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질척거리는 루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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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질척거리는 루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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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질척거리는 루시우스
2023.06.14.
벨케인 소공작의 권유에 사교 모임에 참석한 르네브는 새로 사귄 바슈케르의 귀족들과 연극을 보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물론 연극 한 편 본 것으로 이카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현 황제가 집권 중인 만큼 연극 내용은 다소 과장되고 부풀려졌을 테니까.
오히려 이카르의 능력 부분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된 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르네브가 아는 것과 다른 내용도 많았다.
가령, 이카르가 황궁 안 깊숙한 곳에서 자랐다는 것. 이는 확실한 거짓임이 틀림없었다.
르네브가 아는 이카르의 삶은 일반적인 황태자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황태자로 자라지 않았지만, 황제가 된 루시우스보다 이카르에겐 훨씬 더 거칠고, 야성적인 면모가 있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는 뜻이다.
하지만 연극에서의 이카르는 일찍이 어머니와 형제들을 잃은 것 외에 삶의 고저가 없었다.
‘연극 내용의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픽션이었을까?’
문득 르네브는 자신이 생각보다 이카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이카르는 이전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때 들려온 벨케인 소공작의 목소리가 르네브를 상념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십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눈짓으로 마차 창 너머를 가리켰다.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황궁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한 줄도 모르고 멍하게 있었나 보네요.”
“가끔은 그런 시간도 필요한 법이죠.”
마차에서 내린 벨케인 소공작이 르네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레이첼 왕녀와 파비앙 후작 영식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영애, 다음에도 함께 외출하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르네브는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왕녀님을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길.”
사교 모임 내내 레이첼의 곁을 맴돌던 파비앙 후작 영식이 르네브와 벨케인 소공작을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레이첼과 대화를 나누며 귀빈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벨케인 소공작이 말했다.
“영애,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르네브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처음엔 벨케인 소공작이 제게 보이는 관심을 조금 오해했다.
그리고 오늘 모임에 참석해 본 결과 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오늘 참석한 모임에는 레이첼 외에도 바슈케르의 귀족 영애가 몇 더 있었다.
벨케인 소공작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왕자님처럼 가정 교육을 철저히 잘 받았고, 타인을 향한 매너와 배려심이 몸에 익은 것 같았다.
‘인간 댕댕이.’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오늘 어떠셨습니까?”
황궁 복도에 접어들었을 때 벨케인 소공작이 물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권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영애께 권유하기까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간 제가 바슈케르의 귀족들과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그것도 있고 최근엔 드한 경을 돕는 일로 바쁘다고 듣기도 해서 시간을 내는 게 어려울 거라 예상했습니다.”
벨케인 소공작의 말에 귀 기울이며 걷는데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
루시우스의 측근 시종이었다. 곧 르네브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마침 르네브를 발견한 시종이 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영애, 이제 오십니까?”
“무슨 일이죠?”
“황자 전하께서 영애를 뵙기를……. 마침 저기 오시는군요.”
르네브는 시종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루시우스를 발견했다.
“르네브. 대체 종일 어디에 갔었던 거야?”
루시우스가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며 벨케인 소공작을 쳐다봤다.
그게 너무 우스웠다.
회귀 전에는 제 남편이었을지 모르지만, 현재 루시우스는 르네브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편도, 약혼자도.
그러니 자신이 어디에 누구와 갔는지 보고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마치 바람난 부인을 단속하는 것 같은 뉘앙스에 기가 찼다.
결국, 르네브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르네브?”
루시우스가 한쪽 눈썹을 세운 채로 르네브를 빤히 응시했다.
“황자 전하께선 제게 적당한 예의를 갖출 생각은 없으신가요?”
심지어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는 타국의 귀족인 벨케인 소공작도 함께였다. 그런데도 더러운 입에 함부로 제 이름을 올리다니.
“레이디의 침실 앞에서 기다리는 남성이라, 다소 매력이 떨어질 것 같은데 영애 생각은 어떠십니까?”
벨케인 소공작이 루시우스를 돌려 깠다. 심지어 선하게 웃으며.
그건 루시우스의 심기를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루시우스의 미간이 잔뜩 모였다. 탐색하는 시선으로 벨케인 소공작을 훑으며 루시우스가 느리게 입을 뗐다.
“베니스탄의 귀족이라고 했던가?”
경고성 짙은 루시우스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하지만 벨케인 소공작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응수했다.
“예, 벨케인 공작 가의 사람입니다.”
루시우스는 제 권위에 도전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에시카가 그랬듯, 루시우스 또한 남자 주인공 버프를 받은 덕에 조금만 인상을 쓰면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벨케인 소공작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사람 다루는데 꽤 노련한 이카르에게도 제법 귀찮은 상대였으니 말이다.
‘천적이다.’
르네브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루시우스의 속을 긁어 대는 벨케인 소공작에게 내심 감탄했다.
“피곤하실 텐데, 먼저 안으로 드시죠. 영애.”
벨케인 소공작이 말했다. 루시우스의 살벌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러곤 루시우스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르네브에게 살짝 윙크를 해 보였다.
마치, 제가 이 사람은 잘 처리할 테니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가시라는 것처럼.
르네브는 몸소 나서 주겠다는 벨케인 소공작의 배려를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소공작께서도 좋은 밤 되세요.”
그리고 ‘설마, 아니겠지?’ 하는 시선으로 르네브를 응시하던 루시우스의 표정이 곧 굳어졌다.
르네브는 루시우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
다음 날 르네브가 아침 식사를 딱 한입 남겨 두었을 때, 키어넨이 말했다.
“레이디, 드한 경께서 찾아오셨어요.”
며칠 쉬라더니? 벌써 르네브의 일손이 필요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알겠어요. 곧 가겠다고 전해 줘요.”
“네. 레이디.”
입가를 정리한 르네브는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파라디움의 황자 전하께서 영애를 귀찮게 하신다 들었습니다!”
르네브를 보자마자 드한이 외쳤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벨케인 소공작께서 그 사실을 친히 제게 알리러 오셨지 뭡니까?”
왜 진즉 말하지 않았냐는 드한의 시선에 르네브는 빠르게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러니까 지금.’
어제의 일을 벨케인 소공작이 드한에게 고자질했다는 뜻이었다.
‘이걸 현명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르네브가 쉬이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드한이 빠르게 덧붙였다.
“그래서 파라디움의 황자 전하께는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시길 권했습니다.”
칭찬을 바라는 것도 같은 드한의 의기양양한 표정에 르네브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그렇게 하셨어요?”
르네브의 물음에 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파라디움으로 건국제 초대장을 보낸 쪽은 엄연히 바슈케르였다.
드한의 행동은 손님을 초대해 놓고 얼른 돌아가라고 쫓아낸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보통은 타국의 귀빈을 초대한 다음, 귀빈이 제 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었으니까.
귀빈이 오래 머물면 그사이 친목을 다지기도 하고 말이다.
곧바로 드한에게 고자질한 벨케인 소공작도 그렇지만, 드한의 처사는 확실히 매몰찼다.
“황자 전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뭐, 기분이 썩 좋아 보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군말 않고 곧 돌아가겠다고 하시더군요.”
모멸감을 느끼고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루시우스의 표정이 상상되었다. 르네브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하고, 시원하게 웃어 버렸다.
“……영애?”
“아니, 너무 통쾌해서요.”
르네브는 웃음이 가실 때까지 한참을 더 웃었다. 눈가에 눈물까지 매달고.
“뭐 영애께서 즐거우시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 드릴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르네브의 웃음이 멎어 갈 때쯤 드한이 말했다.
“뭔가요?”
“폐하께서 완쾌하셨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르네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이카르가 있는 곳이 전장인 만큼 섣불리 안심할 수는 없었다.
***
이카르를 향한 제 마음을 부정하지 않기로 한 뒤부터 르네브는 바슈케르 사회에 섞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째로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과 많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고, 둘째로는 벨케인 소공작, 레이첼 왕녀와 함께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저는 조금 걷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곧 사냥 대회가 있을 예정이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때문인지 조금 과식한 것 같았다.
“그럼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마침 저도 조금 걷고 싶던 참이었거든요.”
르네브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벨케인 소공작도 몸을 일으켰다.
사냥 대회를 위해 간이로 쳐 둔 막사를 지나치자, 사냥개들이 보였다.
풀과 꽃 냄새를 맡던 사냥개들이 르네브와 벨케인 소공작을 보고는 꽁지가 빠져라 꼬리를 흔들어 댔다.
자연히 르네브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개 좋아하십니까?”
벨케인 소공작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냥개의 턱을 긁어 주며 르네브를 올려다봤다.
르네브는 곁에 서서 그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순하네요.”
“교육이 잘 된 아이들 같습니다.”
벨케인 소공작은 바쁘게 꼬리를 흔드는 다른 개의 머리도 쓱쓱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따가 잘 부탁한다.”
마치 벨케인 소공작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개들이 컹컹, 우렁차게 짖었다.
사냥 대회는 활을 쏘아 맞힌 동물을 사냥개들이 물어오는 식이었다.
“지금 로비하신 거예요?”
르네브는 가볍게 농담을 던졌고, 벨케인 소공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였습니까? 뭐,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사냥 대회라고는 하지만 가능한 우승하고 싶은 건 사실이니까요.”
그의 말대로 작은 사냥 대회였지만, 벨케인 소공작은 나름대로 진심인 듯했다.
사냥개들을 지나쳐 걸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사교 모임 내에 흐르는 연애 기류가 주제로 올랐다.
“영애는 마음에 드는 분 있으십니까?”
“다들 좋은 분들 같아요.”
“연애 대상은 없다 이 말이군요.”
르네브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실토했다.
“사실 그간 소공작께서 제게 마음이 있으신 줄 오해하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