 허공에 툭툭 털어 낸 벨케인 소공작이 휘슬을 불었다.

곧 소리를 듣고 잘 훈련된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상공을 빙글빙글 돌았다.

컹컹.

이어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사 앞에 묶인 채로 만져 달라고 애교를 부릴 때는 마냥 귀엽기만 하던 사냥개들이 제법 믿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달려왔다.

‘아!’

흐뭇한 눈으로 사냥개들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번뜩 든 생각에 숨을 헉, 들이켰다.

“왜 그러십니까?”

르네브의 반응에 벨케인 소공작이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공작님, 저 개들 이쪽으로 유인할 수 있으시겠어요?”

의문 가득한 눈으로 르네브를 쳐다보던 벨케인 소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럼 일단 부탁드릴게요.”

“말씀하신 대로.”

벨케인 소공작이 허리춤에 매고 있던 작은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흔들었다.

그러자 쓰러진 멧돼지 쪽으로 달려가던 사냥개들이 진로를 변경해 이쪽으로 달려왔다.

“잘 훈련된 아이들이니, 먹이에는 언제나 반응하기 마련이죠.”

벨케인 소공작은 달려온 사냥개들의 입에 고깃덩이 하나씩을 물려 줬다.

언제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웠냐는 듯 사냥개들이 바닥을 뒹굴며 애교를 부렸다.

“아…….”

개들의 배를 쓱쓱 쓰다듬어 준 벨케인 소공작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작게 탄식했다.

“설마, 멧돼지를 물었다가 사냥개들이 병에 옮을까 봐 이쪽으로 유인하신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르네브를 감탄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벨케인 소공작이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걱정을 해 주는 건 고맙지만, 르네브는 멧돼지와 스친 적조차 없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저보다는 벨케인 소공작님께서 다친 것 같은데요.”

르네브는 핏자국이 묻어난 벨케인 소공작의 셔츠 단을 가리켰다. 벨케인 소공작이 시선을 내려 르네브가 가리킨 곳을 확인했다.

“아, 이건 제 피가…….”

벨케인 소공작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상처를 수치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회귀 전의 루시우스도 사냥 대회에서 입은 상처를 감추려 들었다.

‘그까짓 자존심이 뭐라고.’

르네브는 옅게 한숨을 쉬고는 벨케인 소공작에게 다가갔다.

셔츠에 묻어난 핏자국의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깊은 상처는 아닌 것 같았다.

“작은 상처라고 해도 얼른 지혈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르네브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을 내밀었다.

“오늘 내기는 포기하시죠.”

“예?”

“치료를 받으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르네브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든 벨케인 소공작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 그게…….”

“설마,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릴 하시려는 건 아니죠?”

르네브는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영애의 말씀대로 돌아가서 상처 치료를 받도록 하죠. 그 전에, 한 가지 알려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르네브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뭔데요?”

“활시위를 다시 한번 당겨 보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벨케인 소공작의 주문에 의아했지만, 괜히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상처 부위가 감염될지도 모르니까.

르네브는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자세를 조금 고쳐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벨케인 소공작이 원하는 대로 하고 빨리 돌아가 소독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에,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힘을 조금 더 푸시고요.”

그러자 벨케인 소공작이 르네브의 뒤편으로 와 활 쏘는 자세를 고쳐 주었다.

일견 그에게 끌어안기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그때였다.

컹컹.

사냥개들이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

살벌한 기운을 흩뿌리며 무언가가 이쪽으로 달려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르네브는 지체하지 않고, 당기고 있던 활시위의 방향을 바꿨다.

“……!”

곧이어 마주한 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물론 이 산에서 마주한다면 가장 무시무시한 붉은 눈을 한 사람을.

“……폐하?”

전장에 있어야 할 이카르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환각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르네브가 제 눈을 의심할 때, 벨케인 소공작이 말했다.

“전장에 계셔야 할 분께서……. 어째서 여기에 계신 겁니까?”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가 두 사람에겐 중요한 모양이군.”

이카르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르네브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영애를 혼자 두고 전장으로 떠나지도 않았겠지.”

이카르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

벨케인 소공작과 르네브의 사이를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카르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처음 그와 마주친 세이렌 후작 저에서보다 르네브는 더 겁을 먹었다.

이카르가 자신을 해칠 리가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르네브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맞닿은 손을 통해 떨림이 전해진 걸까?

이카르가 붙잡은 르네브의 손목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이내 툭 내뱉었다.

“무섭게 했나 보군.”

그러곤 르네브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마른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이카르가 그대로 홱 몸을 돌렸다.

이카르에게 붙잡혔던 르네브의 손목을 바라보며 벨케인 소공작이 미간을 모았다.

“괜찮으십니까, 영애?”

하얗던 손목이 붉게 물들어 있었으나, 금방 멍이 들 것 같진 않았다. 잔뜩 화가 난 와중에도 그렇게 세게 손목을 쥔 건 아니었으니까.

르네브는 다른 손으로 조금 전까지 이카르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그러쥐었다.

“괜찮아요. 소공작님은 먼저 돌아가서 상처 치료를 하세요. 전 폐하를 쫓아가 봐야겠어요.”

르네브가 이카르 쪽으로 몸을 돌리려하는 순간이었다.

“……영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벨케인 소공작이 다급하게 르네브를 불러 세웠다.

“지금은 폐하께 가까이 가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여태껏 본 적 없는 이카르의 거친 모습에 벨케인 소공작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걱정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오해는 빨리 푸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르네브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몸을 돌렸다.

그사이 이카르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르네브는 뛰다시피 이카르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거의 따라잡았을 때쯤 이카르가 르네브를 돌아봤다.

“왜 따라오는 거지?”

벨케인 소공작과의 친밀한 접촉을 보고 한껏 흥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냉정한 반응이었다.

“폐하께서 오해하셨어요.”

“오해?”

이카르가 무감한 얼굴로 되물었다.

화를 내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만큼 냉담한 태도에 르네브는 조금 초조해졌다.

몇 달 만에 얼굴을 보는 건데 오해를 받은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네, 폐하께서 오해하셨어요.”

“내가 전장에서 구르는 동안 다른 남자의 품에 끌어 안겨 있었어. 그게 오해였다 이건가?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조용히 분노하는 이카르의 모습에 두려움이 밀려들었지만, 르네브는 침착하게 조금 전 상황을 설명했다.

돌연 사냥터에 나타난 멧돼지와 사냥에 성공한 뒤의 일에 대해.

그제야 이카르의 냉담하던 표정도 살짝 풀어졌다. 하지만 곧 이카르의 표정이 다시 살벌해졌다.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벨케인 소공작님과는 친구예요.”

“영애는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난 아니야.”

“…….”

“영애가 벨케인 소공작에게 관심이 없더라도 상대는 영애에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다고.”

르네브는 한숨을 삼켰다.

사실 르네브도 얼마 전까지는 벨케인 소공작이 제게 이성적 호감이 있다고 의심했다.

그러니 이카르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웨버링 백작님이요.”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폐하께선 웨버링 백작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계시나요?”

이카르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영애, 말이 되는 소릴 해.”

“아니면 웨버링 백작님 쪽에서 폐하께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요?”

“그럴 리가 없잖아.”

이카르가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르네브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곤 르네브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며 말을 이었다.

“대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애가 알고 있는 건 전부 사실이 아니야.”

눈빛만으로 사람을 얼려 버릴 것 같던 조금 전과 달리 쩔쩔매는 이카르의 반응에 조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르네브는 입매에 단단히 힘을 주고 이카르를 빤히 응시했다.

“웨버링 백작은 단순한 주치의에 그치지 않아. 돌팔이 같은 느낌도 조금 있긴 하지만 그녀는 제법 유능하고. 바슈케르 제국엔 필요한 인재로…….”

이카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르네브도 알고 있었다.

그간 건강 검진을 위해 멜리타와는 주기적으로 만나 왔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웨버링 백작 가 자체가 부유해서 그런지, 그녀는 많은 금화를 버는 일보단 바슈케르 제국민들의 건강을 우선시했다.

단기적으로는 통증을 없애는 데 쓸모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신체를 해치는 약 대신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일에도 힘썼다.

게다가 웨버링 백작은 일 중독자로 이성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르네브는 그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문 채로 이카르가 그녀에 관해 뭐라 떠드는지 가만히 지켜봤다.

얼마간 더 변명을 늘어놓던 이카르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웨버링 백작과는 일 관계 외엔 아무런 사심이 없어. 영애가 원한다면 삼자대면을 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강하게 제 결백을 주장하는 이카르의 모습에 르네브는 더 참지 못하고 살짝 웃어 버렸다.

“……?”

조금 전까지 심각하게 르네브를 설득하려 애쓰던 이카르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무슨 말씀하시려는 건지 잘 알아들었어요. 해명은 이제 충분해요.”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영애? ……지금 날 시험한 건가?”

“제 마음을 의심하는 폐하가 조금 괘씸했을 뿐이에요.”

이카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좋아요.”

르네브는 자신이 도망쳐 버릴까 봐 놓지 못하면서도 혹여나 부서질까 조심히 제 어깨를 쥔 이카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자연히 이카르의 시선이 맞닿은 두 사람의 손으로 내려갔다.

“그게 무슨…….”

연신 눈을 깜빡이던 이카르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저는 몰라요. 하지만 방금 제 대답은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폐하께서 제게 하신 제안의 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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