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어? (74/148)


#74화 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어?
2023.06.13.


쪽지로 알려온 장소에 나가지 않은 게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내가 나가 볼게.”

앰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복도에 선 루시우스를 보자마자 르네브의 미간이 좁아졌다.

“르네브.”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냐는 물음은 무의미했다.

르네브의 의사와 상관없이 루시우스는 르네브에게 용건이 있고, 그걸 해결하기 전까지는 귀찮게 굴 모양이니까.

“안으로 들어오세요.”

때 아닌 손님의 방문에 잠시 의아해하던 키어넨이 물었다.

“레이디, 차를 준비할까요?”

키어넨에겐 루시우스와 자신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차는 됐으니, 물러가 있도록.”

르네브가 입을 열기도 전에 루시우스가 명령했다.

키어넨이 르네브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래도 되겠냐는 눈빛을 보내왔고, 르네브는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꾸벅 허리를 숙인 키어넨과 앰버가 자리를 뜨자, 응접실에는 루시우스와 르네브만이 남았다.

“르네브. 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어?”

“약속이요?”

“그래.”

“전 전하와 약속을 한 기억이 없는데요.”

“쪽지를 받지 못했나?”

“쪽지는 받았어요.”

“그럼 왜 나오지 않았지?”

루시우스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전하께서 뵙자고 하시면 제가 반드시 응해야 하나요?”

르네브의 차가운 말투에도 개의치 않고 루시우스가 말했다.

“네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렸어.”

“약속이란 게 원래 쌍방의 동의가 있어야 성립하는 것 아닌가요?”

르네브의 상식적인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듯 루시우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르네브. 네 말이 맞아.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한 내가 미련했어.”

르네브는 쩍 벌어질 뻔한 입을 겨우 단속했다.

회귀 전의 루시우스는 황제가 된 이후로 르네브에게 네 말이 맞는다고 한 역사가 없었다.

‘황후, 그대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겠지.’

과거의 루시우스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그도 아니면,

‘아냐. 그건 황후의 생각이 틀렸어.’

종내에 르네브의 의견이 맞았을 때는 어물쩍 넘어가거나 사과 또한 없었다.

‘그런 루시우스가 사과뿐 아니라, 제 잘못을 인정하다니.’

대체 루시우스가 왜 이렇게 변한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시간에 굳이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르네브, 나와 파라디움으로 돌아가.”

“……!”

르네브는 루시우스가 제 공간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려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폭발할 것만 같아서.

원치 않게 삶을 마감했을 때, 제 가족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리고 제 하나뿐인 아이 카엘을 빼앗겼을 때.

그때가 떠올라서.

르네브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을 느낄 정도로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루시우스.”

이름이 불리자 루시우스의 얼굴에 기대감이 걸렸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르네브는 단 한 번도 루시우스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

“……너 미쳤어?”

그러나 이어진 르네브의 말에 루시우스의 미간이 잔뜩 좁아졌다.

“……뭐?”

“아, 실례했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시기에 그만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네요.”

“…….”

“실언했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죠.”

조금 험악해진 루시우스의 표정에선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기색이 읽혔다.

“내 말 명심해. 르네브. 솔티 다음은 베니스탄과 라이나가 될 거야. 그리고 그다음 타킷은 과연 어디가 될 것 같아?”

“파라디움이 되겠죠.”

“잘 아네. 그러니까 파라디움으로 돌아가자. 황제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적기야.”

“그렇다면 바슈케르는 제게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겠군요.”

루시우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바슈케르에 있는 동안 세뇌라도 당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군. 대체 그 어린 황제가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실제로 이카르는 역대 황제 중에서도 젊은 축에 속했다. 그리고 루시우스는 이카르보다 어렸다.

‘이카르가 너보다 형이거든?’

르네브는 그 말을 꾹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제게 세뇌를 시도하려는 건 오히려 황자 전하이신 것 같은데요.”

루시우스의 미간이 모였지만, 르네브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양국 간의 불화에 대한 밀담을 나누기에 이곳은 부적절해 보이네요.”

사실이었다.

이카르의 비밀 호위들은 기척을 숨기고 은신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 이카르가 제 비밀 호위를 남겨 두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는군.”

루시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잘 손질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소후작과 후작도 너처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이야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새롭지 못한 협박에 르네브는 짜게 식은 눈으로 루시우스를 응시했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르네브. 전쟁이 발발하면 바슈케르의 황제는 제일 먼저 파라디움의 서부를 공격하겠지.”

“…….”

“그때 넌 세이렌 후작과 소후작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해 요소가 될 거야.”

방해 요소라니.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루시우스의 언행에 르네브는 이만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황자 전하께서 하고자 하는 말씀이 뭔지 잘 알아들었어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배정된 숙소로 돌아가시죠.”

“그래,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냈으니 당황스럽겠지. 충분히 생각해 보도록 해.”

루시우스의 그 잘난 낯짝을 더 보고 있기 힘들어서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루시우스는 자신과 파라디움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르네브는 그게 아니라고 되짚어 주려다 그만두었다. 일단 루시우스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편이 더 급했으니까.

***

그날 이후로 루시우스가 일방적으로 르네브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루시우스가 파라디움으로 떠날 때까지 마주치지 않도록 르네브는 칩거에 들어갔다.

“아가씨. 휴가를 이렇게 보내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온종일 책만 읽는 르네브에게 앰버가 물었다.

“뭐, 드한 경을 돕는 것도 내 뜻이듯이 쉬고 싶으면 언제든 쉬어도 돼.”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 건네자, 그제야 이해했는지 앰버가 눈을 끔뻑였다.

“그렇긴 하네요.”

그때 키어넨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레이디.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키어넨과는 입을 맞춰 둔 상태였다.

가령, 파라디움의 황자가 찾아오거든 언제 어느 때든 르네브가 외출 중인 것으로 하기로.

그러니 찾아온 손님이 루시우스일 리는 없었지만, 눈살이 찌푸려졌다.

르네브의 반응을 살피던 키어넨이 빠르게 덧붙였다.

“벨케인 소공작님이세요.”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갈 테니, 응접실로 안내해 주세요.”

“네. 레이디.”

꾸벅 허리를 숙인 키어넨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소파에서 일어난 르네브는 거울 앞에 섰다.

오늘은 내실에서 계속 쉴 예정이었기에 조금 가벼운 옷차림이었으나, 그렇다고 격식에 어긋날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를 조금 빗겨 드릴게요.”

앰버가 서둘러 콘솔에서 브러시를 꺼내 살짝 헝클어진 르네브의 머리칼을 말끔히 정리해 주었다.

“다 됐어요. 아가씨.”

“고마워.”

르네브는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좋은 오후예요.”

“좋은 오후입니다.”

르네브가 자리를 권하자, 벨케인 소공작이 말갛게 웃었다.

“거처를 옮기시게 된 건 지난번의 그 일 때문입니까?”

벨케인 소공작이 응접실 내부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폐하께선 이편이 조금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신 모양이에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벨케인 소공작이 말했다.

“그렇군요. 오늘 영애를 뵙고자 한 건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고, 청하고 싶은 것도 있어서입니다.”

“…….”

“그리고 사과드릴 것도 있고요.”

르네브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벨케인 소공작에게는 도움을 받은 기억은 있어도 사과를 들을 만한 일이 없었다.

“사과요?”

“지난번 건국제 때 황자 전하와 영애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습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쨌든 들은 건 들은 거니, 실례했습니다.”

“아, 네…….”

“그리고 그 일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때 황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영애와 약혼할 뻔했다고 하시던데요……?”

“……약혼이란 게 어느 한쪽의 의견으로만 성립하는 관계는 아니니까요.”

르네브의 대답에 벨케인 소공작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니스탄도 파라디움처럼 철저한 신분 체계를 고수했다.

가장 높은 신분인 황족이 나서서 약혼을 추진하려 든다면 귀족 대부분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한쪽의 일방적인 결론이었나 봅니다. 물론 그 한쪽의 뜻대로 되지는 못한 것 같지만요.”

루시우스와의 약혼 따위와 같은 일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기에, 르네브는 빠르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청하고 싶다는 건 뭔가요?”

“최근 들어 영애께서 드한 경의 일을 돕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건국제 또한 영애께서 주관하셨다죠?”

르네브가 고개만 끄덕이자, 벨케인 소공작이 말을 이었다.

“황궁에서 그런 큰 행사를 준비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라 들었습니다. 저희 왕비 전하께서도 왕궁에서 한번 행사를 치르고 나면 한동안은 몸져누우셨거든요.”

베니스탄의 왕비는 벨케인 소공작의 고모였고,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모양이었다.

제 저택에서 무도회나 다과회를 열어 본 귀부인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었다. 작은 것 하나도 안주인의 손길과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덕분에 고충을 알게 되셨나 보네요.”

벨케인 소공작이 건국제 준비로 고생 많았다며 덧붙인 뒤 본론을 꺼냈다.

“그동안 저는 라이나의 왕녀님과 함께 젊은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라면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바슈케르의 유력 귀족가의 영애와 영식들의 소규모 모임. 그리고 그곳에 레이첼 왕녀와 벨케인 소공작이 드나든다는 것도.

그 소식을 듣고 르네브는 두 사람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카르가 바슈케르의 새 황제가 되었듯이, 곧 바슈케르의 귀족들도 세대교체가 될 것이었다.

언젠간 가문을 물려받아 바슈케르 제국의 기둥이 될 그들과 친분을 쌓아 둔다면 본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도움이 될 테니.

“그곳에서 영애를 초대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마침 연극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함께하시면 어떨지 해서 말입니다.”

연극이라…….

벨케인 소공작이 말한 연극은 바슈케르 황가의 일화를 재구성한 것으로 회귀 전에도 제법 호평을 받았었다.

물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연극이 언제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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