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사냥 대회 (76/148)


#76화 사냥 대회
2023.06.15.


“그러셨습니까?”

르네브의 말에 벨케인 소공작이 픽, 웃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전 싫다는 사람에게 질척대는 타입은 아니니, 그런 부분에선 마음 편히 놓으시죠.”

“제가 벨케인 소공작님이 싫다고 한 적이 있던가요?”

“없으시죠. 하지만 폐하께 마음이 있으시잖습니까.”

순간 르네브는 뜨끔했다.

“알고 계셨어요?”

되묻는 르네브를 보며 벨케인 소공작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입니까?”

“눈치채고 물어보신 것 아니었나요?”

“유도 심문을 해 본 건데 쉽게 대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카르가 돌아오면 어차피 벨케인 소공작도 알게 될 일이었기에, 르네브는 굳이 첨언하지 않았다.

“뭐, 사실 단서는 많았습니다. 은연중에 커플 룩을 입는다거나, 둘이 몰래 홀을 빠져나갔다가 함께 돌아오신다거나 하셨으니까요.”

벨케인 소공작이 조목조목 증거를 댔고, 르네브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때 커다란 매 한 마리가 날아와 르네브와 벨케인 소공작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곧 사냥 대회가 시작한다는 걸 알리러 온 모양이었다.

“눈치 없는 녀석이네요. 한참 대화가 흥미진진했는데 말이죠.”

벨케인 소공작이 고개를 들고 새를 찌릿 노려봤다.

“슬슬 돌아갈까요?”

“그러죠.”

사냥 대회를 위해 르네브와 벨케인 소공작은 간이 막사 쪽으로 돌아왔다.

영애들은 치렁치렁한 드레스 대신 가벼운 셔츠와 승마 바지를 입고 있었고, 제각기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영식들도 제가 사용할 무기를 손질하거나, 의복을 손보는 등 곧 시작할 사냥 대회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제 곧 사냥 대회를 시작하려나 봐요.”

두 사람을 발견한 레이첼 왕녀가 높게 든 손을 흔들었다.

르네브는 레이첼을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내딛는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르네브와 벨케인 소공작이 막사 앞에 도착하자 사교 모임의 리더 격인 파비앙 후작 영식이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파비앙 후작 영식이 귀족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모이신 것 같군요. 그럼 오늘 경기 규칙을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파비앙 후작 영식이 정중하게 동의를 구하자 다들 동작을 멈추고 파비앙 후작 영식을 주목했다.

“모두 알고 계시다시피, 경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으신 분이 오늘 사냥 대회의 승자가 됩니다.”

파비앙 후작 영식이 간략히 설명을 마치자 가장 앞에 있던 영애가 물었다.

“희귀성이라거나 사냥감의 크기는 점수에 영향이 없는 건가요?”

“좋은 질문이십니다. 희귀할수록 높은 점수를 부여합니다. 같은 종류의 짐승이더라도 크기에 따라 점수는 차등 분배될 거고요. 또 질문 있으십니까?”

이후에 몇몇 사람이 규칙에 관해 물었고, 르네브는 파비앙 후작 영식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고 선 귀족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긴장했는지 상기된 얼굴로 잔뜩 굳어 있는 영식도 있었고, 반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허공에 검을 휘둘러대는 영식도 있었다.

그 속에 아직까지 무기 숙지가 어려워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화살이 발사된다는 거잖아.”

사냥 대회엔 별 흥미가 없어 보이는 영애에게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시종이 열심히 석궁 사용 설명을 덧붙였다.

“예, 맞는 말씀이긴 한데, 안전장치를 먼저 풀어 주셔야…….”

르네브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저 멀리 보이는 푸르른 산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냥 대회가 열리는 이곳은 파비앙 후작 소유의 산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위험한 야생 동물이 출몰할 수 있었다.

그러니 사전에 산 초입에 울타리를 쳐 두고, 사나운 산짐승들을 정리해 두었을 터였다.

오늘 사냥 대회는 황실에서 주최하는 것처럼 공식적인 건 아니었고, 모임에 참여하는 귀족들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한 작은 이벤트였다.

하지만 참여 의사를 밝힌 귀족들의 눈빛에는 총기가 돌았다.

이 기회에 영식들은 제 우월함을 뽐낼 수 있었고, 영애들은 제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사냥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사냥 대회를 마음에 둔 이성에게 호감 표시를 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리고 르네브는 그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 쪽이었다. 그저 공기 맑은 곳에서 재밌는 책이나 읽으려고 나온 것이었으니까.

“모쪼록 다치지 않고, 즐겁게 게임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파비앙 후작 영식의 경기 규칙 설명이 끝나자 레이첼이 르네브 옆에 다가왔다.

“영애. 저하고 내기하지 않을래요?”

“내기요?”

“네. 두 사람 중 누가 더 많은 사냥감을 잡는지를 두고요.”

레이첼이 호전적인 제안을 하는 건 아마도 르네브의 사냥 대회 참여를 독려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사냥 대회에 별로 흥미가 없다는 걸 겉으로 너무 드러냈나?’

르네브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그럼 뭘 걸고 내기를 할까요?”

“음…….”

레이첼도 딱히 결정해 둔 건 없었는지 턱을 감아쥐고 고민을 시작했다.

“저도 두 분 내기에 참여해도 되겠습니까?”

파비앙 후작 영식이 그녀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영식께선 뭘 거시려고요?”

“그건 비밀입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저도 내기에 끼워 주실 겁니까?”

레이첼이 그래도 괜찮겠냐며 의견을 구하는 눈빛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동시에 르네브를 보는 파비앙 후작 영식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사실 한참 전부터 레이첼 왕녀와 파비앙 후작 영식 사이에는 묘한 핑크빛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르네브는 그런 방면으로 눈치가 완전히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럼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건 어떨까요?”

“소원이요?”

“네, 물론 상식선에서요.”

르네브의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파비앙 후작 영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 괜찮은 건 같은데 영식의 생각은 어떠세요?”

“저도 좋습니다.”

영식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근처에서 사냥 도구를 점검하던 다른 귀족들도 하나둘씩 참여 의사를 밝혔다.

“저도 내기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끼워 주시겠습니까?”

“저도요. 끼고 싶네요.”

별것 아닌 내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냥 대회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곧 힘찬 뿔피리 소리와 함께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

돌아다니기에 편한 바지와 셔츠 차림이었음에도 산길은 제법 험난했다.

수풀이 우거진 곳을 헤치고 나아가다 르네브는 작은 삵을 발견했다.

‘귀엽다.’

삵이 르네브를 보고는 경계의 눈빛을 하고는 하악질을 했다.

‘그래도 귀엽다.’

르네브는 활시위를 겨눌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멀리서 삵을 그저 지켜봤다.

처음에는 르네브를 잔뜩 경계하던 삵도 이내 저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는지 곧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이런, 사냥감을 놓치셨군요.”

그때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는 탁한 미성이 들려왔다. 르네브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공작께도 기회가 있던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영애께서 먼저 발견한 사냥감을 빼앗을 생각이 없었을 뿐입니다.”

“친절하시네요.”

르네브는 그렇게 말하곤 이미 저만치 멀어진 삵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벨케인 소공작이 르네브의 옆자리를 꿰차며 물었다.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왜요? 이제는 대놓고 제 사냥감을 빼앗으시려고요?”

르네브는 가늘어진 눈으로 벨케인 소공작을 쳐다봤다.

“어차피 영애께선 사냥 대회에 별 흥미가 없어 보이시던데요. 제 추측이 틀렸습니까?”

벨케인 소공작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눈치채셨나요?”

“네, 레이첼 왕녀님께서 내기를 제안하실 정도로 말이죠. 주시죠.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손을 내밀었다.

확실히 어깨에 들쳐 멘 커다란 활은 제법 무거웠다. 르네브는 사양하지 않고, 그에게 활을 건넸다.

그리고 무릎까지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을 밟으며 목적 없이 걸었다.

어깨에 커다란 활을 멘 채로 벨케인 소공작이 르네브의 옆을 따라 걸었다.

“사실 저는 사냥 대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사냥감이 불쌍해서 그러십니까?”

오늘 잡은 짐승들은 저녁 만찬에 오르게 될 것이다. 손상이 적은 가죽은 겨울을 요긴하게 나게 도와줄 코트가 되겠지.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냥꾼들도 있으니, 마냥 산짐승을 사냥하는 것이 나쁘다고만 생각하진 않았다.

산나물이나 약재를 캐러오는 사람들에게도 오히려 사냥 대회는 이득이었다. 위험한 야생동물이 얼마간은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 부분도 없지 않지만, 사냥 대회의 이점도 분명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벨케인 소공작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쯤 더 목적 없이 산속을 걸었을 때였다.

“……?”

빠르게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엄청난 크기의 검은 멧돼지가 있었다.

“멧돼지예요.”

괜히 자극하지 않도록 르네브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벨케인 소공작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찬가지로 벨케인 소공작도 작게 속삭이며 르네브에게 활을 건넸다.

“음식 냄새에 이끌려 산 아래까지 내려온 모양입니다.”

자세를 낮춰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르네브와 벨케인 소공작은 제각기 무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멧돼지를 지켜봤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침을 줄줄 흘리는 멧돼지의 모습에 르네브가 미간을 모았을 때였다.

“……!”

멧돼지가 돌연 경로를 틀어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벨케인 소공작이 다급하게 외쳤다.

“영애. 피하십시오!”

르네브는 달리는 대신 재빨리 활을 들어 이쪽으로 돌진해오는 멧돼지를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피웃!

회전하며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멧돼지의 몸통에 맞았다.

하지만 멧돼지의 몸이 잠깐 휘청였을 뿐 달리는 속도가 줄지 않았다. 화살촉이 두꺼운 가죽을 뚫을 정도로 깊게 박히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단 영애는 이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검을 뽑아 든 벨케인 소공작이 르네브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르네브는 얼른 새 화살을 뽑아 들었다.

조금 전에 맞은 화살 때문에 멧돼지는 더욱 흥분한 상태처럼 보였고, 표적인 르네브를 끝까지 쫓아올 것이 분명했다.

르네브는 무지성으로 돌진하는 멧돼지를 향해 다시 활시위를 겨눴다.

“제 달리기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신 모양인데요.”

르네브가 최대한 빨리 달린다고 해도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는 멧돼지에게 금방 따라잡힐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낮게 한숨을 내쉰 벨케인 소공작이 바닥의 돌을 주워 멧돼지에게 던졌다.

목표물을 르네브에서 자신 쪽으로 바꾸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멧돼지는 콧김을 내뿜으며 르네브 쪽으로 돌진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벨케인 소공작이 공격 자세를 취했다.

돌격하는 멧돼지를 검으로 벨 작정인 듯했다.

르네브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쉬었다. 폐부의 공기를 다 뱉어 낸 뒤엔 숨을 멈춘 채로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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